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 어둡고 캄캄한 밤을 통과하자! (요 13:7)

  • 잡초 잡초
  • 302
  • 0

첨부 1


이 어둡고 캄캄한 밤을 통과하자!
요한복음 13:7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은 시대와 역사와 장소를 초월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믿어야 할 사람들의 믿음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은 언제나 불고 있습니다.  문제는 믿는 사람들의 돛이 내려져 있기 때문에 그 기적의 바람을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나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는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믿음의 돛을 높이 올리십시오.  그래서 이 땅에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역사의 주역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우리 모두는 구도의 길을 잃어버리므로 환상적 인격, 다시 말해서 거짓된 나로 그려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편안히 예수를 믿으려는 마음들이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런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거부하고 이 땅에서의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헌신을 외면하는 사람은 주님의 참된 제자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는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로 주일마다 가득가득 찹니다.  대접받는 것은 좋은데 헌신은 귀찮습니다.  주일 교회에 와서 옷에 먼지는 붙이면서 손에 물을 적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썩어져 가는 세상을 구원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하룻길을 가고서야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 하룻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 여정은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하룻길 나그네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나그네길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마음 깊은 곳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릇 우리가 주님의 제자일진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수들 가운데 실지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입만 벙긋하는 가수를 가리켜 '립싱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이 립싱크 가수를 가리켜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붕어"

가만히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 주위에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에 실천이 없는 립싱크 교인, 금붕어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거부하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 하는 사람은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립싱크 신앙, 금붕어 신앙으로는 결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날 이를 갈며 슬퍼하기 전에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온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이 그것을 찾기 위해 불을 켜들고 밤새도록 방을 쓸고 또 쓸 듯이 오늘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을 찾으려고 깊은 곳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때묻은 것을 다 씻고 성서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철학이나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삶의 영적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갖고자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제할 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땅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욕심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아도 그 눈에 욕심이 더덕더덕합니다.  그 입술에 이생의 자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다같이 성령의 능력으로 속정을 끊어 보십시다.  우리 다같이 탐욕을 버려 보십시다.  성경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여기에서부터 난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 모두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시대의 모든 심령들을 향하여 외치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그래야 내 가정이 삽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살고, 이 민족이 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육신의 욕심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성령을 따라 사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에 자신의 몸에 거룩한 흔적인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새 생명이 태어날 때는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격심한 이 고통이 이 땅 위에 한 생명이라는 기적의 씨앗을 가져옵니다.  영적인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얻은 생명, 이것이 믿는 사람의 탄생입니다.  모든 믿음마다 이 해산의 고통을 다 겪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자랑스러운 고통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몸에 이 새 생명의 고통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크게 자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과 함께 여지없이 떠내려가고 맙니다.  사실 죽어서 떠내려가는 고기에게는 전혀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이 고통이 산 자의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혹여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있을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나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은 믿음의 여정을 향한 열정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그 길이 바로 골고다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아픔의 상처 속에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픔의 순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아픔처럼 사람을 성화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골고다 그 언덕 위에 인류를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쳐다보십시오.  몸부림과 탄식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에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픔이 있는 신앙, 아픔이 있는 예배, 아픔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구도자는 아픔의 상처가 클수록 영적 성장도 큽니다.  믿음의 여정에 나타나는 상처는 기적의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신앙의 돛입니다.  예수의 흔적인 스티그마의 상처는 불행이 아니요 손실이 아니라 믿는 이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진주 조개가 자신의 상처 속에서 진주를 갈고 닦아 만들어내듯이 영적인 생명은 스티그마의 상처에서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진리의 빛이 나타납니다.  그 상처가 나타날 때 하나님이 그 생명을 축복하시고 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살리고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소리, 그것은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들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 시간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귀를 막고 깨끗함과 순수함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능력 가운데 가장 위대한 능력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무엇을 보려고 나왔습니까?  무엇을 들으려고 나왔습니까?  좋은 말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오늘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은 타고난 기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그것도 진리를 찾는 훈련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훈련이고, 신령한 것을 찾는 훈련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의 모든 불안과 절망을 치료하는 해독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성경의 인물 가운데 사도 바울 만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자신이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지 못한 자신임을 고백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나님의 은혜….  그렇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반드시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시위하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모든 삶의 역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사실 눈을 뜨고 자세히 보면 이 사회는 한 개인이 설 수 있는 땅은 마련해 주지만, 그 땅에 버틸 수 있는 힘까지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기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여호와의 신으로 생명마다 권능의 채움을 받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외적인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자세요 태도입니다.  인생 여정에서 만나는 역경은 다른 행복을 위한 디딤돌입니다.  삶의 고통은 기쁨을 낳기 위한 산고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결코 슬픈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인생을 버려 두지 마십시오.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믿음을 붙들려는 사람, 또는 믿음을 붙들고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들에게 끝없이 일어나는 삶의 질문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인간을 징계하실까?  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실까?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사랑은 한 생명을 향한 그 훈련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에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사랑의 하나님이 그 자녀를 훈련할 때에 때로는 전혀 이해하기 어렵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쪼록 이 소란한 세상에서 때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훈련을 꼭 참고 붙들고 나가십시오.  삶이 나를 곤고하게 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신뢰하십시오.

