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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또라이’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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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이 ‘영적 또라이’입니다. 저속한 용어가 들어가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시중에 <또라이 제로 조직>이란 책이 있습니다. ‘또라이’라는 비속어가 들어간 책인데도 인기가 있습니다. 저자 로버트 서튼은 스탠퍼드대 경영학교수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그가 쓴 학술논문입니다. 영어로 asshole라는 단어를 썼는데 ‘또라이’라고 번역했지만 직역하면 ‘똥꼬’입니다. 아주 지저분한 녀석이란 뜻입니다.
 
직장에 비열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는 동료나 상사나 부하의 영혼을 갉아 먹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려내야 피해를 피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라이’인가 판별하는 두 가지 테스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와 이야기하고 나면, 우울해지고 비참해지고 기운 빠지고 초라해진 느낌이 드는가? 특히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가? 둘째는 주로 힘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추악한 성질을 부리지는 않는가? 이 두 가지 테스트에 걸리면 그 사람은 ‘또라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또라이’는 인신을 공격합니다. 개인 고유의 영역 침범합니다. 함부로 신체를 접촉합니다. 말 또는 몸짓, 행동으로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기분 나쁜 전자우편을 보냅니다. 사람들을 뒤에서 흉보고 모욕합니다.
 
이런 사람이 조직에 있으면 조직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역량을 파괴합니다. ‘또라이’와 함께 있으면 피해를 입습니다. 생산성 저하, 업무 집중 장애, 수면 장애, 불안, 무기력증, 만성피로, 신경과민, 화,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이 책의 저자는 ‘또라이’ 한 사람으로 인한 손실이 1년에 1억6천여만 원에 이른다고 추정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또라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라이는 자신이 또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또라이 행동을 바르다고 느끼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세 번째 비유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앞서 두 아들 비유와 불의한 포도원일꾼 비유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예수님께 시비를 건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 빗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 역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불의를 꼬집고 있습니다. 비유 속 이야기를 보면 잔치에 오라고 청하러 간 종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정말 또라이 짓입니다. 잔치에 가기 싫다고 초대 심부름하는 이를 죽일 필요가 있습니까? 이런 적대행위는 장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을 빗댄 것입니다.
  
그런데 15 절에 정작 비유를 듣고 난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합니다. 예수님을 또라이로 본 것입니다. 또라이 눈에는 또라이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잘못은 못보고 예수님을 트집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영적 또라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에 손님들을 청했습니다. 갑자기 청한 것이 아닙니다. 미리 청첩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종들을 보냈습니다. 잔치에 초대된 이들이 잊지 않고 오도록 다시 한 번 청한 것입니다, 종들이 손님을 직접 모시고 오는 것이 유대의 관습입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하나같이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손님을 청했는데 자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난처합니다. 더구나 아들의 결혼식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먼저 보낸 종들이 심부름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더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완벽한 잔치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임금은 규모 있게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손님들이 구미가 당길 만한 음식들을 차렸습니다. 이 잔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임금의 잔치를 감히 누가 무시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손님들은 하나 같이 이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5 절에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 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농사짓는 일과 장사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 사정은 임금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농사와 장사는 이들의 직업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잔치에 초대받았으면 뒤로 미뤄야 합니다. 그래도 이런 식의 핑계는 낫습니다. 황당한 일이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농사도 아니고 장사도 아닌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핑계거리도 없습니다. 임금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항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군대를 보내서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혼인 잔치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축복하고 기뻐하고 흥이 가득해야 할 잔치가 심판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잔치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잔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손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잔치를 위해 임금은 다시 종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이번에는 길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잔치에 손님이 가득 찼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흥겨운 잔치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잔치를 보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이 저를 불러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준비 없이 들어온 이 사람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잔치에 참여하려면 격식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냥 왔다는 것은 역시 주인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 아닙니까? 이 사람을 손발을 결박해서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졌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했습니다. 이런 처사는 지옥 심판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잔치 초대 비유는 어딘지 현실과 맞지 않는 스토리입니다. 잔치 초대를 살인하면서까지 거절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그렇게까지 심판합니까?
 
