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닭살 돋는 호칭으로 (딤전 5:1-8)

  • 잡초 잡초
  • 311
  • 0

첨부 1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5월은 가정을 생각하고, 효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65 세 이상 노인 인구가 7%가 넘으면 고령화 사회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9.5%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20 년 후에는 20%를 넘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인구 5 명 가운데 1 명이 노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초고령 사회라고 합니다.
 
노인이 많다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저 출산으로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드는데 있습니다. 젊은이가 줄면 생산 인구가 줄어 나라 경제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나라에 미래의 소망입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노년기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노년기를 행복하게 보내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신앙입니다. 그 다음은 경제력입니다. 늙어서 돈이 없으면 초라해집니다. 연금과 의료보험 등을 잘 준비해 두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목도리녀가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한 여대생이 서울역 앞에서 앉은채로 힘겹게 기어가는 할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사러 간다는 말을 듣고 근처 편의점에서 할아버지가 원하는 막걸리와 빵과 음료를 사다 드렸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빵을 먹는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할아버지의 사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씨가 쌀쌀한데 할아버지 옷차림이 추워 보여 자기 목도리를 할아버지에게 해드린 것입니다. 이 장면을 누군가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 알려졌습니다. 지하도에서 주무신다는 이 노숙자 할아버지는 번듯한 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사연인지 집도 없고 사고로 다리를 다쳐 걷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쓸쓸한 노년기를 힘겹게 보내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방심하다보면 우리도 쓸쓸한 노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업화로 경제는 늘어났지만, 농경문화를 잃었습니다. 농촌에서는 적어도 3 세대가 한 울타리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를 보면서 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핵가족 시대가 되어 도시에 몰려 살고 있습니다. 농촌에 계신 부모님은 명절이 돼야 찾아뵙게 됩니다. 손자는커녕 자식 얼굴 보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다른 나라들과 FTA 자유무역협상이 진행되면서 농업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농촌에 남아있는 어르신들마저 돌아가시면 그 다음은 어찌될까요? 농촌 마을들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정겨운 농촌 문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시에는 잿빛 시멘트 건물 속에서 삭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디 가서 숨통을 띄우고 살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사회는 가족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 출산으로 자녀가 한 명 뿐이 가정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모, 고모 같은 가족 호칭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형, 누이에게 느낄 수 있는 형제와 자매의 우애도 모릅니다. 형이 있으면 눈치도 발달하고 좌절에도 단련이 됩니다. 양보도 배웁니다. 그러나 혼자 크다보면 사회성 발달이 늦어집니다. 어른이 되어도 함께 사는 법을 몰라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현재의 핵가족 제도는 가족의 정을 배우는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은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이 여자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탄성을 지르면 맞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가정입니다.
  
인간은 이 가정을 통해서 사랑을 배웁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 가족 공동체는 잘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결손 가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번 짝을 맺은 배필과 죽을 때까지 살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지난 주간에 시카고의 한 법률 회사가 낸 광고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페트먼, 갈런드 앤드 어소시에티츠'란 법무법인이 낸 광고는 속옷 차림의 글래머 여성과 근육질 남성의 사진을 배경으로 자극적인 문구를 넣었습니다. 이 법무법인은 이혼을 전문으로 해결해 주는 변호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문구는 ‘인생은 짧다, 이혼하라.’입니다. 이혼하는 것을 도와줄 테니 지금의 펑퍼짐한 배우자를 버리고 멋진 몸매의 배우자를 만나 새 인생을 살아보라고 부추기는 광고였습니다.
 
동물들 가운데도 한번 맺은 짝과 평생 함께 하는 동물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자를 버린다면 사람이 동물만도 못한 것이지요. 요즘 세상 풍조는 한번쯤 이혼을 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부추기는 풍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족 붕괴의 풍조 속에서 우리가 의지할 희망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제 2 의 가정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가장 최우선으로 가족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외에 어느 종교가 신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허용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외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시작합니다. 본래 이 단어는 아람어로 ‘아바’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아빠’하고 어린아이가 쓰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근하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아빠’ 하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닭살 돋는 호칭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섭고 저주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보다 친밀한 아버지 이미지가 더 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양자 삼으셔서 자녀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그러니까 우리들은 한 아버지 아래 자녀들입니다. 서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큰 형님이요, 오라버니가 됩니다.
 
