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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벨의 믿음 (창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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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부터 8주에 걸쳐서 모든 믿는 자들의 규범으로 추앙받는 구약의 인물들 곧 아벨, 에녹, 노아, 욥,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을 차례대로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분들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신앙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모범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분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육신은 죽어 진토가 되었어도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컬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앞에서 소개해 드린 분들 가운데 첫 번째 인물인 아벨의 믿음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보면, 1장과 2장은 천지만물의 창조에 대한 증언이요, 3장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4장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 대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맏아들이 가인이고, 둘째가 아벨인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둘 다 장성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마도 형제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살랐을 것이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의 제물을 받으셨고 누구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를 명백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기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으면 자신을 살펴 회개해야 할 터인데도 가인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분하여 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꿈틀대고 있는 것을 아시고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뉘우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께 거부당한 책임이 마치 아벨에게 있는 것처럼 동생을 미워한 나머지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이로써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패역함은 비단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시침을 떼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가인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이제, 아벨이 가진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성경에는 언급이 없지만,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제사하는 법을 계시 받아서 그 자식들에게 전수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사람으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타락 전에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직접 말씀을 나누었고, 타락 후에는 ‘여자의 후손’ 곧 구세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비록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계시해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가 받은 계시를 그 아들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아벨은 계시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정해진 법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제 생각에 좋은 대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제사 드린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곡물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가인이 바친 제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그가 바친 제물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아울러 거부하셨고,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을 아울러 열납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사 드리는 자와 제물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바친 것은 그가 계시에 근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이로 인해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으나 가인은 불의한 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아벨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가인은 불신앙자였습니다. 여기서, 아벨은 신본주의를, 가인은 인본주의를 대표합니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신앙의 불변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반면에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들이 만든 기준에 따라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아벨과 가인처럼 양편은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믿는 것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는 예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믿어왔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방금 제가 설명한 내용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 사상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다원주의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기준과 가치를 부인하고 다양한 기준과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야말로 기준이 수도 없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준이 없어졌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전통적으로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간에는 결혼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성이 달라야 배우자로서 자격이 있습니다. 결혼의 가장 큰 목적은 자손을 낳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요구가 거셉니다. 구미에서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나라가 하나 둘 생겨나는 실정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고 혹 있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일이 현대에는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또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법원이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의 성별을 결정해 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남자냐 여자냐 하는 문제는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법원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판사가 남자를 여자라고 판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현대는 그런 일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겉모양만 여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남자의 본질이 여자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빙자해서 법원이 그 같은 판결을 내리고 사람들은 그러한 법원의 판결을 환영하고 받아들입니다. 만일 누가 이런 결혼을 보고 괴이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기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현실로 일어나는 것은 기준과 가치가 다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원주의는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종교다원주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사상은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목적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이슬람교나 무속이나 할 것 없이 같은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여러 가지 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서울 가는 길이 여러 개가 있듯이 말입니다. 지금 종교다원주의가 종교 화합이라는 미명 아래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 불교 계통의 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 기독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와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전번에 대학교에 가서 한 말은 실수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그 목사님이 그런 자리에 가면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목사님은 종교 간의 화합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 종교 간의 화합을 거부하는 융통성 없는 종교인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발언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언동은 무슨 이유에서건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가인의 길을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시내산 아래에 일 년 가량 머물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들어 성막과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성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하다가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죽고 말았습니다(레 10:).

아마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에 향을 사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불을 어디서 가져오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가인이 곡식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린 것은 나답과 아비후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인은 종교다원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아담에게서 전수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양의 첫 새끼를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지지할지라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어긋나면 멸망의 길에 불과한 것임을 아시고 아벨처럼 계시에 근거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열납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아벨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사할 때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이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반드시 제물의 피를 바쳤습니다. 물론, 소제라고 해서 곡물이나 향료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독립적인 제사라기보다는 번제를 드릴 때 부수적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이 있었는데, 이 모든 제사에는 제물의 피를 반드시 바쳐야 했습니다. 피를 바친 것은 모든 제사가 속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제사를 드린 것은 피를 제물로 바쳤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물의 피를 요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제물은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되었습니다. 레위기 1장을 보면, 번제를 드리는 법이 나옵니다. 백성이 제물로 바칠 소나 양을 성막으로 제사장에게 이끌어 오면, 먼저 그 백성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죄과를 짐승에게 전가하는 의식입니다. 그런 다음, 그 짐승을 잡으면,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리고, 그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단 위에서 태웁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는 반드시 피를 바쳤는데, 이는 생명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나 양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제물로 바쳐진 짐승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아벨이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죄를 대속해 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벨은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는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 곧 사단을 멸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여자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지속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이후에,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 때로부터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써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짐승의 피를 바치는 제사를 폐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대속의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타종교들은 대속에 대한 개념조차가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목숨을 희생물로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고 했습니다. 방금 소개한 말씀 속에 나오는 어린양은 곧 유월절 어린양을 가리킵니다(고전 5:7).

유월절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을 시작으로,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악질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등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렸으나 바로는 여전히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일 년 된 수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집안에 머물렀습니다. 그 밤에 히브리인들은 무사했으나 애굽인들은 집집마다 장자가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2)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출 12:) 유월이란 ‘죽음의 재앙이 건너갔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피를 문에 바른 히브리인들은 죽음을 면하였으나 애굽인들은 장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때 유월절 어린양은 히브리인들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유월절 어린양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기에 그를 믿는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런 점에서, 아벨이 어린양을 제물로 바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바라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양이 아닌 실제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니 아벨보다 더 복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아벨의 믿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믿음입니다.

아벨이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인과 마찬가지로 아벨의 제물도 열납되지 않았더라면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워하기는커녕 동류의식을 갖고 친근하게 대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으므로 형제 살인이라는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벨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3장 12절에 보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1)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벨이 의로운 자였기에 가인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한 신앙을 지켜나가려면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벨의 경우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인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무슨 악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는 달리 진실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굳게 먹고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하셨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 주님께서 지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을 올바로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가 가족의 핍박인 경우도 있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 형제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은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 후대의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믿음은 오늘도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도리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가인의 사상인 인본주의와 종교다원주의가 활개 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아벨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믿음,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가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아벨처럼 진실한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께 열납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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