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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아름다운 자녀, 아름다운 부모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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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교회에서 어버이주일로 지내게 됩니다.
그동안 저희들을 정성껏 길러주시고, 사랑으로 기도해주시고, 양육해주셨던 부모님께 대한 특별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리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또 우리 마음속에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 늘 있지만, 이렇게 특별한 날을 선정해서 기념하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늘 생활 속에 분주하다보면 한 곳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어서 그저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우리의 모든 삶에 잊어버리고 지내는 것들이 있게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도 그렇고, 때로는 선생님에 대한 마음, 또 자녀들에 대한 마음도 그러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한 방향으로 치닫다보면 우리가 생각 못한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날들을 생각해보며 하나님 앞에, 또 부모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주변 것들 앞에 다시 한 번 우리마음을 정돈하고 가다듬기 위해서 이와 같은 날을 선정한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부모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우리의 부족이나 그릇된 면을 바로잡고 또 강화하여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너희는 부모님을 잘 순종하라 그리고 공경하라 그리고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너희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성경에서 부모님을 잘 섬기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2000년 전의 고대사회 속에서도 이와 같은 부모님을 섬기라는 말씀이 나온 것을 보면 그 시대에 역시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여간해서는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약에 섬기는 것이 쉽고 잘되는 것이라면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그 수천 년 전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이미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이전시대에도 역시 부모를 섬기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친히 주신 계명들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바르고 꼭 해야 될 일이지만 또 그만큼 어려워서 하기 어려우니 ‘너희가 이것을 믿음 안에서 꼭 해야 된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바울도 다시 언급하고 있으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의 성령께서 인도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부모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생각해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녀들아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잘 들어 마음속에 받아들이며 부모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님을 공대하고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수천 년 전에도 이렇게 어려웠던 일들, 지금 시대에도 어려웠던 일들, 그러나 반드시 해야 될 일이고, 유익한 일이고,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부모님을 순종하고,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문화를 이해하고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입장과 수준에서 배려해 드려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내 입장과 문화가 아닌 상대의 입장과 문화에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의 어머님이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제가 지금 한국나이로 오십이니까 몇 년 전에도 사십 후반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집에 들어가면 꼭 여쭤보시는 것이 있어요. “밥 먹었냐?” 글쎄 마흔 몇 살 먹은 사람보고 왜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이 되겠지요.

