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겔 47:1-12)

  • 잡초 잡초
  • 339
  • 0

첨부 1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저는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꿈은 사람을 제자리에 머물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꿈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게 만듭니다. 꿈은 난관을 돌파하는 힘입니다. 꿈은 우리가 주저앉아 있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오히려 꿈을 연단시키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꿈은 날카로운 송곳과 같습니다. 인생에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꿈은 그 하나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두꺼운 판에 구멍을 내는 것은 꿈의 이 집중력입니다.

인생에 꿈이 소중하듯 교회 또한 꿈이 소중합니다. 교회의 꿈을 우리는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마다 꿈이 다 다르듯 교회마다 비전도 다릅니다. 물론 공통적인 교회의 사명과 본질이 있습니다. 예컨대 교회는 그 자체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위임받은 곳입니다. 교회는 종말의 공동체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지 한 교회의 비전은 아닙니다. 비전은 그 공동체에만 있는 독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시자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을 한 곳으로 몰아가는 힘과 집중력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를 연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곧 비전입니다. 예컨대 사랑의교회 하면 ‘제자훈련’, 온누리교회 하면 ‘찬양 문화사역’입니다. 또다른 교회는 ‘선교’, 또는 ‘지역사회에 대한 섬김’, 또는 ‘개혁’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개 비전은 교회 본질이나 사명들 중에서 하나가 선택이 됩니다.

저희 교회도 오늘로서 창립 1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저는 창립예배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님께서 해주셨던 축사를 기억합니다. 한국에 수만 개의 교회가 있는데 또 하나의 교회를 창립한다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왜 이 교회를 세우셨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이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이 조그만 블록에도 교회가 4개나 있습니다. 모두 개척교회들입니다. 이 정도 규모면 1-2개 정도의 교회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이 지역에 세우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에스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비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지난 1년여 동안의 감사와 우리의 부족함을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비전은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 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상 중에 본 비전

오늘 말씀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가지 차오르고, 무릎까지 오르고, 허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창일한 물이 되어 사해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비전입니다. 그 물이 흘러가자 죽었던 사해바다가 살아납니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심히 번성하는 생물이 살고, 온갖 과일과 약초로 풍성합니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 다시 재건되었을 때의 영광을 보여주는 환상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 말씀을 안락하고 편안한 가운데 받고 있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40장 1절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오 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에스겔은 지금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지 25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14년 째 되는 해입니다. 처음엔 설마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랴 했습니다. 또 무너지고 난 다음에도 곧 회복시켜 주시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벌써 14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이 때쯤이면 아마 이제 예루살렘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다 포기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환상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척량줄과 장대를 손에 쥔 여호와의 사자가 에스겔을 이끌고 가서는 예루살렘에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지성소가 만들어지고 성소가 만들어지고, 그리로 들어가는 문들이 완성됩니다. 문들은 몇 개의 방을 통과해야 할 정도로 매우 깁니다. 안뜰과 바깥뜰이 만들어지고, 그 뜰 주위로 두꺼운 벽이 만들어지는데 그 두께가 무려 3m에 이릅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성전은 그 크기가 사방 약 250m에 달하는 정사각형 모양의 엄청난 크기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완성되자 동쪽문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그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겔43:4-5) 이스라엘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창일한 강물의 환상은 성전이 서고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을 때 그 은혜의 풍성함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에스겔은 이 환상을 보고는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는 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낙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는 보았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주의 성전을 재건할 날이 곧 올 것이다. 보라 이것이 성전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좌절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에스겔과 같은 비전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희망을 일깨웠습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꿈을 주심으로 우리를 충동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그 자리에 잠잠히 머물러 있게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작은 테두리 안에 가두고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살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나이 늙고 무자한 아브라함을 큰 민족의 환상으로 감동시키셨습니다. 양떼를 몰던 평범한 목자 모세를 출애굽과 가나안의 비전으로 흥분시키셨습니다. 사람이나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꿈, 곧 비전입니다.

우리 교회는 비록 작지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향하여 달려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여섯 가지 비전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첫째는 영혼이 잘되는 교회, 둘째는 가정이 행복한 교회, 셋째는 미래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 넷째는 사회의 빛이 되는 교회, 다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 여섯째 민족화해와 북한선교를 꿈꾸는 교회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비전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아마 이 중에 한두 개가 저희 교회 비전이 될 것입니다. 저희는 아직 비전이 명확히 주어졌다기보다는 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비전은 처음부터 명확히 주어지기도 하지만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좌충우돌하며, 또 우리의 역량을 시험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첫째와 둘째 비전 곧 영혼이 잘되는 교회, 가정이 행복한 교회가 되고자 씨름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고, 또 우리 가정이 행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일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386으로 대표되는 30, 40대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분단과 전쟁 세대가 있고, 산업화 세대가 있듯이, 386세대도 한국사회의 뚜렷한 문화를 형성한 한 세대입니다. 이들은 주로 7,80년대를 캠퍼스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보내던 세대입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새 시대를 향한 꿈을 가지고 살았던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변혁의 물결이 급격히 퇴조하면서 그 빈 정신적 공간을 물질과 출세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때 막 등장한 인터넷과 컴퓨터가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정신적 공백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한 번 큰 이상을 품었던 사람에게 물질적인 것은 궁극적인 만족이 되지 못합니다.

