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롬 1:16-17)

  • 잡초 잡초
  • 432
  • 0

첨부 1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로마서 1:16-17

어느 교회에서 미국에서 음악대학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집사님이 성가대 지휘를 맡아서 성가대원들과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집사님이 성가대원들과 인사를 하면서 성가대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파트입니까?"  "나는 소프라노입니다."  "당신은 무슨 파트입니까?"  "나는 엘토입니다."
그렇게 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하는 가운데 아주 점잖게 앉아서 분위기를 잡고 있는 한 여 성도님이 있어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파트입니까?"  그랬더니 이 여 성도님이 목소리에 무게를 쫙 깔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중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정말로 예수만 믿기로 결단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건지 자신을 믿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신앙적 자세를 버리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중립지대에서의 종교놀이를 하지 마십시오.

간혹 우리는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고 미지근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 믿은지 오래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무감각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외 없이 그들은 교회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새롭게 만나야 될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피 묻은 복음 앞에 녹아지고 깨지는 경험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치기 어려운 병 가운데 하나가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 십자가 복음에 무식한 사람이 앓는 질병입니다.  예수의 공로는 모르고 자기 공로만 드러내고 사는 사람이 가장 심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설교, 회개 설교, 복음 설교를 하게 되면 '다 아는 이야기, 기초적인 이야기하고 있네' 라고 생각하면서 시큰둥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바로 그 사람이 기초가 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무엇보다도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기초가 부실하면 아무리 집을 아름답게 지어도 그 집은 부실한 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기초가 부실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초가 부실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열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초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조그만 바람 앞에서도 휘청거리며 넘어집니다.  기초가 부실한 사람은 혼자서 시험에 들고, 혼자서 절망에 빠집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 주님께서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하십시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믿음이 소유자가 되십시오.  우리가 종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할지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반석 같은 신앙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초가 든든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가 있나요?

무엇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다음으로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로는 헌신이 있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말은 거창한데 실제로 생활에서의 헌신이 없는 신앙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가증스러운 신앙입니다.  자고로 기초가 든든한 신앙의 사람은 헌신이 생활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기초가 든든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주인공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인물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역사가 만들고 사람이 만들고 부모가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에는 자신이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붙들고 자기 자신을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드십시오.  세상에서 자기를 일으키는 사업 보다 더 위대한 사업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를 일으킨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자신 속에 신령한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하늘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소망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사랑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하늘의 영이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호와의 힘을 붙들고 우리 삶에 기적의 기반을 설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음만 붙들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지도자 훈련을 받은 경험도 없고, 군 지휘법이나 특별히 정치나 경영의 경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사회적 경험이라고는 양들을 치는 목동이 유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30세에 유다 왕의 되어 40년 간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그가 믿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붙드십시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거한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믿음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은 '사랑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남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행복하게 삽니다.  어떠한 일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도의 많은 불행이 하나님의 법을 헤아리는데 실패함으로써 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는데 우리 자신이 '사랑을 받는 자'라는 확신을 잃어버리면 믿음이 식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자부심만 있으면 어떤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넉넉히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10년간의 고난 중에서도 사울 왕을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한결같이 사울 왕을 높였습니다.  사울 왕이 죽자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좋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기 믿음이 좋다는 말은 충성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십시오.  믿음으로 충성하십시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교회의 목적은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키우는 과정 속에서 생명력 있게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키우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사람을 키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시대 속에서 존경받는 제자상을 우리들이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 속에서 거룩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도자상을 우리들이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충성스런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일이 많다고 불평하지 말고 지금 즉시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믿음으로 선언할 때에 진정으로 값진 응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 시대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귀한 믿음, 깨끗한 믿음, 남에게 감동을 주는 믿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마다 일마다 묘한 방법으로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시대 속에서 주역이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충성된 믿음을 붙들고 일어나 신앙의 주역이 되십시오.  축복의 주역이 되십시오.  기적의 주역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충성된 믿음으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위대하심을 시위하십시오.

오늘 봉독한 로마서 1장 1절부터 17절까지를 읽어보면 복음이라는 단어가 부려 일곱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이 말은 '유'의 '좋다'는 말과 '겔리온'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음인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가 끝날 즈음에 모든 영국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기면 유럽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패하는 날이면 전 유럽이 나폴레옹의 말발굽아래 처절하게 짓밟히기 때문입니다.  '웰링톤 장군이 패배했을까, 아니면 승전소식을 가지고 돌아와 줄 것인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전보도 전화도 e-mail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전쟁의 결과는 오직 높은 탑 위에 올라가서 알려주는 파수병의 신호로 런던 시민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드디어 수기 신호가 올라가는데 안개 속으로 어렴풋한 글씨가 보여집니다.  "웰링턴 장군이 참패"  온 백성 앞에 처절한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 2시간 이후 안개가 걷힌 다음에 또 다른 한 글씨가 보였습니다.  "웰링턴 장군이 참패시켜 승리하였다!"  이 승전 소식을 유앙겔리온 -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하면 자유인이요 패하면 노예로써 멸망당하던 사도 바울 당시 전쟁의 승전보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 사회적인 개념을 기독교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그를 의지하는 모든 백성을 살려내는 영원한 구원의 소식을 '복음'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로 소화를 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죄함을 얻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나'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몇 가지 진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세상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생명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유일한 진리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그래야 이 다양한 시대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샤머니즘에도 구원이 있다.  힌두교도 괜찮다.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기독교는 독선이요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현대인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 현대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진리는 무한합니다.  내 아버지는 한 분이요, 내 어머니도 한 분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구원의 길도 하나 밖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신부가 목탁 두드리는데 가서 앉아 있고, 절의 중이 성당의 미사에 앉아 있는 것이 통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언론들이 저마다 폭넓은 종교라고 칭찬을 합니다.  멋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보면, 신령한 하나님의 눈, 거룩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들입니다.