이 시대에 밥 굶는 사람도 없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밤 11시에 들어가도 “밥 먹었냐?”라고 여쭤보세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도대체 “밥 먹었냐?”라고 물어보시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꼭 ‘음식을 먹었냐?’ 그런 뜻은 아닌 것 같아요. 바쁘게 다니다 보면 혹시 때 거르고 또 혹시 건강 잘 챙기지 못한 것이 아니냐? 제일 중요한 것이 건강이니까 부디 건강을 잘 챙겨라 하는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보면 ‘밥 먹었냐’라는 말은 ‘건강하게 지내라, 그리고 너도 네 몸을 잘 생각해라.’는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것이라는 생각하고는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고 그 마음을 읽어드려 그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순종이고 공경이지요. 특별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을 이해하고 해결해주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이것은 큰 문제와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감정적인 문제에 접근해서 해결할 때는 절대적으로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제가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아침에 보통 늦게 일어나서 이불도 안개고 밥도 잘 안 먹고 허겁지겁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아침에 나가는데 “너, 이불 개” 라고 말하면 거기서부터 전투가 시작되는 겁니다. 아이들이 이불 개라고 말하면 쉽게 순순히 이불 개는 아이들은 거의 드물 겁니다. 아마 이불 순순히 갠다면 그 아이는 아주 착한 아이거나 아주 모자라거나 둘 중의 하나일겁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순순히 말을 잘 듣지를 않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불 개. 지금 당장.” 이라고 얘기하면 그 순간부터 벌써 정서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고 전투가 벌어지는 겁니다.
아이들도 툴툴 거린다거나 아니면 억지로 해도 부모의 마음에 승복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힘에 눌리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가령 이렇게 얘기한다고 합시다.
“자, 이불을 꼭 개라. 그런데 오늘은 그냥 가고 내일부터 개라.” 그러면 애들은 다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안 해도 되니까.
사람들은 지금 안 해도 되면 무조건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개라”라고 얘기하면 벌써 얼굴이 찡그러질 텐데 “내일부터 개라”라고 말하면 “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개나요? 절대 안개죠.
그럼 다음날 ”어저께 갠다고 했는데 왜 안 갰냐?” 그렇게 물어보시면 안 되고, “어제도 네가 못 개더니 오늘도 못 개는구나! 굉장히 바쁜가보지?” 라고 상대를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애들도 나름대로 바쁘거든요.
그래서 아이에게 여지를 주고 ‘내일부터 꼭 개라’고 얘기한다든가 아니면, ‘일주일 후부터 개라’고 한다든지 말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개라고 해도 또 안개요.
“오늘도 또 바빴나 보구나!” 이렇게 몇 번 반복을 하다보면 그 다음에는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나 낮이나 다른 때에 “엄마나 아빠하고 약속을 해서 일주일동안 계속 뒤로 미뤘는데 이제는 꼭 개야 되지 않겠니?” 라고 얘기하면 아이들도 벌써 정서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면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정서가 움직이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정서를 정서로 맞부딪히게 되면 거기는 반드시 충돌이 일어납니다. 정서를 논리로 깨달을 수 있는 과정을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상대를 이해하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님께도 우리가 잘 순종하고 복종한다는 것은 부모를 이해하고 부모의 문화를 따르는 겁니다.
도저히 내가 부모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을 때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세대와 우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내가 부모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좀 지루한 과정이 들더라도 내가 왜 그것을 못하는지 부모님이 이해하실 수 있는 언어와 구조로 설명해 드리고 이해시키려는 노력까지는 자녀들이 해야 된다는 겁니다.

특별히 현재 힘의 구조를 생각해서 강하다고 느끼는 쪽이 언제나 배려하고 이해를 상대에게 구해야 합니다. 강자의 특징은 약자의 약점을 배려하고 관용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강자인가 약자인가는 간단합니다. 내가 적어도 강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겨줘야 되고, 베풀어주어야 되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내가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절대 승자가 아닙니다.

내가 진정한 승자라는 것은 상대를 생각할 때 가엾어 보이고, 배려해주어야 되고, 베풀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 진정한 승리와 성공을 이룬 사람인 것입니다.
강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의 어려움이나 누추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지금 이 자리에 있으니 얼마나 내가 많은 수고를 했는가라는 심리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현재의 위치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절대 자기의 어려웠던 과거에 대해서 꺼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도 위축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그와 같은 사실이 더 위축시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려운 때를 담대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존감을 가지고 담대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과 나 자신을 생각할 때 언젠가 힘의 균형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전에는 부모님이 아이들을 배려하고 자녀들을 배려하고 도와줬는데, 어느 날 문득 전에는 우리 부모가 나를 업고 갔는데 이제는 내가 부모님을 업고 가야할 때가 됐구나! 라고 느끼는 때가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제는 내가 부모님을 이해하고, 내가 부모님을 배려하고, 내가 부모님께 대하여 섬김의 때가 됐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공경하라>는 것은 정말 생각해 보면 믿음 안에서 해야 할 만큼 쉽지 않다는 것도 생각해 봅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공경하라는 것은 그 당시 시대 속에서 부모님들이 때로는 신앙과 어긋나는 다른 것을 요청할 때 그것은 부모님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부모님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니까.

그러나 <믿음 안에서 하라>는 것은 또한 편으로는 이렇게도 생각해봅니다. 정말 부모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믿음 안에서 해야 할까? 그러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이 어려워서 믿습니다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듯이 부모를 섬기는 것도 어렵지만 우리가 믿음 안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고 우리 삶의 진정한 도리니까 그렇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바른 공경이란 그 입장에서 기쁘고 존재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해 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순종하고 공경해드리는 마음을 가질 때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빛이 됩니다.

