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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하십니까?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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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에 이어 사람들은 환경을 해치지 않는 생활 스타일로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려는 소위 '로하스족'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아침에 제가 여러분에게 행복하십니까? 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91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기에 출신의 극작가 마테를링크(Maeterlinck, 1862∼1949)가 쓴 "파랑새"라는 소설의 내용을 여러분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러시아에서 가난한 나무꾼으로 살던 두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루'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파랑새를 찾지 못합니다. 곧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가도 금새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남매는 죽도록 고생만 하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지 못한 채 지친 몸을 이끌고 자기들의 초라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행복의 파랑새는 자기 집 초마 밑에 앉아 있는 비둘기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이란 파랑새를 좇아서 평생을 경주하는 경주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파랑새는 사람들의 바램이나 기대와는 달리 쉽게 우리의 손에 잡히지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동양에 최고의 학자 중에 한 사람인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섹스도 사람들이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가져다 줄 줄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좇아 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속아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소유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참 행복한 삶을 살았던 한 인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본문에 대하여 한 신학자는 "이 시편을 읽고 눈물을 닦아보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성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하나님과 우리 인생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하면 매우 아름다운 짐승으로 알지만, 이 양은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은 방향감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양은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동물이 자기의 집을 쉽게 찾아오지만, 양만은 그렇지 못한 존재입니다. 집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집을 찾지 못합니다. 소도 말도 고양이도 반드시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둘째는, 자구책이 없이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을 갖고 있습니다. 신체의 한 부분을 무기로 사용하는 존재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신체의 색갈과 유사한 자기 주변의 환경에 은거함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보호색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양은 별로 이런 자구책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스로 만든 그 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핵무기를 만든 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핵무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서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부심을 가질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교통사고율 세계 제1위의 국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동차 운전을 시작하면 부모들의 초조함과 두려움은 절정에 달합니다.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모종의 종양이라도 발견되었다 싶으면 갑자기 힘이 빠져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하여 발달한 현대적인 산업이 보험업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사고가 두려워 자동차 보험에 가입합니다. 집이나 건물에 화재가 날것을 두려워하여 화재 보험에 듭니다. 중동지방 건물들은 모두 예외 없이 지진 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건강상실을 두려워하여 의료보험에 가입합니다. 비행기 탈때 어떻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항공보험에, 배를 타며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하여 선박보험에 듭니다. 은퇴이후를 두려워하여 은퇴보험에 듭니다. 축구선수들은 발 보험에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 보험에 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보험은 주둥이보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각종 보험에 들고도 아직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피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지닌 이런 실존적인 두려움이 바로 인간 타락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고백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세째는, 양은 너무나 쉽게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양은 일견 멀리서 겉으로 보면 깨끗해 보이나 가까이 있으면 냄새나고 너무 쉽게 환경에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예외없이 우리가 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보편적 타락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의롭다할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 오늘 근사한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지만 우리 안에는 죄책의 어두운 갈등이 있습니다. 방황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무력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것이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런 양과 같은 죄인의 실존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완벽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 완벽한 해답은 목자입니다. 목자만 곁에 있으면 됩니다. 목자가 길 잃은 양의 방향을 인도하십니다. 양을 보호하고 양의 필요를 공급합니다. 그리고 더럽혀진 양을 깨끗이 씻겨 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 무려 7,000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길 잃은 인간의 목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는 어느 날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어느 날 당신의 제자들에게 선한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는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분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양들을 찾기 위해 우리의 큰 목자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여러분의 작은 목자가 되어 함께 잃은 양들을 찾자고 초청하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에 지금 시인은 가장 행복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행복 자는 주님이 자신의 목자임을 알 때 그는 지금 자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정녕"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과거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과거에서 그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고, 또는 원수들의 치열한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난 날 그는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골리앗을 죽일 만큼 그가 세운 전공은 큰 것이었고, 이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 앞에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이제는 ?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잠깐의 고난이었는 줄 알았는데 자그마치 20여 년이나 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아내를 잃었고, 모든 것을 다 상실되는 것 같은 아픔의 시절이었습니다. 이 당시 그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시102:6,7절에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세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광야의 당아새, 황폐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서 떨고 있는 지붕 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알 수 있잖아요.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마음에 근심과 괴로움을 안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또 사업에 실패해서 말할 수 없는 진통을 겪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게 중에는 푸른 꿈이 산산이 깨어지고 허리가 잘리듯이 괴로운 날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때마다 서 있을 수 있는 힘마져 없어서 길바닥에 주저앉듯 우리 역시 인생의 길바닥에 널 부러져 앉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세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그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그가 일어나서 이렇게 자신이 행복하다고 외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 이유를 안다면 그 길을 따라야하지 않나요? 여기 4절을 보세요."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 보면 그는 자신의 어려웠던 그 때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표현 할 만큼 고통이었지만, 그가 그곳에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로, 함께 하셨기에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잇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가장 행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몽골 선교를 은혜 가운데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이 러시아 접경지역이다 보니까, 마피아들이 이 통로로 마약을 운반하기도하고, 또 국경을 넘는 밀입국자들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국경 수비대들의 순찰이 많이 강화가 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들어갈 땐 반드시 나라에서 발급해 주는 통행증을 소지해야 하는데 현지에서 통행증을 만들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참 난감하더라구요. 그 투시코라는 지역은 우리 교회 청년들이 작년에 여름 성경학교를 하려고 갔던 지역인데 때아닌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가 3시간만 더 가면 될 현장을 하루 종일 차를 타고 온 보람도 없이 철수한 현장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 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강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트르에서 그곳까지 왕복 3일을 잡고 선교사님 내외분과 국립농대 교수 한분과 찬양 사역자, 그리고 통역을 하는 자매와 같이 길을 떠났습니다. 투시코에는 세례 받기로 준비한 사람들이 9명이 있는데 이들은 3년 째 세례 받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저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비싼 경비와 시간을 투자하며 그 현장에 가게 된 것입니다. 화요일 아침에 떠나서 다음날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도착을 했습니다.

