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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라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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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고후 12 : 1 - 10
제 목 :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지는 소원이 있다면, 아마도 평안일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업이나, 또 여러 가지 삶의 환경들이 어려운 문제를 당하지 아니하고, 그저 근심하는 일이 없이,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생에 소원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소원 가지지 않는 사람 어딨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인생의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소원대로 그렇게 평안한 삶을 살아가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해 보셨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순탄한 길만을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나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되고, 또 여러 가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또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속에서 기쁨과 성공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또 때로는 슬픔과 좌절을 맛 볼 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굴곡의 체험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공통점을 우리가 인정하질 아니하고, 나만이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많은 성공담들이 있지요?  “누구는 사업이 굉장히 성공  했다더라.”  “누구는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더라.”  “누구 집 아이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더라.”  뭐 이런 성공담들을,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참 좋겠다. 어쩌면 저 사람은, 저렇게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저 집 아이들은 저렇게 부모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 하는 것일까?”이런 부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이런 부러운 마음을 가지신 적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이는 인간이라면, 뭐 누구나가 다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이 들지요?  한편 부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저 사람들은, 또는 저 가정은, 우리랑은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야.  그래서 우리랑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들보다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 시켜버립니다.  그리고는 마치 그들은, 자신과는 다른 별천지에 사는  사람처럼 여기고, 그들과는 모두지 같을 수 없다고 결론 지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자꾸만 힘들어지고, 남들보다 못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 아니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마음, 이런 마음 자세가, 안 그래도 어렵고 힘든 인생을, 더 어렵고 힘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인생 아닙니까?  옆 사람을 한번 쳐다보세요. 옆 사람이 나보다 잘 나 보입니까?  옆 사람이 나보다 훌륭해 보입니까?  실상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겁니다.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 도토리 키 재기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또 지금도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세상은 요지경입니까? 
“잘 난 사람, 잘 난 대로 살고, 못 난 사람, 못 난 대로 사는 겁니까?” 
지금 나보다 앞선 사람들, 지금 나보다 잘 난 사람들, 지금 나보다 부요한 사람들, 그들은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랑 다르게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그들을 바라볼 때에,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성공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다는 겁니다.  거저 수월하게 그들이 인생의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도 이렇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공을 거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우리와 똑같은, 아니 우리보다 더 못한 인생의 환경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지나온 인생의 여정들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도 수없이 많은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살아왔던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정말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실패의 아픔을 겪으며 살아왔던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러한 인생의 실패 앞에 좌절하지 않았고,  그 실패를 오히려 밑거름 삼아, 다시금 용기를 내어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그 실패의 환경을 이겨냈다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성공한 인생의  모습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인생 과정은 바라보지 못하고, 그 결과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러움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유명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어떻게 지어지게 되었습니까? 
그가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을 때, 지은 곡입니다.  음악가에게 있어 청력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청력을 잃었다는 것은, 그의 음악가 로서의 인생이 이제 끝이 났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엄청난 빚을 진 상태에서 채권자들로부터 심각한 압박을 받는 차였습니다.  이러한 인생, 누구라도 좌절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꿋꿋이 일어서서,  다시금 도전한 결과, 그 유명한 운명 교향곡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 고전으로 읽히고 있는 천로역정과 쌍두마차를 이룬다고 하는 실낙원을 쓴 밀턴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실낙원을 썼을 때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었을 때라고 합니다.  심각한 인생의 위기지요? 
그러나 밀턴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문학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금 펜을 들어 작품을 쓴 가운데, 그 유명한 실낙원을 쓰게 되었다는 겁니다.

뭐 이 두 사람만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예는 수도 없이 많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의 불신자들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면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줄 아는데, 또 우리와 같은 신앙인 중에서도 마찬가지지요? 