두 번 째보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섬김에 대해서 우리는 기쁨과 감사한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모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생각해야 합니다.
섬길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어야 합니다. 모든 일은 짐으로 생각하면 한 없이 짐이고, 힘으로 생각하면 한 없이 힘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이라고 말씀드리는데 부모님 섬기는 것도 우리들에게 짐이 아니고 힘입니다.

부모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축복을 받았다는 뜻이고, 내 인격이 그만큼 빛난다는 뜻이지요. 여러분 세상에 창피한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의 모습이 아무리 누추하고 부모의 모습이 아무리 남루해도 그 부모는 우리들에게 부모이고, 그 부모는 우리들에게 자랑스러운 부모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모습이 남루하고 누추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부모를 섬긴다면 내 인격이 얼마나 고매하고 빛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창피한 것이 없어요. 내가 그 부모님 때문에 내 고귀한 인격이 더 빛날 뿐입니다. 누추한 부모를 섬기는 자식들에 대해서 오히려 그 인격을 찬양할 뿐이지 ‘부모가 저러니 자식도 저래’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모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자존감을 세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앞으로 고령화 사회가 되면, 점점 부모님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마음의 생각을 적립하지 않으면 부모님을 섬기는 삶을 통한 축복을 오히려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축복을 약속하는 모든 일은 항상 그 일이 쉽지 않지만, 바른 일이기 때문에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의 기준을 받음에 따라서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부모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부모님을 섬기는 것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어려움 때문에 하지만, 기도하다보면 내가 어려움 때문에 기도하는 제목이 바로 나에게 감사의 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 짐인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힘이 됨을 느끼는 것이지요.

더욱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순환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언젠가 나라가 복잡한 일이 있었을 때 정부에서 국제 관계에 대한 시사 탐구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어떤 기회가 돼서 우연히 그것을 보게 된 것 같아요. 각각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가들이 고견을 듣고 그렇게 하는데 그때 누가 그 인터뷰를 받았느냐하면 프로그램 진행하다가 전에 외무부 장관하던 분이 인터뷰를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 분은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분이었어요.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이름을 다 압니다.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던 젠틀한 사람이었고, 좋은 매너와 탁월하고 출중한 능력과 국익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던-그리고 능력이 아주 탁월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단순한 노인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탁월한 업적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매너와 외교관으로서 최고의 젠틀한 매너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분이 연세 드니까 그냥 노인에 불과하더라고요. 제가 그걸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한 능력을 가졌었고, 아무리 힘을 가지고, 아무리 멋진 외모를 가지고, 아무리 훌륭한 매너를 가져도 결국 인생에 연세가 들게 되면, 우리는 그냥 노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인생은 누구나 순환이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하고 지금 내가 뻐길 수 있는 것 같고, 아무리 자랑스러운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 생각을 하면 우리가 정말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진정한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 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봄이면 새순이 나고, 여름이면 녹원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나뭇잎이 물이 들고, 겨울이면 떨어져서 빈가지가 앞의 시야를 확 터지게 합니다.
산에 가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중에 어떤 산이 아름답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어요. 그 계절마다 다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을에 단풍들면 아름답다고 단풍구경 가지요? 단풍이 뭡니까? 나무가 노화돼서 퇴화 행태로 보면 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제일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죠?
바로 노년에 계신 우리 부모님들이십니다.
우리 기준이 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그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르렀다는 것은 천국가기 직전 아닙니까?
가장 완성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부모세대들-역시 그들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입장에서 생각해서 ‘우리 부모는 이렇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야’ 라고 그것을 부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그 나름대로 그 세대의 그 문화 속에서 부모님이 생각하는 기쁨과 행복과 아름다움과 믿음대로 살 수 있는 모습이 있는 겁니다.
내 기준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입장에서 스스로 독립된 인격체로써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도록 우리는 도와드려야 되는 겁니다.

