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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체의 비결 (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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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빌 4 : 10 - 13
제 목 : 자족할 줄 아는 신앙

우리의 인생을, 하나의 선으로 표현을 한다면, 어떤 선이 나오겠습니까?
직선이 그려지겠습니까?  아니면, 곡선이 그려지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소원은 늘 그렇지요?  직선과 같이 늘 평탄한,  또 평안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는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때로는 환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또 때로는 원치 않는 일들이 발생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생이 직선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굴곡이 있는, 곡선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도 있지만, 또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될 것인가?  우리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관을 가져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의 인생관은,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기반으로 삼는 성도들은, 삶에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  집착하며, 흔들리는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전 7 : 14절에 보면,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참다운 신앙인의 삶은, 삶에 나타난 일에 대하여, 일희일비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오직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신앙인의 삶을, “일체의 비결”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모든 일에 배부르며” 라고 했어요.  바울이 항상 풍족하고 넉넉해서 배부르다고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배고픔을 당할 때도 배부르며, 궁핍할 때도 부요  하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이지요.  “아니, 어찌 배가 고픈데,  배부르다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생활이 궁핍한데, 넉넉하다 말할 수 있느냐?”  여러분, 보통의 평범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말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지요.  무슨 이유입니까?  자기에게 나타난 환경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그의 심령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기분 가져 보신 적 있습니까? 
지금 당장 배에서는 꼬로록 소리가 납니다.  배가 고프다는 거지요.  날도 춥습니다.  그런데 기분은 좋아요.  웃음이 나옵니다.  미쳤습니까? 
배가 고픈데도 배가 고프게 느껴지지 않고, 추워서 몸은 떨고 있는데도, 마음은 춥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왜입니까?  믿는 데가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내가 배가 고프지만, 지금은 내가 춥게 입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음식을 사먹을 수 있고, 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옷도 사 입을 수 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자기 뒷 호주머니에 있는 지갑에는, 돈이 두둑하다는  겁니다.  지갑을 펼쳐 보니까, 흰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고, 빨간색도 두툼  하게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지갑이, 자신의 뒷 호주머니에 있다는 사실을 알 때에,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싱글벙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안 먹어도 배가 부르지요.  안 입어도 별로 춥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 당장의 배고픔이 서러움이겠습니까?  그에게 있어 추운 것이 고통이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나도,  지금은 옷을 적게 입어 추위에 떨어도, 결코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 당당하다는 것이예요. 왜입니까?  믿는 것이 있기 때문에.  뭘 믿습니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든든한 지갑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 지갑을 열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다.  그래서 현재의 배고픔과 궁핍에도, 자신은 오히려 남들 앞에 당당하게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난 현상을 따라, 일희일비하는 인생을 살아갑니까?  왜 우리는 배가 고프면 짜증이 나고, 궁핍하면 화가 나는 것입니까? 
왜 인생이 자꾸만 슬퍼지고, 위축되는 것입니까?  다른 이유가 없지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부족합니까?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  이라는 것이예요.  오늘 우리에게도 지갑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지갑입니까?  믿음의 지갑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지갑을 열어보아도, 두둑하질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더욱 더 배고프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욱 더  춥게 느껴지고, 더욱 더 초라하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말한 이 일체의 비결, 우리 가운데 누가 이런 신앙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깊이와, 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영적 체험이 있는 성도들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경험이 없어서, 이처럼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것 아닙니다.  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져 있지를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지갑에, 당신의 은혜를 두툼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 두툼한 은혜를 바라보질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계시는지를, 내가 깨닫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체의 비결을, 우리는 삶 가운데, 나타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머니나, 또는  핸드백 속에 있는 그 지갑만 못합니까?  눈에 보이는 지갑 안의 돈에는 믿음이 가고, 만족함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믿음이 가질 않고, 만족함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그 신앙을 참다운 신앙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후 4 : 18절에 말씀하지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 눈에 나타난 현상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인생에 잠간의 만족함밖에는,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 오래가질 않는다는 것이예요.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될,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이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함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이런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어떻습니까?
신앙 안에서 이 영원한 기쁨을 맛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삶에 나타난 부족함과 연약함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담대하게, 세상에 자기 신앙을 나타내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 믿음의 지갑에서,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결코 환경에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런 당당한 신앙인의 모습,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보게 되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자족의 신앙, 곧 일체의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곡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굴곡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이러한 내리막길을 달릴 때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신앙이라는 것이예요.

