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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위일체주일] 믿음, 소망, 사랑 (롬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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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소망, 사랑
본  문  :  로마서5:1-8

오늘의 교회력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2세기 후반의 교부 터튤리안(Tertullian)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주일이 교회에서 지키게 된 것은 주후 800년 경이라고 하는데, 1334년에 로마의 교황 요한22세가 삼위일체주일을 공포하면서 성령강림주일이 지나고 그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가장 당혹스럽게 생각하는 교리가 있다면 삼위일체입니다.  대부분 성도들이 세 분의 하나님이 한 분이 되시고, 한 분의 하나님이 세 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분의 하나님이 세 가지 얼굴을 가지고 독특한 역할을 담당하는 그런 삼위일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 시대에는 창조의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 시대에는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교회의 시대에는 신자에게 임재하시는 성령으로, 이것은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했던 사벨리우스 이단, 양태론 이단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아타나시우스 감독은 삼위일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종성박사는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세 위격 안에 있으며, 각 위격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일하며, 동격이고, 동등한 것이다.  셋이 하나로 존재하면서 그 셋이 독자적인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김명용박사는 조직신학자로 “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 사상”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자고 삼위일체 신학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삼위일체라고 할 때에, 먼저 삼위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삼위라는 말은 분명히 인격적으로 다른 세 분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삼위 하나님이 동시적으로 나타나시거나 언급된 말씀들이 많습니다.  마태복음29:19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마태복음의 말씀을 따라 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후13:13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은혜와 사랑과 교통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 이것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 세 분 하나님이 한 자리에 나타나시었습니다. 마3:16-17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근거가 된 말씀입니다.  세례 받으시는 주님이 계신데, 주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성령이 임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똑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똑같다면 한분만 계셔도 되는 것입니다.  성부가 성자도 되고, 성령도 되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신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보혜사로 우리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도 되고, 성령도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인격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부가 성자라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라는 말이 되기에 성부 수난설은 이단으로 정죄한 신학입니다.

교회가 채택한 니케아신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니케아신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과 위엄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명시한 신조입니다. 

그 후에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를 받으실 주님이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하면 삼신이냐 하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신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신학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 신이 아니고, 하나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빌립에서 설명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요14:7-11)고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고 하니까,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는 곧 성부라는 말이 아니라, 성부는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요, 함께 계시기 때문에 셋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이 하나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라고 말하지 말고, 세 분이신데, 하나로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신 교부들은 삼위의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관계를 “페리코레시스”라고 하였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상호 침투하여 거하시며 존재하시는 방식을 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분의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유대교의 전통을 받아 유일신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십계명 중에 1계명을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알았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고 하셨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창조주요, 구원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우리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기름 부어 보내신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가 초월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실 수 없고, 그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가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이나 놀라운 일들이 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리시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을 기록할 때부터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어도 세 인격의 하나님이 한 분으로 존재하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세례를 베풀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정착되어 갔습니다.  그래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교리라고 도전을 받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학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4세기에 들어오면서 군주신론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는 본성적으로 신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이 주어져서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런 모습과 결과를 보면서 예수는 신이 아니라, 신적 존재라고 하여,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야웨 하나님만이 본체를 가지신 존재이고, 아들이나 영은 본체는 가지지 않고 형용사적으로만 하나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 대신에 2위 일체를 주장하거나 성부의 수난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다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오늘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아들과 성령이 없는 하나님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 아들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는 아들을 보내어주신 아버지와 아들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보내어주셨고, 영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아들 안에 나타나신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단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지의 공간일 뿐이며, 말없는 심연이라고 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 하늘에 있는 두려운 존재에게 빌었던 하늘님에 불과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없는 성령이란 단지 영적인 기운이나 고상한 영성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분명히 세 분이지만,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나 교류도 없이 독자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펼치는 그런 삼 신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희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 성령의 사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삶을 말씀하는데,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은혜 생활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들이 중요한 진리의 말씀이지만, 오늘의 본문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신앙의 중요한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 가지는 평화와 은혜, 즐거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은 의롭고 선하신 분이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의롭다고 하는 선언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계에서 누리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롬5:1에서는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신칭의를 설명하던 바울은 지금까지 설명한 말씀에 근거하여 그 결과를 말씀할 때에 “그러므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59:1-2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실 때에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은 불안하였습니다.  하나님이란 말만 들어도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화평 ”새번역에서는 “평화”라고 하였고, 여러 영어성경에서는 “Peace”라고 하여,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 더불어 가지고 누리는 평화를 말합니다. 

이런 평화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시고 화목제물이 되셔서 가능해진 일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연약하였고, 경건치 못하여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고, 심지어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분신이신 아들을 내어주실 때에는 원수와 같이 여기던 죄인이라고 해도 아들 안에서라면, 아들과 함께 온다면, 아들이 그를 보증한다면, 아들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다 용서해주고, 과거에 지은 죄는 물어보지도 않고 간과하시고, 넘기리라고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때에는 정말 큰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하나님과의 조화, 자신과의 조화, 다른 사람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면서 그 모든 조화가 깨어지고 부조화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나 자신과도 평화를 누리고,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서 자연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것으로 그치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 안에 들어감을 얻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은혜 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 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 당당히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엡3:12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부끄럽게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았습니다. 

3-5절의 말씀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환난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환난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가져오고 인내는 성숙한 인격 곧 연단을 가져오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감동을 주십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인내하면서 하늘을 소망 삼게 하시는 그 힘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요,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십니다.

6-8에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세상에는 선인을 위하여, 의인을 위하여 죽는 일이 간혹 있다고 하는데, 버림받아야 하고, 정죄 받아야 하고, 심판받아야 하는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의심이 일어납니까?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주님이 계시고, 성령도 계시는데, 주님이 역사하실 때에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하심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들과 성령을 보내어주셨고,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은 전도지에 들어가는 말씀이요, 안 믿는 이들에게 전도할 때에 주로 사용하는 문구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s)라는 12권의 책을 쓰신 사람입니다.  독일의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12권의 교의학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이때에 바르트는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씀이요, 신학과 신앙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린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 됩니다.  누리자, 누리고 있다는 말은 즐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돈이 아무리 많아도 누릴 줄 알아야 됩니다. 

“구두쇠의 금덩이”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돈만 보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구두쇠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 줄은 알았지만 쓰는 기능은 아예 마비된 구두쇠였습니다. 구두쇠는 돈으로 금을 사서 매일같이 그것을 만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도난을 염려해 금덩이를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금덩이를 모두 꺼내가고 말았습니다.  구두쇠가 매일 같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으니 멀리서 보고 훔쳐간 것입니다.  구두쇠 영감은 금덩이가 없어진 것을 안 구두쇠가 통곡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그를 위로했습니다.  “친구, 이미 지난 일일세. 잊어버리게.” 구두쇠의 하소연입니다.  “모르는 소리 말게.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모은 것일세.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친구의 충고입니다. “정 그렇게 억울하면 금덩이 대신 돌멩이를 구덩이에 채워놓게. 어차피 사용하지 않을 물건이지 않은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고, 소망을 주셨고, 사랑도 주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믿음에서 은혜로 들어가게 하시고 하늘의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소유하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하는 믿음, 하늘을 향한 소망,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움직이고 활동해야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의 부요함과 튼튼한 소망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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