제가 오늘 은혜를 받은 것이 있는데, 아이들을 볼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아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개개의 독립체이다. 그런데 내가 이 아이에게 내 기준을 가지고 ‘이게 옳아. 너는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게 너에게 있어서 최고의 모습이야’ 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폭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고, 기쁨이 있고, 그 나이 그 수준에서 그 아이가 행복을 누리고 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또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도 섭리하셔서 무조건 잘못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개체로 인정하고 또 ‘나도 하나, 그도 하나’ 라고 생각해서 그를 진정으로 존중해 주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세 들어서 판단력이 흐리다. 아니면 힘이 없으시다. 여러 가지 모든 능력이 전만 못하시다. 그러니까 판단은 내가 해 드려야 하고 내가 결정해드려야 하고,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지만 그것은 나이 드셔서 판단이 흐리신 거고 내가 이렇게 결정해서 따르셔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나 부모님의 생각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편한 대로 하면 다른 사람은 불편해져요. 다른 사람 편한 대로 하면 우리가 따라주면 우리가 불편해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확신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착한 아이가 반드시 훌륭한 아이는 아닙니다. 착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창의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맞는 부모가 올바른 부모가 아니라, 정말 우리는 부모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맞춰드리는 것이 우리들에게 기쁨일 수 있단 말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오늘은 주로 어버이 날이니까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된다.’ 라는 말씀을 드려야 되는데, 다른 말씀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좋은 부모도 되셔야 된다.>라는 말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훌륭해도 부모가 좋은 부모님으로써 훌륭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건 자녀가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어요.
자녀가 훌륭한 자녀가 되게 섬기려면 부모님도 자녀의 입장을 잘 생각해서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6장 4절>을 보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보면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배려하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 스스로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면, 마음의 섭섭함이나 노여움이 사라집니다. 자녀들은 정말 부모님을 섭섭하게 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아닌데, 연세가 들다보면 괜히 노여움과 섭섭함이 생기는데 그것은 마음의 자존심의 상해나 혹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데도 그런 마음이 들어서 섭섭하고 자존심의 상해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부모님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면 내가 자녀들에게 무시당할 만큼 약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고 자존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 때 오히려 상대에게 너그럽고 관대하고 이해의 심정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봅니다.

