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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아름다운 관계 (갈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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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희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로 지내는 주일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지는 혈연의 관계, 선생과 제자로 이루어지는 가르침의 관계, 이러저러한 생존과 생활의 일 혹은 기호적인 일들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각종 인간관계가 그 연결고리를 이루며 흘러왔습니다.
그 관계가 좋건, 혹은 나쁘건 에 따라서 발전적으로 또는 퇴보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와 관계가 진행되는 사이에 기쁨, 혹은 슬픔이 있었으며 그렇게 역사는 구성이 되어졌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로써 삶의 지혜와 지식의 전수여부가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가르치는 선생과 그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모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요즘의 시대는 스승이라는 말이 참 어색하게 들리는 시대입니다.
이전에는 지식과 지혜가 반드시 가르침을 이루는 분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요새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인격적인 접촉이 없이도 수많은 사람이 지식을 습득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그들의 지식을 흡수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도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흡수하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마음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지식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사람 살아가는 여러 가지 지혜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축적된 정보 속에서 터득해 가고 있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고립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을 같이 어울리는 지혜가 아니라 본인의 생존적인 것과 또는 매우 개인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음을 봅니다.

하지만 인간 사이에는 이해계산과 손익 여부만을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따뜻한 사랑과 정과 이해와 배려와 그리고 모든 시대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심정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 오실 날까지 우리들에게 지속될 것입니다.
인간들은 밥 먹고 사는 것만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기게 되는 것이며 결국 마음의 기쁨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이 더욱더 윤택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생각하고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의 경우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고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고통 중에도 영적인 자존감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도 아름다운 관계를 가지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식의 전달을 넘어선 지혜의 전달이고, 영적 유대감속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의 역사입니다. 이 지상의 마지막이 되는 날까지 이 지구상에는 어떤 상황이 와도 사랑과 배려와 우정과 헌신과 그리고 삶의 보람 같은 고전적인 단어는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존속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가르치는 선생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그리고 어떻게 그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사실을 아름답고 존귀하고 효과적으로 우리들에게 이루어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 자리에는 세상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많으실 것이고 또 저희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 또 모세대학이나 아니면 새가족들을 진정으로 사랑으로 품고 가르치시는 분들, 또 구역장, 부부 구역장 같이 우리의 귀한 성도들을 가르치고 품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 그와 같은 분들의 사역이 더욱더 아름답게 열매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또 주를 위해 아름답게 사역하는 많은 교역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셔서 주님 앞에 위로받으며 주의 역사 이루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말씀이 나왔을까 우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상태가 좋고 그럴 필요가 없다면 굳이 이런 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떤 말을 목적을 가지고 했다는 것은 그 목적이 이루어져야 할 열악한 상황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는 많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바울은 다른 이교도적인 문화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또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이교도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공격하고 그의 사도권에 흠을 내며 여러 가지 마음에 상처를 끼치고 있음을 봅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도 그릇된 선생들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 방해하고 또 성도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상처도 입고 마음의 답답함도 입고 또 성도들에 대한 진심의 가르침의 마음을 가지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쁨을 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일학교 선생님들, 또 우리 새가족부, 모세대학, 구역장, 부부구역장, 또 우리 모든 교역자들, 교회의 여러 말씀을 전하는 가르치는 이들에게 바로 우리는 기쁨과 감사와 우리 마음속에 좋은 신뢰의 마음과 이해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심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가지고 이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첫 번째는 왜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 땅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일이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배움으로 그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일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를 깨닫고 마음에 주의 성령이 임하며 또 우리는 구원받은 주의 백성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는다, 어떤 일을 많이 한다, 또 우리가 조직을 구성한다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성숙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권력을 잡은 적도 없고, 집을 지어본 적도 없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조직을 구성해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 시대적인 문화 속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필요하기에 하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본질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심 속에 그 말씀을 깨달아 구원의 반열에 이르며 구원에 이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더욱더 성숙한 은혜의 백성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란 가르침이고 배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지상에서 가장 많이 하신일은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호칭은 대부분 ‘선생님’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그것을 통해 변화되어 세상을 주님의 나라로 이루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제자들은 그들도 나가서 가르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더 확장해졌습니다.