그러면, 왜 우리가 그런 인생의 내리막길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비천의 자리에 있어도, 결코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를,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벧전 4 : 12 - 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주님이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자리로 이끌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리에까지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에, 현재의 비천의  자리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넉넉하게 이겨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의 원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물은 어떤 그릇에 담든지, 그 모양대로 그 형태를 바꿉니다.  둥근 사발에 담으면 둥글게 되고, 우그렁  쪽박에 담으면, 역시 물도 우그러져 못생긴 모습 그대로 남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에 순응하며, 적응하는 것이, 물의 원리라는 것이지요.

깊은 골짝 샘에 고여 있다가도, 물이 넘쳐흐르게 되면, 또 그 물은 하류를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갑니다.  흘러가다가, 돌이나 바위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저항 없이, 그 돌과 바위를 또 비껴 흘러 내려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미하게 흘러가던 그 물줄기도, 점점 모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어진다는 겁니다. 

그 물이 물레방아를 돌리기도 하고, 그 물이 수력 발전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 그 물이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이, 이과수 폭포와 같이, 장엄하고도 힘찬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결코 저항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없이, 묵묵히 환경에 순응을 합니다.  그러나 일단 힘을 발휘하게 되면, 수천 수만 톤급의 철벽이라 할지라도, 나뭇잎 다루듯이 그냥 흔들어 부숴 버린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물의 적응성이요, 또한 물의 저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물의 적응성과 강력한 힘,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비천에 처해 있을 때에라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우리의 달라진 삶의 모습을 바라보며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있는 삶,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비천에 처할 때에라도, 물과 같이 저항하지 않고, 적응하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인내합니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그 신앙이 비로소 우리의 삶에, 큰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12 :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물의 적응성을, 잘 터득하고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을 때에, 그 구체적인 뜻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배고플 때, 범죄하지 않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은, 먹을 것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초라하고 서글프지요.
지혜나 지식이 적을 때는, 기가 죽기 쉽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건강이 약할 때는,  매사가 비관적이고, 소극적이기 쉽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비굴해지고, 범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비천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떡해요?  기도함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겠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있기에,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가는 말하기를, “가장 부한 자는, 가지고 있는 적은 것으로 족함을 배운 사람이고, 가장 가난한 자는, 그 가지고 있는 많은 것으로도, 역시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쪽복음을 들고 다니며, 굶주림과 육신의 질고와, 감옥살이와 멸시와 천대 등의 그 비천한 자리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족의 비결을 통해, 그 환경에 순응하면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지켜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이, 오늘날도 이처럼 위대하게 우리에게 비취지는 것 아닙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바울과 같은 이런 자족의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형편이 비천에 처해 있을 때에, 바울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으로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일체의 비결, 자족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2.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부유한 가운데서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삶을 살았다는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소유적인  차원이 아니라, 관리적인 차원에서의 풍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하셨다면, 그 인생은 분명 축복받은 풍부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넘치는 축복을, 풍부한  소유를 허락하신 것일까?  그 풍부한 축복을 다 내가 소유하라고 주신 것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 풍성함을, 내가 다 소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아니라,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다만 그 분의 청지기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오늘날 성도들이 다 내 소유라고 생각하니까, 인생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까?  7, 80년대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까?  그 많은 은혜와 축복 속에  성도들은 부요함을 누릴 수 있었고,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넘쳤는데, 사회는 오히려 가난하고 악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사회적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까?  우리가 그 축복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 그 축복을 소유하려고만 했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 축복을 관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사용하지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게 축복을 주신 것은, 그 가운데 내 분깃만 쓰고, 그것도 도에  지나치지 않게 적당하게 쓰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는 겁니다.  너무 소유에 집착을 합니다.  꼭 쥐고 있습니다.  내어놓을 줄을 모릅니다.  다 내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움켜쥐고 있어봐야, 그것 내 것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이 풍부하지만,  그 풍부에 처할 줄 성도,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런 불쌍한 인생, 어리석은 인생, 살아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몇 년 전입니까?  TV에서 본 한 장면이 생각나서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TV 토크쇼 프로그램에, 한 소녀 가장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그런 얼마 후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고아로 살아가는 소녀 가장이었습니다.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소녀는 자신도 남들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사회자는 그 소녀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네가 행복해 질 수 있겠니?”  물었습니다.  소녀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더니, 동생과 함께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평소에 타보고 싶은 바이킹이란 놀이기구도 타고 싶다고, 그러면 행복할 것 같다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했습니다. 