나보다 훨씬 못한 인생의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힘으로 새롭게 일어서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은혜와 축복의 삶을 만들어 나갈 줄 아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성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성도라고 해서, 내 인생의 성공을 하나님이 거저 이루어 주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요, 망상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예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가 신앙으로 개척해 나갈 때에, 비로소 성공이라는 결과가, 내 눈 앞에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다시 말해, 똑같은 인생의 조건 속에서, 저마다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살아가지만, 그 어려움을 신앙으로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사람들도, 희망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만들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소유하고, 천국의 소망을 가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천국의 소망이 우리의 삶에 용기가 되고, 이 소망이 우리의 인생에 성공적인 삶으로 연결되고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무능력하고, 너무나도 힘없고 초라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면, 차라리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이 났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해서, 인생의 실패가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실패를, 신앙의 힘을 의지하여 성공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진정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실패가 성공이 되어지고, 연약한 것이 강하게 되어지고, 잃어버렸던 것이 회복이 되어지는, 그러한 삶의 모습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 1 : 26 - 27절에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 성도들을 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력한 모습이, 무능력한 모습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는 모습에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기대가,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오늘 우리들은 얼마만큼 이루어 드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인생은 능력있는 삶의 모습입니까?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잃었던 것을 신앙으로  회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분명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능력 있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아직까지도 힘없고 연약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로서,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말 남부럽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얻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육신적인 자랑은 모두 던져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던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그 바울의 삶이 어떠했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엔, 그는 분명 인생의 성공자요, 신앙의 성공자입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살펴볼 때엔, 바울의 신앙적인 삶의 과정을 살펴보게 될 때엔, 그 또한 결코 성공자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순간순간, 실패자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이 순간순간 경험했던 그 실패는, 바울을 더 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졌기에, 그의 결국은 성공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게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의 삶,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바울은 주님의  열 두 제자들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습니까?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심지어는  스데반과 같은 신실한 신앙인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 아픈 과거가 있었기에, 사도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역에 비협조적이었고, 더 나아가 오히려 훼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에게 베드로보다 더 위대한 신앙인으로 비춰지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아니하고, 말씀과 기도에 더욱 더 힘쓰는 신앙으로 이겨나가며, 그 어떤 사도들보다, 더 많은 능력으로 더 많은 사역들을, 감당해 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 나타난,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은, 그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어려운 형편이, 그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들고,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귀한 요인이 되어졌기에, 그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게 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생에 당한 고난을, 그저 단순한 고난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이, 자신을 더욱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이 연단 후에는, 자신이 세상에 강철 검과 같은 강한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바울이기 때문에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성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한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실제적인 삶과는 괴리가 있는,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신앙의 업적을 담고 기리는 전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인생에는, 오늘 본문의 바울과 같이, 인생의 고난 가운데서도, 그것이 자신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오히려 기뻐할 줄 알며, 그 고난을 담대히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인생에는, 지금도 바울에게 나타난 그 능력의 역사가, 그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얻었느냐?  이것이 우리의 기쁨의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를 얻었을 때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뻐하며 지내는 날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에 좀처럼 기쁨이 나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기쁨은, 내가 무엇인가를 얻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야기입니다만, 실제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비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잃었을 때, 손해 보았을 때,  실패했을 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약할 그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약한 그 때에, 비로소 자신이 겸손해 지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을 때 성도들은 겸손하게 되어지는데, 이 겸손이 성도들의 인생에 능력으로 작용하게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실패 후에, 더욱 더 강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자기 손에 남들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쥐어져 있다면, 그것 가지고 목에 힘을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존심은, 자기의 것을 잃었을 때도, 결코 사그라드는 일이 없습니다.  왕년에를 외치며, 계속해서  그들은 교만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평소에는 뭐 별로 다를 것이 없지요. 우리 성도들도, 평소에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것을 자랑하며, 때로는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실패했을 때, 자신의 것을 잃었을 때에는, 그대로 계속해서 교만하지 않고, 이제는 낮아진 가운데, 겸손한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식적이었고, 소원했던 사람들도, 어려운 형편을  겪게 되면, 다시금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그 마음이 전에 와 같지 않고, 낮아진 가운데, 진실 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체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그 고난의 고통  가운데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실패의 현장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무병장수”란 말이 있지요?  그러나 이는 순전히 인간의 바램일 뿐입니다. 
무병한 사람은요, 결코 장수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건강에 자신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빨리 죽습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 저는 여럿 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너무 지나치게 자신하다 보니까, 건강을 잘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병이 들면, 갑자기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요, 현실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일병장수” 다.