허둥지둥 싸온 라면에 식은 밥을 말아 점심을 마치고 4시에 예배를 시작하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국경 수비대 대원이 우리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교회에 들어와서 신분증 검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그 때 수비대 대장이 "지금 당신들이 종교 행위를 하니까 그 행사를 마치고 자기 수비대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권을 빼앗아갑니다. 처음엔 경황이 없었지만, 뭐, 그 나마도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여기까지 와서 세례도 주지 못하고 간다면 무슨 낭패이겠습니까? 세례식 자체를 하지 못 할 수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이해해주니까 오히려 그 군인이 고맙더라구요. 9명 가운데 한 사람이 오지 않아서 8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그곳에 성도들에게 성찬식을 집례하고 길을 나서서 국경 수비대가 있는 초소로 일행이 오후 6시가 넘어 갔습니다. 그때 그 심정, 아마 당해 보지 못한 분은 이해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가 밀려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비대 안에 들어간 순간, 거기에 담당관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취조를 하는데 그 담당관의 이야기는 "당신들이 이곳에 와서 선한 사업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법을 어겼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봐 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우리 역시 법을 준수해야하기 때문에 봐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취조관의 눈이 얼마나 매서운지, 말도 안 통하고 답답하기가 그지없더라구요. 한 2-3시간 취조를 받는데 옆에 함께 따라온 통역이 있었지만 이 자매도 겁을 먹은 터라 모두가 힘든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취조관이 서류 작성을 해서 우리에게 법을 어긴 사실을 몇 가지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통행증의 문제, 그리고 선교사 내외분은 학생비자로 울란바토르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 일행 가운데 몽골인 한 자매는 주민증을 안 가져왔기에 국적 불명으로 다 법을 어긴 결과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무슨 밀수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 먼 한국에서 몽골 동족을 위해 외국인이 와서 사랑을 전하는데 오히려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이럴 수가 있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가 갑자기 치밀어 오르더라구요. 그러나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려야했습니다. 마침내 이 취조관의 결론은 오늘은 나갈 수가 없고 내일 더 검사를 받고 구류를 살든지 아니면 벌금을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참 난감합디다. 긴 침묵이 일어나고 우리를 취조하던 방밖이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할 때 이 취조관이 무언가 깊이 생각하더니 입을 여는지 통역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이 강하기는 강한가 보다고 하면서 당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면서 조금 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법을 어기지 말라고 하면서 각자의 이름을 쓰고 거기서 내준 서류에 서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다른 이유에서 놀란 것이 아니라 언어도, 모든 것도 통하지 않는 러시아 국경에서 그들의 처분대로 구류를 살든지, 벌금을 물든지 해야 하는데 두 세시간 동안 살기 등등한 고압적 자세를 가졌던 군인이 어떻게 저렇게 부드러워질 수가 있는지...,

저는 지금도 그 상황을 인간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더라구요. 갑자기 눈물이 핑 돌드라구요. 고생고생해서 온 보람이 헛되지 않았고, 하나님도 당신의 이일을 기뻐 받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는 밤길에 덜컹거리는 차안에서도 그 수비대장의 이야기가 잊혀지지가 않아요. "당신들이 믿는 신이 강하기는 강한가 보다고 하면서 당신들의 기도가 이루어졌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눈에도 그 하나님이 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외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나의 속사정을 너무나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에 약한지, 왜 불안해하는지, 왜 자주 넘어지는지, 왜 울고 있는지, 왜 기가 죽어 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우리 역시 연약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국경 수비대의 파견대장의 고백처럼 자신의 모든 권한으로 우리를 법적인 조치를 하기를 원했지만, 그래서 여러 시간 동안 우리를 불안에 떨게 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도 당신들이 믿는 신은 강하다면서 우리를 풀어주었겠습니까?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우리를 조사하면서 하나님의 간섭 앞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를 풀어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성도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평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갑니다.

이제 그 주님의 품에 안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지금 여러분에게 있어 오늘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의 삶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 고백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그리고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다면 이 시간에 묻고 싶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셨습니까? 예수로 오신 여호와 창조자요 섭리자요 구원자이신 그분을 나의 인생의 목자로 내 마음속에 영접하신 일이 있으신지요?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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