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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오는 사람들 (룻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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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사람들 (룻기1:6-14)

모압에서 잘 살아보겠다고 꿈을 가지고 고향 베들레헴을 떠났던 엘리멜렉의 가족은 타향살이 10년 만에 그 집의 가장과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남으로 그 집에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젊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이렇게 세 여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TV 영상을 통해 사고와 재난을 만나거나 혹은 전쟁터에서 졸지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오열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우리를 두고 먼저 갔느냐고 울며 몸부림치다가 지쳐 실신하는 유가족들의 안타까운 광경도 있습니다.  유가족은 말 그대로 남겨진 가족입니다.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외국에 남겨진 나오미는 비록 그곳에서 얻은 젊은 며느리들이 있었지만 남편을 잃은 세 여인들끼리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고 또 아들들이 없이 며느리들만 바라보며 외국 땅에서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홀로 된 나오미가 깊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마침 고향 베들레헴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남겨진 사람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엘리멜렉 집안의 여인들을 은혜의 불씨처럼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소망의 불꽃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낙심 속에 살던 나오미에게 고향으로부터 온 소식은 복된 소식, 복음이었습니다.  남편도 아들들도 없이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모압 땅에 나오미가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는 은혜의 땅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하고 모압을 떠났습니다. 

아직 나오미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슴에 확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 땅에서 소망 없이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돌보시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돌아오는 나오미의 가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한글 성경 룻기 1장에는 ‘돌아가다’는 말이 11번이 나옵니다.  나오미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와 소망이었습니다.  ‘떠남과 돌아옴’ 이것이 룻기 처음 부분에 강조되는 주요한 주제입니다.