무슨 뜻입니까?  몸에 한 가지 병을 지닌 사람들이,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이해가 잘 안되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사람들이 명절이 되면 시골 고향집에 내려가잖아요.  고향에서 만나는 노인 중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분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지요.  “아이고, 저 할아버지 내년에는 볼 수 있겠나”
그런데 내년에 고향에 내려가면 어떻습니까?  그 할아버지는 또 그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또 다음 명절에 내려와 보면, 염려했던 그 할아버지는 그대로 살아 계시는데, 멀쩡했던 이웃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주위의 몇 분이 더 돌아가셔도, 그 할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일병장수”란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말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골골팔십”이라.  “아이고, 죽겠네. 죽겠네.” 하는데 안 죽어요.  몇 살까지 삽니까?  최소한 팔십까지는 산다는 겁니다.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의사가 처방해 주는 대로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을 때, 몸에 병을 지니고 있어도, 병이 없이 자신의 건강을 자신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이 위대한 신앙의 삶을 살아갔던 인물도,  하나님이 때로는 그를 낮추시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바울이 교만할 수 있어 하나님이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육체의 가시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바울보다 결코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교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소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우리는 마치 그것을 우리가 스스로가 얻은  것인 양 착각하며, 그거에 매달려 교만하게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교만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때때로 우리에게도 육체의 가시와 같은, 인생의 고난과 환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인생의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쌓아 놓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아픔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아픔을 통해, 이 상실의 고통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의 삶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임할 수 있느냐?  왜 나에게 이런 환난을 주시느냐?”  “Why me?”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고난을 주시고, 환난을 주셨다면, 내 인생에 있어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뜻입니까?  나를 새롭게 하시기 위한 뜻, 나를 더 강하게 하시기 위한 뜻, 나를 통해 하나님이 결국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는 뜻, 아멘!!!! 
이러한 귀한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할 줄  알 때에, 바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도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하는 그 때에, 우리는 불평하며 원망하며,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들기 보다는, 오히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내게 이런 고난과 환난이 임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겸허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이, 바로 내게 능력이 되어져서, 우리 또한 내 인생에 나타나 있는 모든 육체의 가시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약한 그 때가 곧 강함이라고 한 바울 고백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약한 그 때에, 그가 비로소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를 않지만, 오늘 본문에 “육체의 가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육체의 가시를, 바울이 앓고 있던 간질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간질병은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갑자기 넘어져 입에 거품을 물며 몸을 심하게 떠는 고약한 질병입니다.  바울이 사역함에 있어, 이는 분명 걸림이 되는  요소였습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자칫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는, 그러한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보며 염려했을 겁니다.  “어떻게 저런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할까?”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울이 몰랐겠습니까?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한 것 아니겠습니까? 

8절 말씀에 보세요.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하였더니”  세 번씩이나, 이 한 가지 기도의 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소원대로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라는 말씀만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졌습니까?  안 되어졌습니까?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바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까? 
단순히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바울의 기도는 응답이 되질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한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복으로 인한 중단 없는 사역과, 보다 더 능력있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어졌습니까?  바울의 사역이 중단이 되어졌습니까?  결코 자신의 사역이 중단된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 어떤 사도들도 행하지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그는 나타내며, 어느 때보다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할 때, 주저 없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보다 더 강한 바울이 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무능력한 모습, 자신의 부족한 모습, 자신의 연약한 모습, 자신의  실패한 모습,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어놓고 기도하되, 단순히  자신의 질병의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자신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사역에 걸림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결국에는 위대한 바울로, 능력있는 사도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기도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특별 새벽기도회에 많은 성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바울의 육체의 가시와 같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자신의 부족함을 인해, 자신의 실패함을 인해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러한 기도의 제목들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목적은, 세상 사람들의 소원성취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나의 약함이, 결코 하나님의 약함으로 비취지지 않기 위해, 나를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일으켜 주옵소서.  이 실패의 자리에서 나를 일으켜 주시고, 주의 이름으로 승리케 하여 주옵소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이런 소원이, 오늘 우리의 입술에,  우리의 기도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통해서, 나를 강하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비록 내가 기도한 대로 현재에 바로 응답되질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역사하여 주셔서, 나를 영화롭게 해 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귀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오늘 9절의 이 말씀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 고백이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실패의 모습이 나타날지라도, 겸손과 기도로 능력을 회복하여, 다시금 일어서며 승리하는 삶으로, 기쁨이 넘쳐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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