386 세대는 기존 전통과 권위에 대해 파괴적입니다. 기성 권위는 억압이며 변혁 댕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보수주의는 고리타분한 것이요 매력 없는 것과 일치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렇게 파괴만 하고 스스로는 그에 맞는 가치관이나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386세대는 불안한 세대라 생각합니다. 땅을 팠는데 정작 자기 발밑을 파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성의 것은 허물어 버렸는데 정작 자신의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어떤 특정 ‘세대’로 불리는 것은 정신의학적으로 건강하지 못합니다. 세대라는 것은 흐름이고 휩쓸려가는 것입니다. 그 흐름 속에 있던 사람이나 이를 거부하던 사람이나 구경하던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큰 흐름에 휘말려 자기라는 정체성을 찾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없는 것이지요.

예레미야를 부르시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동사로 사명을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1:10). 그 중 4개 동사는 파괴입니다.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나머지 두 개는 건설입니다. ‘건설하며’, ‘심으며’입니다. 파괴만 해서는 안 되고 새로 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386세대는 인간에 대한 가치관, 가정에 대한 가치관, 미래 사회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파괴만 하다 중도 포기한 세대와 같다 할 것입니다. 자기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니까 자신들이 비판하던 기성의 것, 보수의 것을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그 이중성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스며 나온 물에서 창일한 물로

우리 교회는 주축이 30,40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아픔들은 한국의 모든 30,40대가 앓고 있는 아픔들입니다. 비전은 아픔과 상처로부터 시작합니다.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다가 해답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 비전이 됩니다.

저는 제가 이번에 낸 책 『믿는 부모』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쓸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녀교육은 제 전공도 아니었습니다. 제 친구중 하나가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자녀교육서가 잘 팔리니까 저에게 강청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제 속에는 이제 책 한 권 낼 때도 되었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 틈틈이 썼는데 정작 그 책은 제 친구의 출판사가 아니라, 이 친구가 속한 다른 유력한 출판사를 통해서 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쓰면서 한국사회의 문제, 특히나 386세대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학원가의 붐과 선행학습의 붐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 386 운동권이었고, 우리 젊은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올인 하는 세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 지,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일단 ‘명문대 앞으로’가 우리 교육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문제에 있어서도 세 번째 비전인 미래세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올바른 자녀교육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모델 교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가치관 창출소’, ‘문화의 산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은 성전 문지방에서 나온 물처럼 미미해서 도무지 언제 그럴 수 있을까? 마치 꿈처럼 여겨집니다. 비전이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비전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시시해 보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을 보십시오. 47장 1,2절입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처음에는 스미어 나오는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절에서 5절입니다.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참 대단한 비전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은 처음에는 미미미한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천 척, 곧 500m 정도를 가니 그 물이 발목까지 찼습니다. 또 1천 척을 가니 이번엔 무릎까지 찼습니다. 또 1천 척을 가니 허리까지 차고 마지막 1천 척을 가니 이번에는 능히 헤엄쳐서도 건널 수 없는 창일한 강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정말 눈에 겨우 보일 정도로 그 시작은 작고 미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란 연후에는 새들이 깃들일 정도의 큰 나무가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이런 비전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더디지만 조금씩 좋아지는 비전입니다. 지금은 스며 나온 물처럼 너무 미미하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대한 황하나 양자강도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합니다. 이 물이 모여 개울을 이루고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마침내 도도한 큰 물이 되어 바다에 이릅니다.

저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 그림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그림이 비록 지금은 희미하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사는 대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게으르면 게으른 변명을 하고, 자기가 먹고사는 방식대로 생각을 하고 합리화합니다. 세상에 끌려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비전의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미래를 바꾸어 갑니다. 미래는 이들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현재보다는 미래가 잘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강수의 근원은 십자가