기독교는 가족 호칭을 통해 서로 친밀함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교회 안에서 서로 가족처럼 대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2 절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충고를 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즉 디모데 목사님이 교인들을 대할 때 나이 든 남자 교인을 아버지처럼, 나이 든 여자 교인은 어머니처럼, 젊은이는 형제처럼, 혹은 자매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디모데를 부를 때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처럼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목회서신이라고 하는 디모데전후서를 읽으면 그런 정이 가득한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교인 가운데 자기 어머니로 삼은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을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롬 16;13>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면서 문안을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 현장에서 어머니처럼 사랑을 받았던 바울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어디서나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울이 그만큼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처럼 공경한 것입니다.
 
루포의 아버지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성경에 이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를 못 가누자 로마 병사는 길가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몬을 대신 지게 했습니다. 얼떨결에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고 해서 우스갯말로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사나이라고 합니다. 이 시몬을 소개할 때 성경은 마가복음 15장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인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몬의 아내가 사도 바울의 의붓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연도 참 이상합니다.
  
마가복음을 쓴 사람은 마가입니다.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초대교회가 생긴 그 다락방을 내준 주인의 아들이지요. 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1 차 전도여행을 동행했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이 구브로 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1 차 전도여행 때 이곳을 제일 먼저 찾았습니다.
  
몇 년 전에 KBS 교육방송에서 바울의 선교여행지를 탐사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었습니다. 그 때보니 이 구브로 섬 가장 높은 지대에 구레네 시몬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유적지로 남아 있지만 초대교회 당시에 구레네 시몬이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마가는 시몬의 가족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시몬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의 감독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마가복음을 쓰면서 시몬을 소개할 때 두 아들의 이름을 넣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재수 없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까이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장면을 지켜 본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그 길로 돌아가 가족들을 전도했을 것입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부지역입니다. 시몬은 외국에서 살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죽음 직전의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 체험 이후로 가족들을 데리고 초대교회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 그 증거로 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20 절에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여기에 나오는 ‘구레네 몇 사람이’가 시몬의 가족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구브로와 구레네라는 지명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더욱 심증이 갑니다.
 
또 사도행전 13장 1절에 안디옥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 명단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라고 소개된 사람을 주목해 봅니다. 니게르라는 말은 흑인이란 뜻입니다. 구레네가 아프리카 지역이라 이 시므온이 구레네 시몬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라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시몬과 같은 고향 사람이 됩니다.
 
좌우간 바울과 이 시몬은 선교 현장에서 만나 서로 동역한 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이는 시몬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의 아내를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가족 호칭으로 가깝게 지낸 전도의 동역자들끼리 얽힌 인간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선교 초기부터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 선교 후기까지 이들은 가족처럼 지내며 서로를 돌봤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정이 함께 할 때 힘을 모아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목회자는 나이 든 교인들을 부모님처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젊은 교우들을 친 동기간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즉 교회 공동체는 가족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로 맺어져야 주의 일을 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회사처럼 돈을 받고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돈의 힘으로 주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섬김의 정신으로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가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때는 여러분의 목사입니다. 이때는 신적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증거합니다.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은 무겁고 권세 있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변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내려오면 가까이 하지 못하는 위엄보다는 따뜻하고 가깝게 형제 같고 가족같이 느껴지기를 기대합니다. 저를 형님처럼, 오빠처럼 맞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보다 연장자이면 형님이 되고 누님이 되나요? 우리가 가족 호칭으로 막 트고 지내면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막 나갈 수는 없습니다. 또 고삐가 풀리면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품위와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끼리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자녀들은 서로 삼촌 이모 고모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전도사님의 어린 아들이 교회 청년들을 삼촌 이모하면서 따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에 결혼을 해서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삼촌의 정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서로 가족 같은 정겨운 호칭을 찾아서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닭살이 돋아도 좋습니다.
 
본문 4 절을 더 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이 말씀은 교회에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에게 효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효를 가르치는 사람은 과부가 아니라 목회자인 디모데의 몫입니다. 또 디모데 외에도 교회의 어른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이들은 남의 집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 아이들이 잘못 커서 곁길로 나가면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내 집 자녀만 간수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자녀들을 다 내 자식처럼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효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효도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는 하나님에게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8절에 가정과 믿음을 연관짓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가족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앙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가족에게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두 배로 부지런해야 합니다. 믿으려면 부지런해서 하나님과 가족을 다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속히 가족들을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멋지니안들이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황금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