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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의 위대한 평신도상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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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유례없는 성장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 제기되는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 바로 왜 교회는 성장하는데 한국 사회는 이렇게 어두운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대답하는 한가지는 바로 한국 교회 안에 평신도의 양육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혹은 모델이 될만한 평신도가 없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마다 가장 강조하는 단어는 성숙이라는 단어입니다.그리고 성숙한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이제 한국교회는 평신도를 양육하여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성숙한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역자들은 아주 폐쇄적인 교회당이라고 하는 곳에 갖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고 세상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로 세상입니다. 정치계에 있는 사람도 있고 경제계,교육계,의료계 가정 직장으로 흩어져 생활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평신도들이 세상의 빛이되고 소금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새로워지게 되겠습니까?

특별히 종말을 때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평신도의 역할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점점 세상은 모든 부분에 영적으로 어둡고 패역한  모습으로 변하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바로 평신도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역할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이 힘들고 어두운 세상에서 영향을 끼치는 위대한 평신도의 삶이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좋은 모델을 요셉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 본분에 소개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세상에 위대한 평신도 선교사였습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그는 평신도로서 위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잇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강릉에는 약 160여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 약 전체 시민의 6% 인구를 기독교인구라고 본다면 1만 2천명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삼아 이곳 강릉에 배정하여 우리를 파송하였습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이곳에 우리는 살면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이 종말의 시대에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성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은 소원하십니다. 과연 종말에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위대한 평신도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 창세기 39장에 소개되는 요셉을 보면 우리는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요셉은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11번째아들입니다. 그러나 꿈을 꾸고 그것을 말함으로써 형들에게 미움을 맏습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을 은30개에 팔고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의 집의 종으로 들어왔습니다.


1. 요셉은 세상에서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4절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모습이 소개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다가 신임을 받아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신임하여 모든 재산을 다 맡기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요셉을 신임했습니까? 6절에 보면 “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 먹는 음식 위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고 합니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얼마만큼 맡기고 있습니까? 요즘으로 말을 하면 주인의 인감도장까지 맡길 정도입니다. 전적으로 요셉을 믿고 신임하여 모든 재산을 위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신임을 얻었을까요?
저는 우리 삶에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길이 2가지라도 생각합니다.
하나는 성실성이요 다른 하나는 전문성이라고 봅니다. 성실성과 전문성 이 둘은 어느 한가지만 있어도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령 너무 성실한데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해보십시오. 결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전문성은 좋은데 성실성이 떨어져 보십시오.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성실하기도 해야 하고 전문성도 갖추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주 중요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두종류의 의사가 있다고 가정할 때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한쪽은 수술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기술이 뛰어난 의사가 있는데 성실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쪽은 전문성은 없는데 아주 매사에 성실한 의사가 있다고 할때 이 두사람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마도 좀 성실성이 떨어져도 기술이 탁월한 의사를 찾지 않을까요? 물론 이 두가지는 극단적인 설정입니다. 성실성과 전문성을 다 갖출때 정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이 바로 이 두가지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전문성과 성실성을 키워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전문성과 성실성을 키운 평신도 사역자들이 사역할때에 교회는 더욱 업그레이드 되어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성실성과 전문성을 어떻게 키워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현재 맡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은 17살의 나이에 형들이 외국의 상인에게 팔아 졸지에 애굽이라는 나라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종의 자리에게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맡은 일에 집중하여 가정일을 담당하는데 전문가가 됩니다. 그로 인해서 주인의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금 여기에서 그 일에 성공하지 않으면 다른 일에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맡은 작은 일 하나에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큰 일을 성공할 수 있습니까? 작은 일에 성공하는 자가 큰 일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모든 작은 일일지라도 비록 그것이 하찮은 남의 집 종과 같은 일일지라도 최선의 우등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습관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중의 삶의 못된 습관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너무 큰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큰 것에 한이 맺혀 있는 민족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대한민국’입니다. 기업도‘대기업’을 알아주고 거리도 ‘대로’가 많고 다리도 ‘대교’가 많습니다. 한강대교,마포대교,성산대교 서울의 다리들을 보면 전부 대교입니다.학교도 ‘대학’을 선호하고 심지는 먹는 술도 ‘대포’‘왕대포’라고 하면서 큰 것을 선호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대교회’을 너무 좋아하고 ‘대부흥성회’라고 큰 것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때에 작은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작은 이스라엘 나라에 작은 도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작은 도시 나사렛에서 자라나시다가 작은 시골도시 갈리리에서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만났던 사람들은 병자 과부 가난한 사람 대부분 시골과 바닷가의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몸담고 생활하셨던 세상은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작고 보잘것없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세상의 작은 곳에서 작은 사람들을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우리가 종종 세상을 섬기고 어떤 일을 감당할 때 문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요셉이 몸답고 있는 있는 보디발의 집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직장 세상의 사업 그곳에서 우리가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문제를 집어내고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잘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금세기에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유명한 노르만 빈센트 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빈센트 필 목사님에게 청년 하나가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니는 직장에는 너무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없는 직장을 하나 소개해 주시죠.” 그의 부탁에 빈센트 필 목사님이 두말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내가 마침 생각나는 직장이 하나 있는데 지금 내 차를 함께 타고 가시죠.”
“아? 지금 소개해 주겠어요?”
“그럼요. 지금 소개하죠. 내 차를 타세요.”
그래서 그는 이 청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합니다. 뉴욕 시외로 나가더니 갑자기 이 빈센트 필 목사님이 공동묘지 앞에 차를 딱 세우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여, 여기가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입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피곤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종으로서의 요셉은  성실한 종 전문가 종으로 최선을 다해 섬겼을 때에 결국 가정에서 총무가 되었습니다. 총무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을때에 결국 나중에 애굽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과연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사회에서 자기의 사업의 장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니면 상사에게 신임을 받고 있습니까?