처음 교회를 시작하면서 비교적 성공적인 출발을 했습니다. 지하에서 시작하지 않고 빛이 환하게 드는 지상에서 시작했습니다. 몇 명의 개척 멤버를 가지고 시작을 했습니다. 창립예배도 많은 분들의 축복 가운데 참 멋지게 했습니다. 스며나온 물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발목을 적실 정도로 첨벙첨벙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여러 번 꿈을 꾸었습니다. 한 번은 거대한 불기둥이 한강물에 뚝 떨어져 강물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곧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생각했는데 그 물은 저의 발목, 정확히는 신발 정도 적시는 꿈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눈이 덮쳐 무릎까지 차는 꿈이었습니다. 눈이 엄청 많이 내렸는데 정확힌 무릎까지 찼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 이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속히 허리까지 차도록 기도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허리까지 차는 과정은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차오르던 물이 빠져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예배 인원은 거의 고정적이었고, 각 가정이 여러 문제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발목에서 무릎까지는 왔지만 무릎에서 허리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은 길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1천 척이라는 거리가 누구에게는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몇 개월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릎이 해어질 정도로 기도와 연단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이 바로 무릎에서 허리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준비된 그릇이 되어서야 주님께서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할 곳은 바로 성전입니다. 물은 결국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야 결국은 이 물이 창일한 물을 만들어냅니다. 부흥이나 비전의 모든 근원은 결국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사람이나 사업을 의지하는 목회나 인생은 곧 고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성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땅에 있는 성전을 허무시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이 은혜에 거할 때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샘물이 솟아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7:38)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는 포도나무가 열매 맺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결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저는 우리 공동체의 현재 많이 매말라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부족함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절실히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며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셨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더라도 한때의 추억으로나 단지 교리적인 고백으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 골고다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적시지 않고는 결코 하루를 시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고귀한 피를 흘리신 주님은 바로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해서도 동일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는 이제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기적인 나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어찌 다시 자기만을 위해 사는 어리석을 길을 가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생각과 자기 계산이 너무 빠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가는 그런 존재로 되어갑니다.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그러지 못할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기는 무력하며 그 열매는 이기적이고 죄악된 열매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붙들린 사람은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가장 귀한 아들을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셨는데 어찌 그 보다 작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모든 근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야 우리의 생수의 근원이 마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살 것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한 인생은 자기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살립니다. 오늘 이 강물이  흘러들어가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8절에 보면 이 물이 바다를 향하여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바다가 어떤 바다냐 하면 사해입니다. 사해는 해저 약 400m에 위치한 바다로 이곳에 들어온 물은 나갈 곳이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증발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엄청 짜졌습니다. 보통 바닷물의 염분이 3.5%인데 사해는 약 8-9배 정도 높은 약 30%의 농도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강수가 흘러가자 죽을 死자 사해가 살아납니다.

사해가 살아나니까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고기도 심히 많게 됩니다. 마치 양어장처럼 고기 반, 물 반이 됩니다. 물고기의 종류도 많아서 10절의 큰 바다, 이 바다는 지중해를 가리킵니다. 지중해의 고기만큼 많고 그 종류가 풍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기가 많으니까 어부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고깃배가 많아지고, 그물을 쳤는데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까지 빽빽이 그물을 칩니다. 사해 바다 주변에는 시들지 않고, 사시사철, 다달이 온갖 열매 맺는 과일로 풍성합니다. 과일 잎사귀는 약초가 됩니다.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나무들이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님들이 바로 이런 존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며,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 교회 네 번째 비전인 “사회의 빛이 되는 교회”입니다.

저는 이 물이 흘러 저 북한까지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은 사해바다처럼 죽은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수가 흘러들어가야 살아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에스겔의 환상처럼 죽은 북한을 살리는 강수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작지만 통 큰 기도를 합니다. 민족의 죄를 회개하며 북한의 개혁 개방을 놓고 기도합니다. 저번에는 6자 회담 성사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북미수교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북한을 돕고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북한 학교 돕기 운동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북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비전보다 학교를 세우는 비전이 더 좋고 또 현실적입니다. 지금은 저들이 자기들이 관리할 수 있는 부분만 개방하지 다른 곳은 개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며 나가면 모든 문호가 열릴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 한 교회 한교회가 북한 전 지역의 약 1만 개에 가까운 학교가 자매 결연을 맺는 환상을 봅니다. 이 비전이 우리 교회의 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지역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은 어디를 말합니까? 예루살렘은 가장 가까운 곳을 말합니다. 네 이웃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북한은 우리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입니다. ‘온 유대’는 자기 민족을 말하는데 북한은 또한 우리 민족에 해당합니다. ‘사마리아’ 는 당시 유대인들과 한 뿌리에서 났지만 원수가 된 세력들입니다. 바로 북한이 그렇습니다. 마지막 ‘땅끝까지’라고 말씀하였는데 이 땅끝이 바로 북한입니다. 오늘날 전세계를 다 돌아다닐 수 있는데 유일하게 들어가지도 나오기도 힘든 곳이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 교회 마지막 비전은 민족화해와 북한선교입니다. 죽은 사해바다를 살리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우리만 편하고 우리만 잘살자고 하려 한다면 구지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기존 좋은 교회도 많습니다. 우리가 비전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적이며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교회가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이 비전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지난 1년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스며 나온 물이 강물을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 말라버린 시내들도 많습니다. 달려갈 비전을 생각하지 않고, 생수의 근원인 십자가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부르심에 충성되게 응답함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