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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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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늘은 사랑의 열 번째 정의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아홉 가지의 정의는 상대방을 향하여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였습니다. 오래 참는 사랑, 온유한 사랑, 투기하지 않는 사랑, 자랑하지 않는 사랑, 교만하지 않는 사랑,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사랑, 성내지 않는 사랑,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사랑이 그렇습니다. 모두 자기 절제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랑

그러나 오늘 열 번째의 정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한없이 포용하고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줏대 없고 지조도 없는 그런 나약함은 아닙니다. 사랑은 단호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불의한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합니다. 사랑을 품위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불의에 대해서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인도, 또 어떤 죄도 다 품을 수 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우리에게 잘못했을지라도 용서하십니다. 모든 재물을 방탕하게 창기와 함께 다 써버리고 돌아온 탕자도 기다리시며 아무 책망 없이 받아주시는 따뜻한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만만히 대할 수 있습니까?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성품과 함께 거룩의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곧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히 그 앞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2,16)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두 가지 성품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이 두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결코 그 앞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이 만만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간이나 남녀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서로 편하고 서로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긴장감은 있어야 합니다. 예의 없이 막 함부로 말하거나 막 대우해도 되도록 자신을 값없이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권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침해 받게 해서도 안 됩니다. 더구나 배우자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또한 해서는 안 됩니다. 편안하지만 약간은 긴장감이 있는 관계가 서로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부부관계를 오래 지속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왕자가 어느 시골 처녀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할지라도 그 신부가 계속 시골처녀로 남아 있다면 그 결혼관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왕비다운 품성과 위엄을 갖추어야 합니다.

친구 간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툭 터놓을 정도로 허물이 없고 편안해야 하지만 친구간의 우정에도 긴장감이 있어야 합니다. 외로울 때 함께 술을 마실 수 있고 위로가 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좋은 친구는 자기가 결정하기 어려울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내가 잘못할 때는 책망도 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내가 감옥에 가거나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믿고 신뢰해주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단호히 책망할 수 있는 친구, 그래서 그 앞에 가면 편하지만 왠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친구가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우리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런 좋은 친구를 만나는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다윗과 요나단처럼 신앙 안에서 좋은 믿음의 동지를 만나는 것처럼 큰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와 자공 간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습니다. 자공이 질문하였습니다. “마을 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은 되지만 자기 견해가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은 사랑도 없고 열매도 없는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견해가 뚜렷한 사람입니다. 사랑이 위엄이 있는 까닭은 이처럼 자기 견해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무조건하고 자기 자녀를 감싸고 편든다고 하여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먼 사랑이며 자녀를 버르장머리 없이 키우는 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녀의 불의와 잘못에 대해서 징계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를 잘 통제하지 못합니다. 언제 아이들을 책망할 때인가도 잘 모르고 책망하는 방법도 잘 모릅니다. 부정직한 모습을 보일 때는 책망해야 합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는 책망해야 합니다. 시험 성적 떨어졌다고 아이를 책망하기보다는 자기 최선을 다하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 책망해야 합니다. 책망할 때는 자기감정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충분히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책망할 때는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교회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랑과 위로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의 머리속에는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불의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음행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과 6장에 걸쳐 그 내용이 잘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중 하나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옛날에는 첩으로 여러 여자를 두기도 했는데 아마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여자를 취한 것 같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든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더구나 거룩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악을 행한 자와는 함께 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5장 11절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악인과는 함께 사귀지도 말뿐만 아니라 아예 성도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단호히 명령합니다. 13절입니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현대 교회가 힘을 잃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까닭은 교회가 스스로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악행이나 불의에 대해서 단호함과 거룩함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교회가 그 치리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그 사람이 유력할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성금을 유용하고 아무렇게나 써도 그가 목사이거나 장로일 경우는 제재하지도 못합니다. 몇 년 전에는 수만 명의 교회를 이끄는 분이 공금 횡령과 간음 문제로 사회법정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본인은 이에 대해 음모라고 하며 전혀 사과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나 교단은 이 불의에 대해서 징계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밟힙니다. 요즘 누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거룩한 곳이라 생각합니까? 세상 기업들처럼 자기 이익 추구에 여념이 없는 곳으로밖에 보지 않고 있습니다. 최소한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그 사람 행실은 바르겠다’는 말이 나와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옛날에는 소금이 정제가 잘 되지 않아 찌꺼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짠 맛이 사라지고 나면 찌꺼기들만 남는데 그 찌꺼기를 거리에 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지나다닙니다. 오늘날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연일 뭇매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할 것입니다.