말씀을 배워 그 마음에 깨달은 자들은 나가서 그 마음을 잘 가르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있어야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에디오니아 내시가 하나님 말씀을 봐도 잘 깨닫지 못하다가 빌립을 만나서 결국은 그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 빌립을 만나서 가르치는 자가 없어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말씀을 배워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곧 세례를 받게 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호세아 4장 6절>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시대에 너무나 답답한 현상이 있지요.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리고 가르치는데 소홀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이 상실됩니다. 그 때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리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네가 제사장을 못하게 하리라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너의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라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겁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말씀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 지상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믿음의 열정도 사라져 마침내 이 세상에 암흑의 시대가 오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가르치고 배움을 통해서 그 역사가 진행됩니다. 사도행전은 특별한 역사, 어떤 일을 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주의 복음이 전해진 것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입니다.
집 지은 것도 아니고, 조직을 구성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러 가지 업적을 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한 것을 기록한 것이되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보족적인 요소들이 같이 기록되어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진행하되 효과적인 가르침을 위해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선교지에 병원도 세우고, 또 기회가 되면 학교도 세우게 될 텐데 우리나라 초기에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하신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교육사역과 의료사역입니다.
와서 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양성하고 병원을 세워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가장 대표적인 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자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먹이신-이와 같은 구제사역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이와 같은 기반을 조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와 같은 모든 요소들이 합일돼서 이루어지는 본질, 즉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움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 선생님들이 그것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우리는 배려하고, 돕고, 또 위로하고, 이해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 관계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먼저 모세와 여호수아를 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가르쳤고, 여호수아는 모세를 시종 들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40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진심으로 여호수아를 세워 후계의 역사를 진행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너는 가나안에 못 들어가’ 하는 가슴 아픈 소리를 들었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항거하지 않고 ‘내 사역이 여기까지라면 나는 지금까지 이루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승복하면서 수용하고 그가 이제까지 40년 동안이나 그를 시종 들며 그에게 배웠던 여호수아를 후계로 세워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을 보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이었어요.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 같이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기준이 모세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에 대해서 이런 애틋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함께 했던 것처럼 너에게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기준이 모세를 향해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칭해서 직접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종이 아닌 모세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계를 통해서 드디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여호수아를 훈련시키셨으니 하나님이 훈련하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마침내 여호수아가 모세의 종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을 봅니다. 모세는 잘 가르쳤을 것이고, 여호수아는 진심으로 배웠을 것이고, 진심으로 모세를 섬겼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모습입니다.

엘리야가 훌륭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라는 훌륭한 후계를 남겼던 것입니다.
사람이 최종적으로 평가받는 마지막 관문이 뭐죠? 과연 그가 훌륭한 제자를 남겼느냐 입니다.
훌륭한 후계자를 남겼느냐? 훌륭한 제자를 남겼느냐? 그게 마지막 평가의 관문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 구약시대에 가장 능력을 많이 행했던 선지자는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을 다 마치기 전에 엘리사에게 그의 후계 권을 승계했던 것을 봅니다.
엘리사는 ‘내게 갑절의 은혜를 주셔서’ 이 말은 ‘내가 그 후계의 역사를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역사였습니다. 이와 같이 엘리사와 엘리야가 후계를 이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또 바울과 디모데를 봅니다. 바울은 정성을 다해서 기쁜 마음으로 디모데를 가르쳤고, 디모데는 전력을 다해서 배우고 섬겼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목회자로 추천합니다. 말하자면 사도바울은 순회전도자입니다.
순회선교사, 순회전도사인데 이제 이렇게 순회하다보면 교회가 세워지고 그 가운데 사도바울이 가르쳤던 사람들을 남겨놓아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는 겁니다. 그 때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추천하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빌립보 2장 22절>을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복음을 위해서 수고했다’ 여기서 사도바울을 섬기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것을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디모데는 전심으로 복음을 전함과 같이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것 같이 사도바울을 위해서 수고했고, 또 그것이 마침내 복음을 위해서 유용했던 일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보면, 사도바울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때마다 수많은 주변의 제자들과 수많은 복음의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그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을 봅니다.
