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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한 가정(1) (엡 5: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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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가장 기본적 단위입니다. 여기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관계에 따라 가정은 우리 삶의 오아시스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경제적인 안정도 소중합니다. 그 점에서 사회복지는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사여야 합니다. 다만 오늘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관계가 틀어지면 가정은 심각한 불행을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계보단 물질적 풍요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 재벌인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물의가 일어나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태로 고대는 부총장을 비롯해 보직 교수들 전원이 사퇴서를 제출했고, 총장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청와대에서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기업가 정신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해야 한다’라고요. 이런 사회분위기 때문에 각 가정마다 돈을 좀 더 많이 벌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정작 중요한 가족관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하지요. 오늘 본문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족관계에 주목하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선 가족관계의 대전제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가 성숙해져서 언덕의 각 가정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윽하길 축원합니다.
 
1. 근본적인 대전제(21)

사도 바울은 먼저 가족관계의 근본적인 대전제를 밝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바울 역시 자신의 시대를 향해 말했기 때문에 가부장적 권위주의라는 시대적 제약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하는 대전제를 곰곰이 살펴보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울이 결코 가부장적 권위주의 윤리를 지지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대전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주장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뜻을 살펴 존중해야 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적으로 약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 하거나 그의 인격을 유린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성별, 나이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평등합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던 지간에 인격의 존엄성과 무게에 있어서 동등합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라는 표현에는 평등한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가르침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민족, 성별, 학력, 직업의 차이로 말미암아 쌓아올려졌던 담들이 허물어지고 평화가 꽃피는 것을 목도하고 감격했습니다. 그 감격이 담긴 서신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당대의 문화적 장벽을 뛰어 넘어 여성을 지극히 존중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당황한 여인은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그 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진지한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요 4:5-26). 예수님에게서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자세를 전혀 엿볼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아주 소중히 여겼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는 서열경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자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막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치 어린 아이를 자신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한 차원에서 보시는가 보구나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발언을 하신 셈입니다. 그런 신학적 오해를 불사하면서 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어린 아이 하나의 인격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 가를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누르고 최고의 위치에 오르겠다는 욕망에 노예가 돼버린 제자들이 꼭 마음에 새겨야 할 자세였습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 가부장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옹호해온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섬기는 정신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십자군 전쟁을 그린 『킹돔 오브 헤븐』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평화를 원했던 주인공 발리안은 예루살렘 성 탈환을 위해 막강한 군대를 끌고 온 이슬람 왕 살라딘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예루살렘 성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소?’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아무 것도 아니요(nothing)'라고 싱겁게 답합니다. 참 허무한 답입니다. 몇 걸음 걸어가다 다시 돌아서드니 한 마디 더 던집니다. ’모든 것이요(everything)'. 이 두 마디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 성을 지키려 했던 십자군에게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정치적 차원에선 너무나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권력의 장악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권력을 누리는 데 집착하면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제도를 비롯해 세상의 잘못된 권력구조를 용인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잔재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호주제폐지가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닙니다만 호주제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려되는 바가 전혀 없는 바는 아니나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지지해야 할 법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최대 연합기구인 한기총은 뒤늦게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아직도 구태를 벗지 못한 모습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시정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행여 아내나 어린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이런 대전제에 기초해서 구체적인 관계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남편과 아내의 관계(22-31)

먼저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해야 합니다. 그 근거로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사이의 유사성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는 몸 된 교회의 구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들이 듣기에 이보다 더 달콤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한 마디로 아내의 모든 불평을 잠재우고 그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듭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지요.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의 대전제가 남편과 아내가 피차 순종하는 평등한 관계라는 점을 말입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아내에게 준 말씀이지 남편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명심해야 할 말씀은 남편이 그리스도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전제로 해서 바울은 아내에게 남편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폭군 같은 남편이 아내를 자기 수하에 복종시키기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려는 것은 아주 왜곡된 것입니다.