항상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과 기쁨은 상대를 이해할 수 있음에서 오는 것을 봅니다. 자녀는 부모의 입장에서 정성껏 부모를 생각하며 섬겨야 되지만, 또 자녀도 내 자녀가 정말 어려운 가운데 나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주셔야 합니다.
항상 이해의 심정을 가진다는 것은 부모님은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항상 상대를 생각할 때 그가 얼마나 수고하고 애쓸까 생각하면 우리 삶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아내와 남편의 예를 들까요? 아내가 집에서 살림하고 애들 잘 키우고 남편이 회사에 나간다고 합시다. 한 달 동안 정말 힘들여서 일하면 요새는 월급이 다 아내 통장으로 들어가지요? 안 그러세요? 안 그런 남자들은 회개하시고요.
그런데 남편이 생각하기에 한심한 거예요. 내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말이야, 나는 집에서 아칭도 거의 안 먹고 나오고, 점심도 밖에서 먹고, 저녁도 늦어서 거의 밖에서 먹고 나는 옷도 잘 안사입고, 내가 번 돈 중에서 내가 쓰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는 집에서 잠만 자. 그럼 나는 내가 일해서 내가 유익한 것은 뭘까? 나는 일하는 기계이고 내가 돈 버는 기계인가? 이런 생각이 드실 수 있죠?
내가 무슨 얘기하면 또 마음에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각을 조금만 다르게 하면 됩니다. 돈 버는 것도 어려운데 거기에 돈까지 쓰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돈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돈 버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데 또 돈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까? 이런 생각하면 얼마나 머리 터지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집에서 ‘늘 여보 감사해 내가 돈까지 쓰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어?’ 하고 돈 써주는 아내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아침에 나올 때도 ‘감사해’, 저녁에 들어갈 때에도 ‘감사해’라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적으로 아내는 집에서 아침부터 애들 뒤치다꺼리하고 종일토록 청소하고, 밥하고,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저보다 더 잘했는데 나는 맨 날 집에서 이런 일이나 하고-이런 생각이 들고, 남편에 대해서 ‘아침에 떠나면 그만이고 말이야, 나가서 실컷 돌아다니고, 맛있는 것 다 먹고, 다니고 싶은 것 다 다니고, 할 것 다 하고, 그리고 저녁에 들어와서 잠만 자고 애들 다 크고 나면 나만 ......’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여자들이 조잔한 게 아닙니다. 여자들이 조잔한 일을 하니까 조잔해 보이는 겁니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 일을 해 보십시오. 안 그렇게 되겠나? 콩나물사고, 두부사고, 그릇 닦고, 집안 청소하고 그러면 남자도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들이 생각하기에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자라서 나는 이런 일하고, 자기는 밖에서 실컷 돌아다닌다는 생각을 하면 그 남편이 얼마나 밉겠어요.
‘자기는 잠만 자고 나가면 책임 다하나?’ 이런 생각하면 참 이건 어렵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입장을 바꿔서 아내가 ‘그렇지, 요새 세상이 얼마나 힘든 세상이야, 난 집에서 내 맘대로 청소하고 일하고 내가 내 애들 키워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남한테 싫은 소리 해야지-싫은 소리 하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려면 몇 번이나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도 눈치 보면서 말하는 겁니다.-그리고 또 싫은 소리 들어야지, 하기 싫은 일 해야지, 만나기 싫은 사람 만나야지, 가기 싫은 곳 가야지, 얼마나 마음에 스트레스 쌓이겠어요. 그나마 그렇게 수고해도 되는 일은 거의 드물고, 안 되는 일이 더 많고, 얼마나 요즘같이 불안하고 여러 가지 앞일이 투명하지 않은-보이지 않는 시대 속에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하면 남편이 또 불쌍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나갈 때도 “수고합니다. 정말 제가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하고, 또 저녁에 들어올 때 감사한 마음 가지면 또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상대에 대한 이해의 접근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나이 드시면 아프지 않은데도 아파지고, 또 마음도 약해지고, 섭섭한 마음도 들고, 모든 것이 서글퍼지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나이 들면 할 수 없어요. 몸도 다 아파지는 겁니다. 안 아픈데도 아플 수밖에 없고, 마음도 약해지고, 모든 것이 섭섭해지고,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도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느껴지고,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부모님이 얼마나 어려우시겠나? 라고 생각하면 자식의 마음에 또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해드릴 수가 있는 것이고, 부모님도 생각하기에 자식들이 세상 살기도 어려운데 부모까지 섬기기가 얼마나 힘들까? 하고 작은 하나의 섬김에도 정말 기쁨과 감사를 느끼면, 부모님들도 행복해질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로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정말 부모와 자식이 다르더라고요. 제가 지난 주간에 교역자들과 일본에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데 가다가 슈퍼를 들어갔는데 안내하는 분이 얘기하면서 과자가 있는데 그걸 하나 사래요. 가서 애들 주면 굉장히 좋아한데요. 그게 뭐냐 하면 만화에 짱구가 나오는데, 짱구가 먹는 과자가 그 과자래요. 한국에는 그것이 없는데 굉장히 좋아할 거랍니다. 그래서 샀거든요. 한 이천 원쯤 되더라고요. 그걸 4개를 샀습니다. 그래서 두 개씩 갖다 준다고.

제가 와서 애들이 시험기간 이어서 하나는 독서실가고 하나는 집에서 공부하는데, 제게 중학교 1학년 3학년짜리가 있는데 1학년 아이에게 그걸 줬습니다. 그리고 언니한테도 주라고 그걸 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애들 말로 애들이 뒤집어지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좋아하리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문자를 보내는데 “언니, 언니, 아빠가 쵸코비 사왔어.”-그 과자 이름이 ‘쵸고비’인데 이게 뭐냐 하면 짱구 만화가 있는데 짱구가 만화에서 그 과자를 먹는대요. 모르시죠? 모르실겁니다. 이거 모르는 부모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는 부모는 좀 깨이신 것이고. 애들이 그 만화를 보고 쵸코비 그 과자를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안파나 봐요.