때로는 쫓겨 가듯이, 때로는 그것이 든든해서 각각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것은 주변의 많은 섬기는 자들의 섬김으로 인하여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을 봅니다.

세 번째로 왜 말씀을 배우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할까요? 하는 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가르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좋은 것이 있을 때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을 때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무엇인가 위로와 기쁨을 가지고, 또 무엇인가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서 같이 협력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너희는 내가 입술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선포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함으로 영적 일체감과 더불어 영적 동지가 되고 사역을 세워 함께 함이 돼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담임목사 기도후원자로 2천 수백 명이 지원했습니다. 거기서 매년 지원서를 내서 하루에 15분씩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루에 15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밥 먹을 때 기도는 30초밖에 안하잖아요. 그런데 15분 기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희 교회 2천 수백 명이 기도후원자로 신청을 하고 하루에 15분씩 기도를 해 주시니까 제가 영적으로 마음이 든든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실제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 우리 성도들이 이 시간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2천 수백 명이 기도하시는데 어느 시간도 빠짐없이 다 어떤 분이라도 기도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영적으로 든든하겠습니까? 기도함으로 영적인 일체감을 느끼고 영적동지가 되어 사역을 세워 함께 함이 돼야 합니다. 또 낙심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나면 시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하는데 목사입술을 떠난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전한 말씀이 되는 것이지 목사의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말씀을 전했으면 성령께서 가슴에 역사하는 것이지 목사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개인적인 입장으로써 ‘내가 준비를 잘 해서 잘해야 될 텐데’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니까 나는 아무 준비도 안 해도 돼.’ 이것은 오히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늘 하다보면 물론 목회에서 설교가 전부는 아닙니다.

목회에는 여러 부분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성도들과 대면하는 시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또 그 중에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설교하고 나면 늘 마음에 자책이 드는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설교했는데도 은혜 받는 성도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내가 설교를 너무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하는 생각이 되는데도 매주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으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성도들이 나가시다가 목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오늘 은혜 받았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애 썼습니다.” 이렇게 얘기하시는데 정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위로하시는 것 같아요. 또 마음이 늘 상한 날은-어휴 정말 내가 이렇게 설교해도 되나? 하는 날은 그런 분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마 천사를 보낸 것 같아요.
그런데 인사할 때 이렇게 인사해요.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해야지 “목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애 썼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면 은혜는 안 되지만 수고는 했다든지 은혜는 안 되지만 애는 썼겠어. 라고 얘기하는 것 같으니까 ‘오늘 은혜 받았습니다.’ 이렇게 인사하세요.

우리는 서로 격려해 줘야 합니다. 요새는 제가 안 그러는데 전에 제가 5부예배 끝나면 제가 승용차 타고 도심고속도로가 있는데 제가 거기 가서 창문을 다 열어놓고 제가 자동차로 최고로 빨리 갈 수 있는 속도로 달려서 늘 한 바퀴씩 갔다 오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하고 나면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 붙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또 다음주일에 강단에 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차를 타고 달리면 바람이 ‘슉’ 하고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얼굴에 붙은 부끄러움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목사라서 이렇게 설교하고도 이렇게 또 있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 제가 바람이라도 안 쐬고는 견디지를 못할 것 같았어요.