바울이 아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편의 리더십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을 하다보면 다양한 사안에 대하여 항상 같은 의견을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전통과 가치관이 다른 가정에서 수십 년을 살아 왔을 뿐 아니라 당사자 자신들 간에도 성격과 취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합일점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엔 둘 중에 하나가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은 큰 불화에 시달리거나 표류하는 배처럼 우왕좌왕하다가 중요한 결정의 시기를 놓치고 낭패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은 아내에게 남편의 리더십을 인정할 것을 요청합니다. 즉 결단이 불가피 한 상황에서 이견이 생길 경우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바울이 그 당시의 가부장적 전통을 일부 수용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바울이 당시의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거나 거기에 굴복했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입니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 가부장 제도를 옹호할 수 없었지만 교회의 존립을 위해 일정 정도 양보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는 매우 미약한 존재이었기 때문에 사회통념과 질서를 깨는 집단이란 말을 듣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고려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인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대원칙을 갖고 계셨지만 자기 백성의 주변 환경과 그들의 성장단계를 고려해서 일부 기준을 양보하시곤 했습니다. 예컨대 일부다처제를 용인해주셨습니다.

바울은 남편의 리더십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이 남편이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적용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되심은 영원한 진리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적용하느냐는 것은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남편에게 리더십을 허용한 것을 지나치게 절대적으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여자의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고 일반사회에도 모든 지위에 있어서 남녀평등의 가치관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가정의 리더십에 대하여 융통성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편과 아내는 늘 대화와 협력을 통해 가사를 같이 의논하고 운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반드시 해야 하는 데 견해차가 생기면 원칙적으로 남편이 리더십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더 좋은 리더십을 갖고 있는 경우 억지로 사사건건 남편이 리더십을 행사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때론 드보라 같은 용감한 믿음의 여자를 리더로 세워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리더십을 행사하길 원한다면 아내가 순종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에 불화와 갈등을 자초하는 것 보단 실수를 통해 남편이 겸손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줌 같이 남편도 아내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티와 주름처럼 볼품없는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신 앞에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가 최고로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최악의 경우 아내가 악처라고 칩시다. 그 경우 그리스도가 자주 배신 때리는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교회를 오래 참음으로 설득하고 눈물로 권면하고 그래도 순종하지 않자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남편도 그러해야합니다. 악처 길들인다는 미명 하에 아내를 억압하거나 폭언을 하거나 폭행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남편들에겐 여성을 평가하는 가치관에 있어서 혁명적인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소위 얼짱/몸짱 문화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프랑스의 한 미녀 앵커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국영방송 TF1에서 운영하는 뉴스 전문 채널 󰡐LCI󰡑(La Chaine Info)의 뉴스를 오전 6시부터 진행하는 멜리사 퇴리오(26, Melisa Theuriau)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미스 프랑스 출신으로 인형 같은 미모에다 어깨가 드러나는 노출 의상을 자주 입고 나와 네티즌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는 기사입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프랑스 남성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남자 청년들에게 배우자 조건으로 무엇이 중요하냐고 물으면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상당한 경우 거짓말입니다. 실제로는 외모를 중요시하죠. 예쁜 여자를 아내로 거느리고 산다는 자부심을 갖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생각을 확 뒤집어야 합니다. 물론 외모가 예쁜 것이 무슨 죄란 말이 아닙니다. 외모 예쁜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내면의 신앙적 아름다움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외모를 가꾸기 위하여 성형수술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다이어트와 운동 등에 거의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가꾸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여기엔 남자들의 책임도 매우 큽니다. 얼굴과 몸매에만 정신을 파는 동물적 남자들이 공범입니다. 남자들의 눈과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이 아름답고 경건한 여성을 정말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야 합니다.

아내에게도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가장 훌륭한 남편은 돈 잘 벌어다주는 남편이 아닙니다. 물론 남편이 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돈은 내면적 아름다움이나 영원한 아름다움을 결코 창조하지 못합니다. 물론 돈도 잘 벌어다 주고 아내의 내면적 아름다움도 챙겨줄 줄 아는 남편이라면 금상첨화겠죠.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혹 돈은 잘 못 벌더라도 아내의 경건한 아름다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남편을 정말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창조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30절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결혼하는 순간 남편과 아내는 연합하여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사이에 가부장적 질서가 끼어 들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이미 한 몸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위아래가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의 아내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옆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란 것을 늘 기억하는 것은 남편의 아내 사랑에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 자기 육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돌 볼 땐 마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인 교회를 돌보듯이 돌보기 마련입니다. 아내가 건강하고 아름다우면 남편도 덩달아 건강하고 멋있어 집니다.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이익이 배로 남는 일입니다. 아낌없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기 바랍니다.

맺음말

부부관계는 가정의 행복에 결정적입니다. 부부관계가 건강할 때 그 가정에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내가 납니다. 그 관계가 병들고 깨지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건강한 관계의 대전제는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는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런 정신을 기초로 해서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관계를 회복해나감으로 각 가정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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