그러면서 독서실에 전화했는데,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아이가 “그래, 정말이니?”하고 문자를 보내왔어요.
저는 제가 뭘 사다주고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처음 봤어요.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라 애들한테도 열심히 시험 중인데도 문자를 보내더라고요. 그랬더니 애들이 얘기 하나 봐요. ‘야, 나 그거 하나 줘.’ 그랬나봅니다. 그랬더니 ‘두 개밖에 없는데 하나주면 어떻게 하냐?’ 그런 얘기인지 다행히 제가 옆에 있다가 그 문자를 봤어요. ‘그거 학교 가져가서 먹자.’ 그랬더니 무슨 문자가 또 왔냐면 애들은 금방 문자를 보내더군요. ‘학교에 가져가면 다 뺏기고 우리는 못 먹어.’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그 다음에 온 문자가 걸작이더라고요. 뭐라고 문자가 왔냐면 ‘내가 돈 좀 줄 테니까 목사님한테 전해드리고 다음에 나도 사다 달라고 그래.’

제가 보니까 그 친구애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아이인가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돈을 줄 테니까 그걸 목사님께 전해줘서-거기에 ‘목사님’이라고 쓰여 있는 것 보니까. ‘목사님한테 전해줘서 다음에 사다달라고 그래.’ 이렇게 쓰여 있더라고요.
제가 다음에 꼭 사다주려고 그래요. 그러면 그 애는 평생 충성할 것 같아요.
‘목사님한테 돈 좀 전해줘서 목사님이 다음에 꼭 사오게 하라.’ 그러니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겁니까? 목사님에게 돈 줘서 시킬 거니까.
그러니까 애들하고 어른하고 문화가 다른 겁니다.
각 각 세대마다 문화가 다른 겁니다. 제가 예를 들어 오만 원짜리 옷을 하나 사다줬다고 합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좋아하죠?
‘2천원, 5만원, 25배.’ 우리는 당연히 옷을 좋아합니다.
애들을 그게 아닙니다. 아무리 비싼 옷을 갖다 줘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애들은 그 짱구 만화에 나오는 짱구가 먹는 과자 쵸코비가 인기고 중학교 1학년이나 3학년이나 애들한테 폼 잡을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다른 문화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가지고 부모님께 강요해서 “부모님, 이게 좋겠습니다. 저게 좋겠습니다. 부모님의 모습은 이게 우아합니다. 저게 우아합니다.” 하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부모님의 세대와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정서 속에서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이뤄드려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은 ‘내 아들과 내 딸은 나하고 다른 인간이다.’ 라고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다른 사람이 이렇게 나를 잘 섬겨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 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기뻐하고 마음상하지 않고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인사한 번 합시다.
“어머님 아버님 잘 섬기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은 또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내 생각 하지 말고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부모님들은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또 그렇게 마음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너희들은 너희의 삶이 있으니까 내 생각하지 말고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하고 이렇게 젊은 자녀들의 마음을 풀어주시면 젊은 자녀들을 또 그 가운데서 기쁨으로 부모를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좋은 자녀가 있어야 좋은 부모가 되지 않습니까? 또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은 좋은 부모가 있어야 좋은 자녀가 되지 않습니까?
결국 서로가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관계에서 결국 훌륭한 부모와 훌륭한 자식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행복은 이해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불행해 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마음에 들어야 해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움직여줘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마음에 들어야 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 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보면 ‘아, 자식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면 부모도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식은 부모를 이해하고 마음의 자비와 섬김의 심정으로 대하고, 부모도 자녀를 이해하고 섬김의 심정으로 대할 때 행복한 은혜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부모님들 정말 초두에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정말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셨고, 겪어서는 안 될 전쟁의 비극을 체험하시며 정말 온갖 험한 일을 다 보시고, 그 이외의 모든 어려운 시대들을 살아오셨습니다.
그 부모의 수고와 애씀이 있었기에 저희들이 누리는 이만한 축복과 행복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 더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기쁘심과 축복 속에서 귀한 은혜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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