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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우는 사람들 (잠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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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는 사람들
잠14:1-2

어떤 성격이 급한 하딩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중소기업의 직원이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월급 인상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월급인상을 요구한 후에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든 사표를 쓸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출근을 하고 보니 일이 밀려서 사장을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녁에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옷을 갈아입는데 화장대 위에 하얀 봉투 두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열어보니 아내가 준비한 두 개의 카드였습니다. “여보, 봉급인상을 축하해요.”, 또 하나의 봉투에는 “봉급은 인상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여보, 힘내세요!” 이 하딩이라는 남자의 아내는 역경과 순경의 대비책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하딩은 아내의 격려에 힘을 얻어 가장 유능한 직원으로 승진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현숙한 아내를 얻은 사람입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재산이 있다고 하면 건강과 현숙한 아내라고 스펄전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종류의 여인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집을 세우는 여인이며, 또 하나는 집을 허무는 여인입니다. 다른 말로는 건설적인 여인과 파괴적인 여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건설하고 세우는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이며, 허물고 파괴하는 여인은 미련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어진 아내와 악한 아내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예로 보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잠11:22절에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금고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돼지 코에 걸려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여인이 현숙하다 하는 것은 그 몸가짐을 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못한 여인은 아무리 외모가 아름답고 멋을 부려도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잠12:4절을 보면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현숙한 여인을 얻으면 평생에 행복이요, 영광이지만 잘못 얻는 사람은 평생을 두고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3대 악처로 불리는 세 사람이 있는데 소크라테스의 아내 쿠산티페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제, 그리고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라고 합니다. 특별히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소크라테스의 부인, 쿠산티페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을 하는 사람치고 돈을 버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아니합니다. 늘 제자들을 모아 놓고 결론도 없는 인생 문제를 논하니 거기서 무슨 돈이 나오겠습니까? 이런 남편을 두고 사는 아내는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착한 여자라도 이런 남자와 살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날도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을 앉혀 놓고 열심히 강의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부인은 화가 끓어오릅니다. 저녁을 끓일 것도 없고, 아이들은 밥을 달라고 조르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비라고 하는 사람이 자식들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별 반응이 없습니다. 강의에 빠져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좀 더 큰소리로 구시렁구시렁합니다. “철학을 하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그러면서 부엌살림을 이리저리 던집니다. 부엌이 시끄럽습니다. 그 소리가 강의실까지 들립니다. 학생들이 집중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아는지 모르는지 강의에 빠져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양동이에 물을 하나 가득 담아 들고 와서는 강의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과 제자들을 향하여 물벼락을 내립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젖은 옷을 툭툭 털면서 하는 말이 “천둥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는군!”하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3대 악처 중에 하나가 된 것은 어느 정도는 소크라테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 본 제자 중에 하나가 혼란스럽습니다. 근심이 됩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도 앞으로 결혼을 해야 할까요? 선생님을 뵈오니 결혼하는데 대한 회의가 듭니다!” 그때에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암, 결혼을 해야지, 결혼은 반드시 해야 돼. 어진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고, 나처럼 저런 아내를 만나면 적어도 철학자는 될 걸세”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결혼을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창조의 원칙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인을 만드셨습니까? 아담 혼자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돕는 배필을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이 사실을 알고 하와를 보면서 말하기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자의 역할은 돕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자는 곱고, 탄력 있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유연성이 있으며, 상냥하게 정결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자의 의무가 있다면 남편을 잘 도와 가정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집안은 여자의 손길이 다아야 생기가 있고 윤기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남자는 여자의 손길이 닿아야 윤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활력이 솟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도움을 받지 못할 때에 무능력해 집니다. 독선적이 됩니다. 난폭해 집니다. 한 마디로 불행해 집니다.

아담이 혼자 지낼 때에 그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창1:18절에 보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서 좋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으신 사람이 바로 하와, 여자인 것입니다. 지으신 목적이 ‘돕는 배필’입니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마땅한 역할이 어떠한 것인지를 교훈해 주십니다.(고전11:9,엡5:24) 그렇다고 이 말씀이 남성 우월성을 주장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열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문제이지 인격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그분의 성품을 함께 나눠 받은 동등한 인격체이기에 서로 존경해 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고, 섬겨주고, 복종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11:11)

아무튼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시 합니까? 여자들은 경제력을 우선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은 여자의 외모를 가장 먼저 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도 다 좋겠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도 중요하지 아니합니다. 남자들이 여자들 얼굴이 예쁘면 좋겠다고 선호하지만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얼굴이 예쁜 아내는 남편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이 예쁜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드군요. 20대가 얼굴에 바르는 것은 화장이라고 하고, 30대가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분장이라고 합니다. 40대가 되면 왠지 화장발도 잘 안 받고, 잡티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화장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40대에 하는 화장은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라고 합니다. 50대가 하는 화장은 화장이 아니라 위장이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60대가 넘으면 어떻게 될까요? 완전히 포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잠31:3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아름다움도 지나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건강하시고 지혜로운 아내들을 소유하시는 분들이 되시어서 늘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우리자매 여러분들은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된 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외하시고, 마음들이 예쁜 자매들이 되셔서 남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 계신 우리 교회의 모든 자매들은 집을 세우시는 지혜로우신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개중에는 모든 후손들에게 죄의 짐을 물려 준 하와와 같은 허무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남편을 우상 숭배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도록 남편을 조종한 이세벨과 같이 허무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집을 세운 지혜로운 여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기생 라합과 같은 여인입니다.

라합은 그 신분이 기생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기와 그 가정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하게 올라간 가문을 세우는 그런 여인이 있습니다.

둘째로 룻과 같은 여인입니다.

이방 모압 여인으로 남편은 죽었으나 시어머니를 따라 고국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베들레헴으로 따라왔던 이방 여인 룻입니다. 그는 후일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여인입니다.

셋째로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인입니다.

브리스길라의 남편은 아굴라였습니다.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남편의 믿음을 바로 세워 천국일군으로 만든 귀한 여인입니다. 아굴라가 아굴라 되기까지는 브리스길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야기 하나로 결론을 드리겠습니다.  소와 사자는 서로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지요. 부부가 된 소와 사자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는 매일 들판에 나가 가장 싱싱한 풀을 뜯어다 사자에게 주고, 사자 역시 사랑하는 소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사냥을 해 맛있는 살코기만을 골라 소의 밥상 위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 참다못한 소와 사자는 서로에게 “먹을 만한 음식을 줘야지!”라며 크게 다투고 갈라섭니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배려했지만 소와 사자에게 돌아온 건 이별의 아픔뿐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별의 아픔이 찾아왔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상대가 좋아하리라고 하는 나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사랑이기에 그런 아픔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 주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선행적인 사랑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바울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는 중에 결론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13:7)

사실 우리의 만남도 소와 사자가 만난 것과 같지 않습니까? 어떻게 맞겠습니까? 오히려 맞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바울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배려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와 같다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나와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기대가 되고 가슴이 설레겠습니까? 얼마나 우리 집과 교회가 잘 세워지겠습니까? 부디 세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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