우리는 천주교를 인정합니다.  불교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불교로 인정하는 것이지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가 똑같이 천국에 가는 동일한 길이라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입니다.  천국 가는 길도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온 백성이 들어도 좋은 소식, 세상을 기쁘게 하는 소식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명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내용이 로마 시민들을 향해서 외치는 서신이라는데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힘만이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여기서 강자만이 진리였습니다.  승리만이 진리요 살아남는 것이 승리였습니다.  더구나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몹시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유대 땅 나사렛 사람 예수의 사건, 살인 강도와 함께 무기력하게 죽은 예수, 거기서 그들이 외치는 설교는 로마 시민들이 그렇게도 부끄럽게 생각하던 겸손, 사랑, 회개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로마를 향하여 그들과 함께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유앙겔리온 - 승전의 소식은 로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분의 복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말하는 힘, 진정한 능력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폭발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 바울의 이 한마디는 그 당시에 엄청난 선언이요, 충격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 폭탄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반석이라도 폭발시켜 산산조각을 내는 엄청난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로마제국이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 같지만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정복했다고 외치지 말아라.  그들도 병들고 죽어서 결국에는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은 나사렛 예수는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강한 자의 힘으로 핍박과 억압을 일삼는 로마의 가치관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겸손과 사랑과 섬김의 기독교 진리는 영원히 이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복음의 특권을 알고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숨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다가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핍박당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그 무엇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순교적인 신앙입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한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복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과 성령의 능력이 내 속에서 폭발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입니다.  이 복음이 나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립니다.  이 복음이 내가 사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이 민족을 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령 어떤 사람이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하십시다.  식구들은 환자에게 곧 바로 그 사실을 알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주는 일을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알려주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에 전해 주는 데에는 주저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보면, 복음을 이처럼 나쁜 소식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데에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십니까?  왜 그렇게 주저하십니까?  그 이유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의 확신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능력 가운데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가장 자랑스러웠습니다.

나는 이제 지옥 가지 않아도 되었다.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받은 백성, 영원한 생명을 얻은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이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서 수많은 어려움과 생명의 위협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지옥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천당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말은 "죄인을 지옥에서 건져내는 능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천당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굉장히 자존심 상해합니다.  그래서 고상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고상함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고상함보다 더 큰 고상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옥의 백성들이 영원한 천국의 백성들이 되는 것보다도 더 고상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 자기의 행위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신분증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허물이 많습니다.  내 힘 가지고 내 재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신분증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존심을 꺽지 않으려는 태도가 죄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비굴하리만큼 꿈뻑 죽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 앞에서는 떳떳하게 삽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내세울 무엇을 찾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일을 먼저 찾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확신과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이웃을 구원할 열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확신이 있을 때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감격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들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긍지가 없다면 세상의 작은 일들 때문에 금방 쓰러지고 넘어지는 현실적인 종교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될 때에 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옷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시장 거리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거기 한 가게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는 인사할 줄도 모르고 힐금 쳐다보더니 도시락만 먹고 앉았습니다.  속으로는 불친절함에 기분이 좀 상했습니다.  그러나 기왕 들어온 김에 옷이나 구경하고 가자는 마음에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서 아주머니에게 묻습니다.  "아주머니, 이게 면인가요, 나일론인가요?"  "내가 공장장인가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 옷을 지금 입기에는 너무 덥지 않나요?"  "아니, 내가 그걸 입어봤어요?"  "이거 실이 질질 풀리는군요"  "요즘 옷들이 다 그래요"  이래 가지고 이 집이 장사가 되겠습니까?

그 다음 집에 들어갑니다.  별로 살 마음도 없는데 옷을 하나 꺼내들고 살펴봅니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가 아주 날쌔게 달려와서 제게 한 마디를 합니다.  "아이 선생님, 참 좋은 옷을 고르셨습니다.  맵씨와 취미가 아주 고상하십니다.  이 옷감과 색상은 작년에 저희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상품입니다.  선생님께서 입으시면 무게도 있고, 키도 커 보이겠는데요"  무게 있고, 키가 크게 보인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그만 반해 가지고 그 옷을 사들고 옵니다.

보십시오.  장사하시는 분들도 자기 물건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활기 있게 소개를 한다면 손님들의 마음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 가게에는 분명히 손님들로 북적거릴 것입니다.  장사가 잘 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믿는 이 복음, 영혼을 살리는 특효약, 모든 문제를 깨뜨려버리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능력이 왜 부끄럽다는 겁니까?  왜 자랑하지 못하십니까?  복음이 당신을 그토록 부끄럽게 하던가요?  기억하십시오.  복음의 능력은 결코 여러분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재생산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7월 1일, 영혼추수주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