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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자 예수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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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 무디가 어느 주일, 교회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한 거지 소년이 교회에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고 안내를 맡은 직분자들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무디가 그 소년에게 다가서자 직분자들이 만류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얘는 안됩니다. 예배분위기가 훼손돼요. 들여보낼 수 없어요.”

그러나 무디는 그 거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의아해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무디는 강대상 위에까지 그 소년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설교시간 무디는 그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소년은 입장불가였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오니까 성전안만 아니라 이 강대상 위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죄인인 모든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남루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들을 안고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가셨습니다. 이 소년이 입은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날 성도들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구원에 대한 감동과 감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요한복음 3장16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간략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그래서“작은 복음서”또는“신약의 요절”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귀한 복음에 이어서 본문에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므로 멸망 받을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이 믿는다는 조건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허락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넓은 바다위에 빈병 하나가 떠 있는데 이 병의 마개가 꼭 닫혀있다면 그 병은 아무리 오래 동안 바다 위에 있어도 그 병 속에는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넓고 커도, 그 사랑 속에 묻혀 산다할지라도 자신이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나와 아무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효력은 믿어야 생기게 됩니다. 사람과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그를 사랑해도 그가 내 사랑을 믿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비틀어져서 더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로, 돈 많은 집 딸은 자칫하면 노처녀가 되기 쉽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가 있어도“유산이 많으니 나보다 돈을 더 사랑해서 청혼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일단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을 때만 사랑이 됩니다. 사람의 사랑이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一. 예수님은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본문 17절 말씀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이처럼”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는 복 가운데 가장 귀한 복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나오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도해서 병 낫고, 사업이 잘되기 위함입니까? 그 밖의 소원 성취입니까? 아닙니다. 가장귀한 축복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데 있습니다. 죄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신분을 얻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복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다면 이보다 더 귀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경을 헤매는 사람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짧은 생애의 생명도 이토록 소중하다면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더 소중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고 하셨습니다.

二. 예수님은 심판의 기준이 되십니다.

본문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날이 옵니다. 그때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선행일까요? 도덕생활일까요?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한 고행일까요? 심신을 단련한 수양일까요? 지식일까요? 재산일까요?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 하는 이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예수 믿는 일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일인데, 불신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없이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3초 내에 3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일주일 전부터 미국은 가공할만한 살상무기인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그 말을 믿고 멀리 피신한 사람들은 모두 살았으나 그 말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참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날이 있음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0~14에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최후의 심판을 면하는 단 한 가지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三. 예수님은 정죄의 기준이 됩니다.

본문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 죄인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그가 얼마나 선하냐, 아니면 악하냐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 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앞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10-1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에 비춰볼 때 의롭게 보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행동으로 나타난 죄가 아니라 생각과 양심을 기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죄의 값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사람에 한하여 하나님은 의롭다고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면 죄의 근본이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먹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은“죽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의심하고 사탄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의 심령 속에도 아담과 하와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사탄의 속삭임은 잘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곧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로마서 6:1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므로 의의 종이 되어 정죄함을 받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四. 예수님 앞에 두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빛의 사람과 어두움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20~21절에 말씀하시기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나라”하셨습니다.

1. 빛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본문 20절)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의 사람 즉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빛을 싫어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싫어하여 나무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범죄 한 사람의 심리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기고자 어두운 곳을 찾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범죄자들이 은신하거나 체포된 자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고자 옷을 뒤집어쓰며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어두움에 처해 있는 심령들은 빛의 자리인 주님의 몸 된 성전을 멀리하게 됩니다.

2.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빛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본문 21절) 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합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늘 가까이 합니다. 빛을 가까이 하면 어떤 결과가 있어질까요? 엄동설한이라도 햇빛이 비취는 양지바른 바위틈에는 진달래꽃이 핍니다. 이처럼 사람의 심령도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하면 그의 가슴이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상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의 가슴은 따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멀리한 사람의 심령은 싸늘합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어느 일본인 성도는 겨울에 집을 팔고 이사를 떠나면서 그 집에 이사 올 사람을 생각하며 배려한다고 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이 집에 이사 오는 사람이 추위에 떨 것을 생각해서 작은 난로 하나에 불을 피워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새 난로에 기름을 가득 채워두면 이사 올 사람이 부담스럽게 느낄까봐, 버려도 아깝지 않을 난로에 적당한 량의 기름을 부어 불을 피워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성도의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고려하는 마음, 이것이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범죄한 우리 인간들의 멸망 받을 딱한 처지를 생각하셨기에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또한 빛과 열은 멸균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빛과 열로 소독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면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사악한 죄악의 세균이 멸균되듯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10대 해방자”라고 하는 선교단체를 이끄는 세익 게이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3때부터 마리화나를 피우기 시작했고, 아편을 맞는 마약사범으로서 비용을 대기 위해 차량 절도는 예사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텔레비전, 비디오, 다이아몬드 같은 것을 홈쳐내어 17세 때 전과가 벌써 17범이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아버지가 17세 때 16살 처녀에게 장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신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아버지는 어떻게든지 아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려고 기도하던 중, 고향에 부홍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헤어진 며느리를 데리고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저녁에“심판”에 대해서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아들도 며느리도 예수를 믿고 완전히 새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들은 신학을 공부한 후, 부흥사가 되어 14년간 50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많은 청소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마약을 끊고, 훌륭한 인재가 되게 함으로써“10대 해방자”라고 하는 선교단체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을 때 사람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11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기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죄의 기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 십니다

우리는 이토록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하며,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며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참된 삶의 보람과 인간다움이 있습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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