아마 다른 사람 앞에 서는 사람들은 다 이런 마음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낙심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아 하나님 오늘 큰 은혜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하고 오늘 뭔가 좀 될 것 같아요. 그러나 막상 끝나고 나면 또 이렇게 했네. 이런 생각이 들면 정말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안식년일 때 제일 편했던 것은 제가 설교를 안 하고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체중도 많이 늘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사도 마찬가지, 선생님도 마찬가지, 구역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역장님도 기껏 열심히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구역식구가 다 빠지고 한 두 명만 오면 얼마나 마음이 낙심이 되는데요.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가, 내가 잘못 섬겨서 그런가, 하고 마음에 섭섭함과 자책감이 많이 드는 것입니다. 더욱이 배우는 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하고 이런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자책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는 자나 가르치는 자나 힘을 합해서 좋은 작품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 주일에 말씀의 은혜를 끼쳤다면 그것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성도들이 은혜받기를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좋은 것을 함께 함으로 일체감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그 배움이 확장되고 힘을 얻어 실제의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됩니다. 내 기쁨을 나누고 진보의 모습을 보이고, 더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벌써 우리가 일체감을 느끼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교육의 효과가 이뤄진 것이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육은 주고받는 거래와는 다른 겁니다. 진심으로 마음의 기쁨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고, 내가 우리 목사님, 우리 선생님들, 우리 구역장님들, 정말 내가 생각해서 그분들에게 전심으로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면 알려드리고 같이 나누는 겁니다. 제가 전에 청년들을 가르칠 때 요즘도 청년들을 가르치지만 우리교회에도 청년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 제가 여기오기 전에 청년들을 가르칠 때 생일이 되면 책을 한 권씩 선물로 줬는데 거기에 꼭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자랑, 나의 기쁨 OOO>하고 이름을 써서 줬습니다.
너는 내 기쁨이고 내 자랑이다-이렇게 썼는데 우리 한 번 따라합시다.
‘나의 자랑, 나의 기쁨’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냐면 ‘너희는 내 자랑 기쁨이요 나의 영원한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가르쳤는데 너희야 말로 나의 면류관이다-이렇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말씀을 가르침 받는 사람이 정말 믿음 안에서 바로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인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오늘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죠. 제 마음에도 설교를 늘 준비하면서 토요일이 특별히 다가오면 우리 성도들이 또 일주일을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고 휩쓸림도 있고 힘도 없었을 텐데 또 오늘 주일에 와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하나님의 힘을 얻어서 가셔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메시지를 늘 생각을 하면 마음에 힘이 납니다.

오늘도 ‘우리 성도들에게 용기를 드리고, 위로를 주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소망의 빛을 갖게 하자’ 하는 마음이 들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무슨 마음의 기쁨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좋은 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편안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마음을 이해하는 심정적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오해하려고 작심하면 백가지가 다 오해가 됩니다. 이해하려고 작심하면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편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마음을 이해하는 심정적인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상대가 불편하면 가르치는 것도 힘이 나지 않고 대결의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영적인 대결의 개념이지만 언제나 그런 대결의 개념으로 가르치게 되면 언제든지 마음의 기쁨이 없고 마음이 궁핍해 지는 겁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이해의 심정으로 다가서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마음을 품고 가르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혀 다릅니다. 실수를 두려워 하지 않고 그것조차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큰 힘을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은 진보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선생의 가장 큰 기쁨은 배움 받는 자들의 진보의 모습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을 보면 어느 날 달라져 있습니다. 교회도 오래 다니시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전혀 마음에 큰 감동이 없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을 기회로 ‘아, 정말 달라지셨네. 어떻게 저렇게 달라졌을까?’ 하고 방향이 선회되고 그 마음의 향기와 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들이 전과 전혀 다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갑자기 전과 달라진 신앙의 태도와 모습을 보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크시다하는 것을 느끼고 기뻐하게 됩니다. 사람은 편한 것보다는 결국 기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편한 것도 기뻐야 편안해 집니다. 