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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사적인 믿음 (행 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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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지 사람에 따라 좋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요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싫은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좋고 싫고 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판단이라면 옳고 그른 것은 공적인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싫어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또 모두가 좋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싫을 수가 있고 모두가 싫다고 하는데도 나는 좋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은 내가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옳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옳은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아무리 모두가 다 옳다고 해도 아니라고 우기곤 하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벌어진 난동을 피해 베뢰아로 옵니다. 물론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베뢰아에서 나타난 두 가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을 가리켜서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다, 더 고상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기본 원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선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옳으냐 그르냐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먼저는 귀담아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요 상대방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어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귀담아 들어주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반대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내 선입견 때문이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편견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우선은 상대방의 말을 신중하게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를 어로 잘못 알아듣고는 당신이 어라고 했지 않느냐고 우겨댄다면 그거 참 큰 일 아니겠습니까?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다 더 고상한 성품의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서 전한 말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선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아주 열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바울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을 자기들의 지식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고 들어왔던 그 지식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성경 말씀을 날마다 연구하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바울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깊이 있게 알게 되었고 그 말씀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적지 않게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믿게 된 이유는 물론 먼저는 바울이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들이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여 그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성경의 지식과는 다른 바울의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니 그 말은 틀렸다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먼저 성경을 날마다 연구하였던 것이요 그 결과 바울이 전하는 말이 맞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깨달은 대로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고 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켜왔던 그리스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적지 않게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경 공부를 통해 배우고 익힌 것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귀담아 듣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우리 스스로가 말씀을 읽어가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설교를 통해서 들으려면 한 평생을 들어도 모자랍니다. 성경 공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스스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한 번만 읽으면 다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읽어나가다 보면 처음 읽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다시 읽어나가다가 아하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거듭 거듭 읽다보면 전에 읽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다시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묵상을 하면서 깊이 있게 말씀을 읽어나가기도 하고 또 한 자리에서 책 한권 한권을 읽어나가기도 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을 깨달아 나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때로는 말씀을 전해 들으면서 마음에 상처가 되었던 것들이 있다고 해도 그래서 이런 말씀이 주어진 것이로구나 하고 다시 깨달으면서 상처가 치료가 되고 오히려 은혜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더라도 내 지식으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성경을 읽어나가야 그 바른 의미를 찾을 수가 있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콩을 가리켜서 그거 아주 좋은 거야 맛도 있어 하고 말한다고 해도 콩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거 좋은 것은 알지만 맛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데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입장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도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 주셔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읽을 때와 그냥 의무적으로 읽어나갈 때 내 마음에 다가오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아와 먼저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이 내게 은혜가 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나서 말씀을 듣는 것과 그냥 무덤덤하게 말씀을 듣는 것과는 받는 은혜가 천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말씀을 들을 때나 말씀을 읽을 때나 그 듣는 말씀 읽는 말씀이 내게 깨달아지고 은혜가 되도록 항상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를 때 그 말씀이 내게 은혜가 되고 그 말씀이 내게 능력이 되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 깨달은 말씀대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름으로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 깨달은 말씀대로 믿고 따르는 반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의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을 듣고, 거기까지 가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바울이 전하는 말을 자기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울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다는 말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 옳다는 것이요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은 없다고 하는 편견과 아집에서 이들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요?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메시야라면 그렇게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메시야가 유대 나라를 해방시키지 않고 그냥 버려둘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유대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요 그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믿음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 메시야가 오면 유대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적국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운다고 하였던가요? 그것은 단지 그들이 바라는 소망이었을 뿐이요 그 소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죄인들과 어울립니다. 병자들과 어울립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로마 당국과 부딪치지를 않습니다. 그런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기들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려고조차도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은 철저히 말씀을 따라 살고 있기에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르니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틀린 것을 전하니 바울이 나쁜 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나쁜 놈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쫓아내던가 죽여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잡아 죽이려고 했더니 어느새 데살로니가를 빠져나가 베뢰아로 가서 거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으니 정말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하며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를 벗어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그 말씀의 뜻을 바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원수를 사랑하고 했던 신명기의 말씀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랑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 정신으로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각이 당연히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두르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하지만 목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목적도 선할 뿐만 아니라 방법도 선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단지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은혜가 있단 말입니까? 거기에 무슨 사랑이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그런 내 안에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허물이 눈에 띌 때 내 마음에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생기는지 아니면 어찌 그럴 수가 있어 어찌 저런 놈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있어 하면서 속상하고 흥분된 마음이 먼저 생기는지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가 누구를 탓하고 시비할 수 있는 자격은 있는지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었던 가요?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무엇이 있었던 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간음한 여인을 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보고 누구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밉다고 해서 누구를 비난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잘못된 사람을 보게 되거든 그 사람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고 그 사람으로 잘못되게 만드는 배후의 세력 악한 마귀를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못된 사람들까지도 동원해서 바울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대들었습니다. 온 도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겠다고요?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전혀 죄와는 상관없이 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사랑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모든 족속들 가운데는 죄인이 하나도 없던 가요? 그들 가운데 의인들만을 찾아 제자를 삼으라고 했던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죄인들을 찾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은혜입니까?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있던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소란을 일으키고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잡아 죽인다고 범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바로 세워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품어주어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 잡아주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난동을 피해 아테네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뢰아에 남아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걱정이 되어 바울은 그들을 가능한 한 빨리 데려오라고 수행하던 사람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마주쳐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핍박을 하면 할수록 더욱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지 마주쳐 싸우는 것은 결코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욱 더 축복하게 될 때 그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속상해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축복하노라면 우리 마음에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은혜가 넘치게 되니 복된 자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을 빌면 그 복이 합당하면 내가 복을 비는 사람에게 복이 임하지만 그 사람이 복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면 그 빈복이 내게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함께 마주쳐 싸울 일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고 나를 괴롭힌다고요? 그것이 바로 내가 복 받을 기회인 줄로 믿으십시오. 누구 잘못된 모습이 눈이 띕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노라면 그로 인해서 또한 내가 복을 받게 됩니다. 역시 내가 복 받을 기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기도할 때 나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를 힘들게 만들거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십시오. 누구 잘못된 모습이 눈에 보이거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저 모습을 제게 보여주시는 군요. 나도 주님처럼 저 사람을 감싸 안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순간 내가 복된 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모든 기회를 내가 복 받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인 믿음 고상한 성품의 믿음을 지니도록 하십시오. 그를 간절히 소망하십시오. 무엇보다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깊은 말씀의 사람, 묵상의 사람 되십시오. 그래서 깨달은 말씀대로 믿음의 사람 되심으로 약속의 믿음을 따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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