교회사에서는 교회를 규정하는 본질을 다음 네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보편적이며’ ‘거룩한’ ‘사도적’ 교회”입니다. 교회는 여러 교단과 교파로 갈렸지만 그리스도의 몸이란 점에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점에서 또한 보편적이며 영원합니다. 교회는 사도의 말씀과 전통 사도들의 사역을 따르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거룩합니다. 그 거룩은 실상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사람들로 선택하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예수님의 신부가 된 이상 우리 스스로 주님처럼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또 우리 서로를 ‘성도’라 부릅니다. ‘Saint’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며 1장 2절에서 고린도교회를 이렇게 부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곳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는 사랑하고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불의를 범한 당사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받아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불의를 지속하고 있다면 거룩한 교회는 그에 합당한 징계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성도간의 불의

사랑은 또한 상대방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간에 재산을 두고 송사가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불의한 일을 행했습니다. 이런 부당한 일에 대해서 재판을 걸었습니다. 아마 재산상의 분쟁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또한 불의하다고 평가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교인들 간에 서로 해결을 해야 합니다. 분쟁 당사자가 해결하지 못하면 교회 안에 다른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 이에 대해서 판단하게 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송사를 붙은 두 당사자에 대해서 모두 불의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의 거룩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세상을 판단해야 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그런데 교인 두 당사자가 불의한 세상 법정에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6:2-3) 교회의 권위와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일이라면 차라리 소송을 포기하고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신앙인이라는 프라이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의 모습은 정말 부끄럽습니다. 자기 이익이나 생각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 법정으로 이 문제를 끌고 갑니다. 

두 번째 이유는 소송을 걸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믿는 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6:8) 바울은 한 형제됨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한 형제된 이상 소송을 하느니 차라리 네가 손해를 보고 말라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감격과 소중함이 있습니까? 사랑은 다른 형제에게 불의를 행하느니 내가 그 불의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완악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형제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어떤 때는 시기하고 질투하기조차 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서로 미워하며 경쟁하는 두 사람이 거리를 마주보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 이윤이 아니고 상대방보다 얼마나 더 팔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험담하고 상대방보다 싸게 팔아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보다 못해 그 중 한 상인에게 천사를 보냈습니다. “내가 너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말해라. 재물? 장수? 건강? 뭐든지 다 들어주마.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네가 무엇을 받게 되든지 같은 것을 맞은 편 상인은 두 배로 받게 될 것이다. 네가 금화 백 냥을 받으면 그는 금화 이백 냥을 받게 되고, 네가 유명해지면 그는 너보다 배로 유명해질 것이다.” 천사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더 보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방식이다.” 

상인이 한참을 생각한 끝에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뭐든지 원하는 것을 주신다고 했지요?” “그렇다.” “내가 하나를 받으면 저 친구는 두 배로 받고요?” “그렇다.” 그러자 상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한쪽 눈을 뽑아주십시오!” 우리도 이 상인처럼 어리석고 심보가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부간의 불의

저는 이 불의의 문제를 부부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 교회 내에 존재하던 불의한 자들의 리스트입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성적인 타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음란, 간음, 탐색, 남색하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사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인구 10만 명 정도 되는 항구도시인데 대부부의 구성층이 노예와 제대 군인이었습니다. 옛날부터 아프로디테 신전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성창만 1천 명에 이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스럽다”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였는데 이 뜻은 곧 “음란하다”라는 의미와 통하였으며, “고린도 사람”하면 “포주”, “고린도 여자” 하면 “창녀”를 의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지역적 특성 때문에 고린도교인들 또한 성윤리 면에서 자주 문제가 되었습니다.

음란이나 간음은 단순히 성윤리에 대한 문제에 앞서서 부부간의 인간관계를 파괴하게 만드는 중대한 죄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부관계에 적용하면 나는 내 아내나 남편 외에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지 않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아내나 남편을 배반하고 다른 이성과 바람을 피우는 것이 곧 불의이며, 사랑은 이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혼이 많이 늘고 있는데 주된 원인중 하나는 배우자의 외도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공공연히 가정을 가진 남녀가 또 다른 애인을 두는 것이 마치 자랑처럼 된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적인 외도는 사랑의 파기입니다. 사랑은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신뢰를 깨는 악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 지워 준 관계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잠언서 5장 15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여기에서 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것을 비유합니다. 우리는 자기 우물의 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물은 시원하고 먹을 만큼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딴 우물을 기웃거립니다. 딴 우물을 먹으려하는 것 이것은 자기 우물에 대한 배신이요 불의입니다. 또 “자기 샘으로 복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을 복되게 하고 즐겁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불의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한 이불에서 자야하고 서로의 만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그 사이에 심지어 자식이나 부모일지라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이나 일이 부부관계를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부부관계를 파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자기와 하나님과 일대일로 있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지키며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노동을 할 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와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때의 기쁨을 아담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이 둘이 행복한 삶에 대해서 성경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4-25) 가장 불행한 부부는 자기우물을 버리고 딴 우물을 찾는 부부요, 자기 샘이 아름답고 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부들입니다.

구약에서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말할 때 그 모습은 외모에 있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전형은 순결하고 정절을 지키는 여성입니다. 아가 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으로 유명합니다.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 구 여자를 망대에 비유합니다.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아4:4) 망대는 성에서 가장 높은 데 있습니다. 망대는 난공불락입니다. 어떤 침입도 불허합니다. 이는 바로 여성의 정절을 말합니다. 부부 간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망대처럼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가장 화내며 분노했던 것은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불의한 일을 했을 때였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바람난 아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여인으로 대표되는 호세아의 부인 고멜이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보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배신한 우상죄를 가장 큰 범죄로 생각하셨고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마음 중심이 주님 외에 다른 곳에 한 눈을 팔고 있는 것을 못견디십니다.

우리 예수님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계21;2). 우리는 황무지와 같은 인생인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존귀케 해주셨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사62:4)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쁄라’는 “결혼한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결혼한 자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충실한 신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배신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신부된 우리 또한 그 예수님을 일심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불의를 행하지 않음으로 의와 진리에 서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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