고향을 떠나오신 교우 여러분들도 고향 생각이 자주 나실 것입니다.  언제 고향이 가장 그립던가요?  지금은 그때와 다르지만 저는 영국에 공부하러 처음 왔던 시기가 가장 그랬습니다.  여기 생활이 만족하고 불편함이 없으면 그래도 덜하였을 텐데 말도 잘 안 통하고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듭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딘에서 글래스고우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어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중에 어느 날 자동차를 도난 당하였을 때 속이 상하기도 하고 외국생활에 대한 정이 뚝 떨어져 빨리 한국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끈 듭니다.  그런 때 창가에 있는 식탁에 앉아 밖을 보면 창 밖으로 하늘이 툭 터져 보이는데 그 하늘 길로 글래스고우 공항을 오가는 비행기들이 바쁘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 비행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언제 이 공부 끝내고 저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조바심 내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집을 나간 부잣집 둘째 아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 아버지에게 떼를 써 일찌감치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외국으로 나간 이 아들이 그곳에서 아버지와 형의 간섭이 없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가진 돈으로 허랑방탕하다가 얼마 가지 못해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돈이 떨어지니 따르던 친구들도 다 떠나갔고 외국 땅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거기다가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어디 가서 제대로 구걸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어떤 집의 일군으로 들어가 그 집의 돼지를 돌보는 일을 하는데 먹을 것이 얼마나 궁한지 돼지가 먹는 먹이라도 먹으려 했지만 사람들이 주질 않아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아들은 떠나온 고향이 생각나고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그리고는 지난 날 아버지에게 잘 못을 했던 것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성한 일군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여기서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말고 일군 중에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하고 용서를 빌어야지 결심하고 아버지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날마다 문 열어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아버지가 거지꼴로 오는 아들을 달려가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며 기쁨으로 맞아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혼자서도 일이 잘 되고 잘 나가면 아쉬울 것 없고 그리울 것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춥고 외로울 날이 옵니다.  가진 것을 잃을 날이 오기도 합니다.  잘 나가던 시절이 끝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득하게 떨어지는 추락의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 나를 위로하고 나를 받아주고 나를 안아주는 가족이 있고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내 삶이 피곤하고 지칠 때 부모형제와 고향생각이 가장 많이 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의 삶이 피곤하고 곤고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고향이 생각이 납니다.  혹시 고향 땅에 돌아가도 반겨줄 가족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나의 본향인 분들은 날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먼저 가신 믿음의 선배들이 누리는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오늘의 삶을 살아갑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내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을 바라보며 삽니까?  꼭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돼지 우리에서 자기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던 것처럼, 모압을 떠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그 자리를 일어나 떠난 나오미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떠나 하나님을 모르는 모압으로 갔던 그들이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결심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오미의 믿음이 아직 연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삶을 위해 믿음의 땅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직 나오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1:13,20,21 참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하나님은 그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주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날마다 새로운 시작의 연속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새롭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새롭습니다.  오늘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삶이며 낙심과 실패의 삶이라면 그럴수록 더욱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절망의 자리에 있던 나오미는 사랑하는 두 며느리와 함께 새 출발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6절과 7절을 보면, ‘일어나’ ‘떠나고’ ‘돌아오려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지난 날 잘못되었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자리가 죄악의 자리일 수 있고, 절망과 실패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신세타령하고 다른 사람과 환경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을 묻은 자리라고 탄식하며 그 자리에 매여있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떠나야지 생각만 하고 있지 말고 일어났으면 지체 말고 떠나야 합니다.  돼지우리에서 깨달았던 아들은 그 자리를 떠나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내가 머물던 자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임을 깨달았다면 아무리 화려하고 돈이 넘치고 재미있을지라도 지체하지 말고 떠나십시오.  본전 생각이 나서 머뭇거리다 망하는 노름꾼들처럼 죄의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털고 일어나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새로운 삶을 향해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돌아오라’였습니다(사55:7, 요엘2:12, 렘25:5, 호6:1).  아버지가 자식을 기다리듯, 남편이 아내를 기다리듯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시는 것처럼 자녀들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품이 가장 풍족하고 안전함을 느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오늘 찬송하셨지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던 길에 갑자기 나오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고향소식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며느리들을 챙겨 일어나 떠나왔는데 길을 걸으며 앞날을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현실이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 혼자 과부가 되어 고향 가는 것만으로도 기막힌 일인데 이 젊은 두 며느리까지 데리고 고향에 가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하는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젊은 며느리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외국 땅에서 겪게 될 어려움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가련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길 가던 도중에 며느리들에게 각각 친정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며느리를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사랑이 지극합니다.  며느리들 또한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음을 나오미의 말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별의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나오미와 오르바 이 두 외국 며느리들이 나오미의 가족들에게 보인 사랑이 참 아름다웠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외국 땅에 이민 온 가정에 시집을 온 것은 보통 마음으로 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외국인 남자를 친절하게 대하고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베트남 처녀 중매결혼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피차 필요에 의해 계약 결혼하는 경우에 불미스런 일들이 발생하곤 한다는데 어떤 가정에서는 낯선 외국에 시집을 온 아내와 며느리를 심하게 구박하고 인간 이하의 행동을 저지르는 예들이 심심치 않다는 말을 들으면서 룻기의 고부관계는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외국 남자와 결혼하여 아직 자식 하나 낳지 못하고 홀로 된 젊은 며느리들이 앞날이 창창한데 시어머니를 따라 시어머니의 고향나라로 가겠다고 나섰으니 그 순종과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나오미는 이런 두 며느리들이 아들들이 죽기 전에 보였던 사랑스런 마음을 칭찬하며 너희가 전에 죽은 자와 나에게 선한 마음으로 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하게 대우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흐뭇한 고부관계입니까?  슬픔 중에 위로가 되는 세 여인들의 사랑스런 만남입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소리 높여 울며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겠습니다’ 하고 매달립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내 뱃속에 너희들의 남편이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어서 다시 남편을 둘 수 없고 또 그럴 수 있어서 내가 오늘밤 시집을 가 아들을 낳을 수 있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것을 바라고 기다릴 수 있겠느냐?  너희가 어찌 이것을 기다리며 다른 남편 만나기를 포기하겠느냐?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들을 볼 때 마음이 더욱 아프구나’ 하고 간절하게 두 며느리를 달래며 다시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부여와 같은 고대시대에 있었던 형사취수제도처럼 유대인들 역시 형이 아들 없이 일찍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형님의 이름으로 가문을 이어가고 가문의 재산을 보호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내가 어떻게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아 너희들에게 남편감을 주겠느냐고 하며 한 살이라도 나이 젊었을 때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라고 설득합니다.  내가 홀로 된 너희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많은 애를 쓰는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내 딸들아’ 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간절히 설득하자 두 며느리가 다시 소리를 높여 웁니다.  이심전심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스런 마음을 충분히 느끼고 또 이해하는 며느리들입니다.  이 세 여인들의 눈물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같은 동양권 문화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일 밖에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참 눈물을 흘린 뒤 드디어 이별의 장면이 나옵니다.  작은 며느리 오르바가 시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작별의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가던 길을 되돌아 친정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큰 며느리 룻은 오르바와 달리 그대로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붙좇았다’는 말은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꽉 달라붙었다는 말입니다.  네 동서 오르바가 자기 백성과 신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너도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에 죽어도 어머니를 떠나 살 수 없다고 하며 매달리는 룻이었습니다.  룻이 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한 위대한 사랑고백은 이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말씀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돌아오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향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 시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는 오르바,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꼭 붙어 새로운 땅, 시어머니의 고향이며 남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룻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10년 세월에 가진 것 다 잃고 빈 손으로 돌아오는 슬픈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셨고 나를 치셨지만 그래도 내가 살 곳은 이곳이라는 마음으로 아픈 가슴 끌어안고 돌아오는 나오미입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떠났다가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옛날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네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얻어 평안함을 누리라고 할 때 그 말씀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외국 땅에 갔을 때 만날 어려움이 두렵기도 했을 겁니다.  장래가 너무 암담하였을 겁니다.  나오미의 진지한 설득에 오르바는 마음을 돌이켜 현실의 평안과 행복을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함께 울었고 입맞추었고 따라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그들의 백성과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기는 하되 과거의 삶의 습관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가까이 다가왔지만 아직 멀리 있는 사람의 모습을 오르바에게서 봅니다.  울고 불고 하며 감정적으로는 큰 변화를 보이지만 실제로 살아야 할 기회가 오면 여전히 하나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천국 문을 두드리지만 그 앞에 험한 장애물이 가로막으면 보다 편하고 안락한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오르바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룻과 같은 사람을 좋은 예로 소개합니다.  돌아오되 보다 새로운 삶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길인지 충분히 예상하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신 혼자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어머니를 떠날 수 없었고 또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버리고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룻기 1장에서 열 한 번씩 되풀이 되는 말이 ‘돌아가다’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옛 생활로 돌아가라고 유혹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좁고 험악한 길이니 넓고 편한 길로 나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늘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 하셨고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시며 이것은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 돌아가려 했던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떡집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와 룻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세례교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명하신 성찬예식에 참여하여 주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음을 감사하면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십니다.  성찬식은 주님과 연합하여 주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게 됨을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돌아와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떡이신 주께서 베들레헴, 떡집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떡을 먹으면서 주님 품에 살게 됨을 감사 드리고 또 날마다 주님께로 가까이 가며 주님께로 돌아가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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