사회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내가 그 비용을 다  낼 테니까, 얼마면 되겠냐고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의외의 제안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12,500원 이라고, 상세한 사용처까지 밝히면서 말을 했습니다.
입장료 얼마, 아이스크림 값 얼마, 바이킹요금 얼마, 그리고 대공원까지의 버스요금 얼마......

사회자는 한 십만원쯤을 예상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적은 금액에,  그러나 그 보다는 그 아이의 너무나도 순진한 그 마음에, 다시금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사회자가  그 소녀가 말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이 지불하여, 그 아이의 작은 소원을 들어 주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더 가지고, 내가 가진 것들 중에 조금만 더 베풀어도, 그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하여, 백가지도 넘는 핑계를 대며 그들을 돕는걸  망설입니다.  많이 가졌지만, 내 가진 것이 풍부하지만 인색하기에, 그는 풍부에 처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풍부의 소유를 자랑할 줄만 알았지, 그 풍부를 관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못한, 어리석은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며 사용할 줄 아는 신앙인 입니다.  자기의 분량에 만족하고, 더 이상 욕심내지 아니하고, 그 남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잘 관리하며 사용할 줄 아는 신앙, 바로 그 신앙이, 풍부에 처하면서도 자족할 줄 아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죤 칼빈은 말하기를, “사탄은 그 오른손엔 부귀와 영화로, 그 왼손엔 빈곤과 연약과 실패 등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도들을 가난과 실패라는 왼손의 무기로 넘어뜨릴 수 없을 때, 부귀와 영화라는 오른손의 비장의 무기로, 잘 믿는 신앙인들을 넘어뜨리려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불행 가운데서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오히려 행복 중에 타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난할 때는 허리 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성실했던 사람이, 부유한 환경에 이르자, 남을 업신여기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다 이와 같은 사탄의 음모에 걸려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풍부에 처해 있을 때에도, 물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천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가 물의 적응력을 배울 수 있다면, 풍부에 처해 있을 때는, 물의 포용력을 배워야 합니다. 
물은 점점 불어나서, 큰 물을 이룰수록 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잔잔하고 도도하게 흐릅니다.  그러나 그 흐르는 가운데 온갖 식물과  생물들을 다 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엄한 바다나, 넓은 호수를  보면, 가슴이 탁 트이고 마음이 넓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풍부에 처해 있을 때에, 그것을 혼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 주변은 분명 우리로 말미암아, 더불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마다, 그 마음에 어떤 감정을 가지겠습니까?  좋은 감정을 가지며, 우리를 존귀하게 여길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삶이, 바로 주님이 명하신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풍부한 가운데서도, 겸손과 관용과, 너그러움을 나타내며 살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바울의 신앙을, 바울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잠 30 : 7 - 9절에 보면, 우리가 정말 마음에 새기며,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야 될 귀한 말씀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신앙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비천에 처할 땐 기도하고,  풍부에 처할 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자족의 비결이요,  일체의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런 일체의 비결, 자족의 비결을, 바울이 그의 삶에 나타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인격적으로 뛰어난 성자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빌 4 : 1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일체의 삶을, 자족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내 속에 역사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인생을 신앙 안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려면, 바울과 같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로 압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인생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은,  능력주시는 자인 예수 그리스도께 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는 인생, 껍데기만 신앙인인 사람들입니다. 
결국에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광만을 자랑하다가 허망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딤후 3 : 5절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알랙산더 대왕이 부대를 순시하다가, 전쟁에서 도망치다 잡혀 영창으로 끌려가는 한 병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죄명을 물으면서, “자네 이름이 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 병사가 대답하길,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 알렉산더 대왕이 말하기를, “자네는 나와 같은 이름을 바꾸든지, 용기를 갖든지 하라.” 고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운 삶을 살아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예수님께 온전히  거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부패하지 않으며, 범죄치 않으며, 교만해지지 않으며, 거룩한 가운데 일체의 비결,  즉 비천과 풍부 속에서도 능히 자신을 이겨내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와 늘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오늘도 이 예배하는 시간을 통해  만나시고, 그 주님과 남은 한 주간의 삶도, 아니 여러분의 평생에 함께 하시며,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늘 승리하며 감사로 충만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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