생각의 진보, 삶의 진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 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도 이해의 심정으로 다가서고 배려하는 심정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판단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이해의 심정으로 배우려고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이 이해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이해하려고 드는 것과 오해하려고 드는 것은 한없이 다르다고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이해하려는 심정이 생기더라고요. 점점 1년, 1년 더 지나면서 사람들을 보면 성도도 그렇고 교역자들도 그렇고 가능성의 측면이 확대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여러 가지 단점도 보이지만 내가 어떻게 저걸 가르쳐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가능성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그런 마음이 들면 얼마나 행복한 심정이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졸아도 이해가 되더라고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일주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습니까? 한 시간 예배드리는 데 그것도 못 참고 와서 졸다니. 그럼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런데 조는 것도 찬송가 부를 때 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광고시간에도 조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 자는 것은 다 설교시간에 잡니다. 예배시간에 왜 하필이면 설교시간에 잡니까? 그런 사람은 설교 끝나면 다 깨요. 그러니까 그 마음이 섭섭해요. 그 수많은 시간 중에 일주일에 딱 한 시간, 그 중에서도 왜 설교시간에 자는가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좀 섭섭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이런 마음이 듭니다. 얼마나 피곤하게 살면 이 시간에 와서도 잘까 하는 생각이 들면 자는 사람이 안 됐고 온 게 정말 너무 감사한 것 같아요.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요기 앞에 두 사람입니다. 저 뒤에 남으라고 해서 제가 두 사람 손 붙잡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두 부부가 같이 자는데 탕하고 부딪혔어요. 맨 앞에서. 너무너무 안 됐더라고요. 얼마나 피곤하면 그럴까? 그래도 은혜 받고자 앞에 앉아본 건데, 제가 청년 수련회를 갔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자면 앞으로 이렇게 졸잖아요. 그런데 그 청년은 뒤로 넘어졌어요. 자다가. 제가 그 청년을 보면 절대 안 잊어버려요. 제가 평생 안 잊어버릴 것 같아요. 제가 뒤로 넘어진 사람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자냐?’ 하는 생각이 안 들고 정말 저렇게 피곤한데도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면 그 마음을 가상하게 여깁니다. 그러니까 이해의 심정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귀하게 보이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보고 부족한 것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다 부족한 사람만 보이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그런데 어딜 봐도 훌륭한 사람들이 보이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저는 어디 심방 가서 ‘이쪽 방으로 오십시오.’ 하면 그 방에만 들어갑니다. 다른 방에는 절대 안 들어갑니다. 그 방의 모습이 어떨지 어떻게 압니까? 거기에 이불도 안개고 다 쓸어 넣고 닫아놨는지도 모르고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앉으십시오.’ 하면 그 자리에만 앉아있어야 됩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남의 집에 가서 장문 열어보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 장안에 어떤 사실이 어떻게 있을지 모르잖아요. 특별히 심방 오면 청소를 하시잖아요. 청소할 때 딱 그곳만 청소하는 경우도 많단 말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화장을 한 여자 분들에게 화장을 안 했을 때의 모습이 어떨까 하고 상상을 하는 것은 매너가 아닌 것 같아요. 화장한 여자 분들은 그 모습 그대로 봐드리면 되는 것이지 화장을 안했을 때는 어떨까하고 그것을 상상하는 것은 전혀 좋은 매너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보여주고 싶어 하면 그 면만 보는 것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굳이 보여주기 싫은 면을 내가 그것을 파헤쳐서 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이라는 것은 너무 기간이 짧아서 모든 것을 다 체험하고 갈 수가 없어요.
있는 것 중에 부분만을 체험하고 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기뻐하고 배려하고 대화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면까지 굳이 살펴서 판단해야 바르고 정당한 판단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래서 우리가 뭘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 때 다른 사람의 기쁜 점, 좋은 점을 보고 부족한 점을 혹시 봤다면 저게 내가 돌봐서 저렇지 않게 했어야 할 점인데 하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큰 은혜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리석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워서 모른 척 해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또 정말 사랑하면 내 가슴이 아파 그것을 내가 더 기도하고 내가 더 배려해 줘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또 서로서로 주변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임할 수 있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너희는 내 자랑이요 기쁜 면류관이라고 가르친 자들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앞두고 맨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한 것은 그를 따르고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더욱더 깊어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위해서 좋은 것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위로를 드리고 이해해 드리고 격려하고 기쁨을 주어 편안한 마음속에서 그 말씀을 잘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우리 선생님들, 또 우리 교역자들, 모든 구역장님들 정말 귀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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