2.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라고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때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때입니다. 21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고 합니다. 요셉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사업을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정말 나의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말로서가 아니라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증거가 나타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증거로 보여주고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인지 아닌지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성도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증거가 나타나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잘 믿는다고 아무리 혼자 입으로 말하고 자랑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은 객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잘 믿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이라면 은혜받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면 성령충만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함께 하심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요셉을 보게 될 때 2가지의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증거가 있었고 말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우선 요셉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를 삶을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7절이하에 보면 요셉이 살고 있던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얼마나 큰 악와 유혹이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그때 요셉의 나이는 17살에서 20살 정도의 청소년기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겼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임재하심에 대한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합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여인과 함께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 자리에서 피하여 도망가고 있습니다.
요셉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의식은 그 삶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 순결의 삶으로 정결한 삶으로 드려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머물고 있는 세상의 모든 직장 모든 사업 어떤 일의 현장에서 우리가 먼저 회복해야 할 의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깨 하심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잇든지 먼저 의식해야 할 눈길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불길같은 그 눈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바라보시고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부정한 일을 할수 있습니까?
또 반대로 비록 삶에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고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아가면 문제가 아니고 어려움이 아니고 놀라운 형통과 승리가 주어지게 될 줄 믿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유고슬라비아에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점점 자라 어느새 십대 소녀가 되었습니다. 소녀는 이 시절에 성경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불타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선교사를 자원했고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카톨릭 수녀가 되었습니다.
수녀가 된 그녀는 인도의 캘커타로 갔습니다.  그녀가 간지 얼마 안 되어서 그녀는 거리를 지나다가 한 병이 든 여인을 발견합니다. 그 여인은 병들어서 엎어져 있는데 그런 자세로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몸의 한쪽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의 쥐들이 그 썩은 부위를 와서 파먹고 있었습니다. 이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고 수녀는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마음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내가, 이 힘없는 연약한 여자가, 한낱 아녀자가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런 생각 끝에 그냥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그녀의 마음을 잡아 당겼습니다. ‘네가 도와야 한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그때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도와도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하겠죠.”
그녀는 그냥 지나가려던 발걸음을 돌이켜서 이 여인에게로 가서 그 여인을 들쳐 엎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곁에는 불쌍한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계속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늘어나자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그 도시에 행정 관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녀의 숙소 옆에 있던 비어있는 힌두교 성전을 빌려달라고 해서 그곳을 클리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감동을 남기고 떠나간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에 영국 BBC 뉴스의 크리스천 언론인이었던 멀컴 머코리치라는 사람이 캘커타에 있는 테레사의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만히 병원을 관찰해 보니까 사람들이 병원에서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행복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모습을 보며 그때 만해도 거동이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했던 테레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그 질문에 이런 흥미 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힘들지요. 힘들지요.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무척 힘이 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힘든 게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즐거운 인생을 사는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삶을 살아가는 증거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요셉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말의 증거로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정황에서도 하나님을 항상 증거하였습니다.
9절에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죄의 유혹을 받았을때에도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40잘 8절에 보면 감옥 안에서 꿈을 해석할때에도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특히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꾸어 해석할때에도 창40장 8절에 “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라”고 증거합니다.
먼저 우리의 삶에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른 우리가 하나님을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모든 평신도들의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업터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교의 장인 셈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 직장 그 사업에서 하나님을 몸으로 증거하고 입술로 증거되기를 소원하십니다.


3. 요셉은 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요셉이 가정의 총무가 된 뒤의 결과입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과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합니다.
요셉은 개인적으로 형통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집에도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복이 왜 임했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요셉을 위하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요셉때문에”라고 번역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요셉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까지 축복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요셉 때문에 요셉뿐만 요셉이 일하는 그 가정 그 직장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요셉은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 한사람 때문에 가정 전체를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믿음의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축복하심을 믿으십니까 ?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직장에 축복하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믿는 한 사람 때문에 한 직장이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믿는 한 사람 때문에 가정과 가문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에 “내가 너를 축복한다 너는 복의 그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근원”이는 말은 ‘바로 통로,채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뿐 아니라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이웃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축복이 나타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정에 복이 찾아오고 그 가문에 복이 임했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의 가정과 요셉의 직장과 요셉이 머문 나라를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가정에 축복의 통로가 되기 원하십니다. 직장에 축복의 통로가 되시를 소원하십니다. 그곳이 가정이든 감옥이든 직장이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축복이 전달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요셉이 받은 축복으로 혼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축복으로 요셉이 머무는 다른 이웃 다른 사람들에게 그 축복이 함께 누려졌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자기” 혼자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기를 구하고 그것을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 째째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세상에서 영향을 미치는 삶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축복을 끼치는 성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복의 사람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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