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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방주로 들어가라 (창 6: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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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것이 성경의 평가입니다. 노아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소명 받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경건한 조상의 슬하(膝下)에서 태어났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안식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주는 자가 그 아이의 양육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에게 “그 아이를 예수라 하라”고 한 것은 요셉에게 양육권을 부여한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자식의 이름을 작명함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믿음과 소망이 그 자식의 이름에 표현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이름으로 볼 때 그의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노아가 살고 있었던 시대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죄악이 극에 달하고 악이 성행하여 여호와께서는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한다고까지 하셨습니다(창 6:5-6).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창 6:8).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극에 달하여 갈 때 노아에게 세상 심판을 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방주(상자모양의 배) 공사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노아는 120년에 걸쳐 이 공사를 마쳤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에 홍수를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18절에 ꡔ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ꡕ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했습니다.

  Ⅰ. 오직 하나뿐인 방주입니다.

  본문 6장 18절에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했습니다.

  "그 방주"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들어가는 방주는 여러 척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 방주’라고 지적하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주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눈으로는 홍수의 징조가 전혀 없을 때 지은 방주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감탄이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지은 그 방주로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왜 그 방주에만 들어가라고 했습니까?

  1) 그 방주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장 19절에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물로 가득하여 생명 있는 것들의 종말이 임할 때 생명을 보존하여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방주뿐이기 때문입니다. 살기로 작정된 노아 가족과 생축들은 그 방주에서만이 생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방주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영생계시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방주 안에는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허락되었습니다.

  2) 그 방주에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7장 22-23절에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니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방주 밖에 있는 것들과 방주 안에 있는 것들의 형편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것들은 남았고 방주 밖에 있는 것들은 쓸어버림을 당했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3) 그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시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ꡕ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주 안에만 구원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 외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는 살아남는다는 영생계시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당한다는 영벌계시입니다.   


  Ⅱ.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방주입니다.

  확실히 이 방주는 공개되어 있으나 그 속으로 들어가서 생명과 구원을 보장받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누가 들어가는 방주입니까?

  1) 은혜를 입은 자만이 들어갑니다.

  창세기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ꡕ는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의 경건한 신앙생활은 그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시대에 그도 타락한 존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노아의 인간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노아를 통하여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만이 그 방주에 승선할 수 있습니다.

  2) 의인만이 들어갑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인"(이쉬차디크,은 ‘올바르게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무죄하거나 혹은 혐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올바르게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3) 완전한 자만이 들어갑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당세에"라는 말은 ‘노아와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 시대’를 일컬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는 노아의 완전함이 상대적 개념의 평가이지 절대적 개념의 평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롬 3:23). 따라서 비록 노아가 세상 죄악에 노출되어 위험하기 짝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연약하여 죄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에 의지하여 다시 거룩한 생활을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의인이 못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의인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4)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만이 들어갑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의인이라 칭함을 받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불려진 뚜렷하고 유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혈육 있는 것들이 강포하여 타락하였어도 그만이 유독히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고 절대행동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노아와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5) 언약의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창세기 6장 18절에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인간과의 불변의 계약을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ꡕ라고 했습니다.

  심판의 소리는 널리 퍼졌으나 결국 노아와 그 가족에게만 주어진 제한된 구원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그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야만 하는 방주입니다.

  6)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만이 들어갑니다.

  본문 6장 22절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7장 7절에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7장 13절에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에 ‘그날’, 홍수가 시작되던 날 이전에 이미 방주에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120년 동안 방주 공사를 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홍수가 오기도 전에 이미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뜻)이라고 할 때 순종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순서만이 있을 뿐입니다. 


  Ⅲ. 방주는 신약 교회의 예표입니다.

  창세기 6장 18절에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했습니다. 
  "그 방주"라는 말 ‘엘 하테바(’는 2인칭 단수로 ‘너의 집’(your house)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예비한 나의 집이라 하지 아니하고 내가 예비한 너의 집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120년 동안 건조된 방주를 보면 배의 구조는 항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추진력이나 제동장치가 없는 상자모양으로 되어있습니다.

  방주는 그 기원에 있어서 신적인 근거를 가졌다는 의미에서는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요 10:15-16).
  방주는 그 기능이나 효용적인 면에서 구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교회를 예표하고 있습니다(행 2:47). 

방주가 완공되기까지는 심판이 오지 아니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세상 종말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14). 

  방주의 운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교회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분도 하나님 자신입니다(요 17:15-16).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은 너는 너의 가족들과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Ⅳ.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야 하는 방주  입니다. 

  본문 7장 1절에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너와 네 온 집"(아타 웨칼 베트카, )을 직역하면 ‘너와 너의 모든 식구들’은 입니다. 또 직역하면 ‘왜냐하면 너를 내가 보았는데 내 앞에서 의로운 것을 이 세대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왜냐하면’ 이라고 할 때 ‘키()’는 이유를 묻는 접속사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의로움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받은 칭의입니다. 의로움을 입은 노아가 데리고 함께 가야 될 가족입니다. 노아는 자신의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데리고 가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을 때 여호와의 천사들이 롯에게 말하기를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고 했습니다(창 19:12).

  하나님께서 롯이 멸망 성 소돔에서 속히 도망하여 소알성에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창 19:22). 롯이 소돔성을 떠나 해가 돋을 때에 소알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이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다고 했습니다(창 19:23-24).

  여호수아는 그의 임종을 앞에 두고 그의 유언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에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네 집’ 혹은 ‘내 집’이라고 할 때 좁은 의미는 직계 가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넓은 의미로서는 모든 혈육과 가문 혹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료나 이웃을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산재해 있는 믿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 때문에 온 집의 식구(하나님의 택자)들을 데리고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그 일차적 작업이 온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지금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수용해야 합니까? 이 말씀은 노아가 그 가족들을 이끌고 함께 방주로 들어갔듯이 먼저 믿은 자가 자기 가족을 이끌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이끌고 오라는 책임 있는 전도계시입니다.

  오늘의 의인이 누구입니까?
  오늘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가 누구입니까?
  오늘의 노아가 누구입니까? 먼저 믿은 사람이 오늘의 노아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가 의인이며, 먼저 은혜를 입은 자가 오늘의 현대판 노아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택자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합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우리는 방주를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의 영적 위상 내지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속죄의 보혈을 공급하는 곳입니다. 즉 참교회의 삼대표지인 ① 말씀의 진정한 전파 ② 성례의 정당한 집행 ③ 권징의 신실한 시행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일을 위해서 필요한 거룩한 공간이 교회당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전에 우리의 가족들을  속히 승선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로의 적극적인 초청을 말합니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개인적인 종말이 필연적이라고 감지하면서 살아가듯이 우주적인 종말도 필연적입니다. 사람을 교회로 불러 모읍시다. 교회로 나아올 사람은 나와야 됩니다. 방주에 태우는 작업 즉, 교회로 불러오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가족들이 빨리 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기 전에 빨리 태웁시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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