사랑은 숨겨진 훈련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린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하는 대로 놔두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부모가 그 생명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어린 생명이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훈련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선수는 뙤약볕에서 뛰기를 싫어하고 훈련받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코치는 초등학교 4, 5학년의 어린것들에게도 무서운 훈련을 시킵니다.  그 훈련의 양 속에서 세계 정상의 자리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코치는 훈련의 장래를 보고 있지만 선수는 지금의 고통만 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에게 일어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지만, 우리 미련한 인간들은 지금 나에게 나타난 고통만 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 순수한 사랑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핵심 내용은 훈련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라"(사 64:8)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그런데 진흙이 토기장이의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어린 자식이 사랑으로 훈련하고 징계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미련하고 연약하고 우둔한 인간은 때로 하나님의 징계와 사랑과 훈련의 매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권면은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 징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비록 그가 어둡고 캄캄한 밤을 지날지라도 찬송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길에서 지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훈련, 하나님의 징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는, 혼란과 혼돈의 훈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늘 안전한 것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늘 현상 유지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활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풍요와 위로만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고난이 없으면 인간은 결코 분발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안정과 풍요만을 즐기려 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역사를 위해 계속 분발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에게 임한 이 명령은 삶에 대한 대단한 혼란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은 풍요와 안정된 이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실까?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믿는 자에게 계속되는 일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천신만고 끝에 100세에 아들을 하나 주시더니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이제는 그 아들을 나의 제단에 재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대단한 혼란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은 때로 삶에 엄청난 혼란을 줍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백주 대낮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밑에서, 그것도 산 정상에서 '이제 너는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때는 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때입니다.  더구나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다니.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대 혼란이요, 혼돈이었습니다

야곱도 보면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축복의 안수를 받았는데 부모님의 품에서 좇아냅니다.

모세는 자기 생각에 의롭고 좋은 일을 했는데 하나님은 삶의 근거지를 파괴시키고 미디안 광야로 좇아내는 대단한 혼란이 왔습니다.

요셉은 하루 아침에 큰 혼란의 길에 빠져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는데 결국에는 누명을 쓰고 지하 감옥에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를 따라서 이렇게 외치십시다..
"지금은 이 삶의 혼란을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이것도 이기고 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과정이리라"

두 번째로,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것은 어둡고 캄캄한 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생애의 삶에는 언제나 태양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또 태양만 비추어 주겠다고 어디에도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주여! 1년 내내 평강의 태양만 내려 주옵소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1년 내내 태양만 비취면 결국에는 사막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우려면 구름도 있어야 하고 어두움도 있어야 합니다.  비도 있어야 하고 햇빛도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틀림없이 어두움의 시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빛은 흑암 중에서 더욱 귀하기 때문입니다.  장마 후에 햇빛과 무지개를 본 적이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형편없어도 오늘 주일예배에 와서 은혜의 단비가 내려 내가 언제 넘어졌더냐 하고 파릇파릇 일어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것은 실망과 낙심의 훈련입니다.

자식을 잘 기른 부모나 민족의 후대를 잘 기른 그 부모는 자식이 달라는 것이 있다고 다 주지 않았습니다.  자식 앞에서 인색한 부모가 자식을 잘 키웠습니다.  동물원의 호랑이를 보십시오.  울면 먹이를 주니까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호랑이는 들판에 내놓은 사냥개만도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다 채워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이 왜 불공평하게 인간을 다루실까?
왜 누구는 간단히 용서하시고 누구는 그렇게 길고 큰 고난을 계속 하실까?
왜 못된 사람들이 저렇게 날뛰고 있는데 공의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고통 중에도 침묵만 하고 계실까?
이렇게 불평등한 대접을 받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계속 따라가야 할 것인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지금 실망과 낙심과 불평등과 불공평의 훈련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은 최고의 불평등한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귀로만 듣던 믿음의 역사를 눈으로 증거한 사람입니다.  욥기 1장 8절을 읽으면 할 말을 잊고 맙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이런 사람도 실망과 낙심의 어둠과 답답한 하나님의 특수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욥이 받은 훈련은 대개 3단계로 옵니다.

첫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자식을 잃고 맙니다.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하루아침에 10명의 자녀가 죽었습니다.  둘째는, 재산을 잃고 삶의 근거가 무너졌습니다.  셋째는, 자신의 건강마저 잃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속이 깊지 못한 아내는 욥과 함께 불공평한 하나님의 훈련을 참고 견디기 어려워 "당신은 차라리 하나님을 실컷 욕이나 하고 죽으라"고 저주하면서 떠나갑니다.  막 가는 이 부인의 모습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지성의 지배나 이성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감정을 묶어야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전쟁의 전쟁터는 마음과 생각과 입인데, 인품이란 자신의 감정을 그 입술에 싣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당하는 고통보다 말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거두어들이지를 못합니다.

보십시오.  욥은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밤에 입으로 저주하는 아내를 향하여 이렇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도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는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인류 역사에서 욥보다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징계나 훈련을 받을 때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둘째, 주의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셋째, 징계를 받는 자라야 하나님의 참 아들이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 거룩한 훈련에 참여케 하신다.
다섯째, 그 훈련과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는 열매가 있다.
여섯째,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키고 성령의 권능을 부여잡고 이 모든 훈련의 과정을 통과하라.

어둡고 캄캄한 밤을 통과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주님의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여, 하나 밖에 없는 이 생명, 가정, 민족의 앞길에 복을 주옵소서.
주여, 이 어둡고 캄캄한 밤을 신령한 능력을 힘입고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