그래서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현실의 모순을 이야기에 빗댄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을 알면 이야기의 의도가 분명해집니다. 비유의 메시지는 마지막 14 절에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청함이란 구원에의 초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바쁩니다. 농사를 져야 하고, 장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갈 시간을 아까워합니다.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봅니다.  심지어는 복음 전하는 이들을 잡아 해코지를 합니다. 잡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이들이 무지기수입니다.
 
지난달 4 월에 터키 말라티아에서 기독교 출판사 직원 3 명이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사망자 중에 독일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이 출판사는 성경을 인쇄하여 보급하는 곳입니다. 용의자 4 명을 체포해보니 보수적 무슬림 청년들이었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입니다. 다행히 다른 중동 지역과 달리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기독교 활동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위험합니다. 2 월달에도 가톨릭 신부가 교회 안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터키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중심지입니다. 소아시아의 교회 대부분이 터키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지를 순례하려면 터키를 여행해야 합니다. 수많은 기독교 유적지가 있지만 오늘의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터키는 전역이 거의 기독교 유적지입니다. 그런데 거의 개발이 되질 않았습니다. 터키 정부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엄청난 관광 수입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기독교 성지가 이슬람 국가가 되어서 박해를 받는 곳이 되었을까요? 안타깝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잔치를 자린 임금은 하나님입니다. 처음에 잔치 초대 심부름을 하는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거절을 당해 두 번째 심부름을 하는 종들은 신약의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전도에 무관심한 것입니다. 세상일에 바쁜 나머지 정작 중요한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인 것은 사도들과 크리스천들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교는 기독교 이전에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의 종교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의 등장부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이 첫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많은 전도자들이 줄이어 희생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도하다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교인들로부터 당한 핍박입니다. 유대교는 끝까지 복음을 훼방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교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 심판을 하셨습니다. 임금이 군사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주후 70 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함락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나라 잃은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스라엘이 다시 국토를 회복했습니다.
 
그 다음에 임금은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거부되고 이방인들에게 넘어간 것을 말합니다. 초기 교회는 일부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의 입장으로 볼 때 죄인의 상징입니다. 교회는 그런 이방인들 즉 죄인들을 거침없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정말 교회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도 거짓이 있고 사기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이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아직 은혜를 받기 이전의 사람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아직 세상의 욕정과 죄의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규모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임금이 찾아낸 예복이 없는 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예복은 성도의 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예복은 주인의 초대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기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니 흐트러진 삶을 정도해야 합니다. 맘도 곱게 써야 하고, 선한 일도 하려고 해야 합니다. 남을 도울 줄도 알아야 하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는 것과,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모두 지옥의 심판을 말합니다. 교회를 다녔지만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를 골라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구원은 착한 일을 많이 행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행함이 구원받는데 상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복은 이 행함과 관계가 있는 상징적인 옷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이 예복을 세마포로 표현했습니다.  계시록 19:8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했습니다.
 
예복이 곧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이 한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옳은 행실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믿는 척 했을 뿐입니다.
 
행실은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는 척도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진짜면 행함에 진실함이 있습니다. 굳이 나타내려고 하지 않아도, 자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척 보면 다 아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는 다 구별하십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십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나누십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1-33>
 
누가복음에 나오는 임금의 잔치 초대 비유는 제자들의 전도에 초점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적대자들의 심판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비유를 듣는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산헤드린 공의회 장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 민족의 심판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한편 교회에 이방인들이 가득찰 것과 그 가운데 정한 천국 백성을 가리는 기준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가 온 세계에 세워졌습니다. 이방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유대교와 가짜 크리스천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눈앞에 계신 생명의 구주 예수님을 놓쳤습니다. 사는데 바쁘다고 천국 구원 잔치를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구원 잔치에 초대하는 복음 전도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예복이 없어 심판을 당한 가짜도 어리석습니다. 그는 왜 믿음의 대열에 함께 하지 못했을까요? 왜 여전히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을까요? 왜 선하게 사는 법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건강하게 사는 법을 아십니까? 먹을 것을 가리고, 운동하고, 기쁘게 살면 건강하게 오래 삽니다. 이 건강 상식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과하게 먹고 살이 찝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운동하지 않습니다.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보다는 불평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건강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선한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압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제 욕심껏 망가진 인생을 삽니다. 그 끝이 곧 나타날 텐데 인생이 길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믿어도 태도가 변하지 않는 자, 영적 ‘또라이’입니다. 예복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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