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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 (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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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유치원에서 교사를 하는 한 자매가 신학생과 선을 보았습니다.
신학생은 부잣집 장로님 아들이었습니다.
몇 번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장로님 아들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손님들이 많아서 무척 시끄러웠습니다. 
이 신학생이 자매에게 “나는 애들은 딱 질색이야. 다른 데로 가자.”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 날 그 저녁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되었습니다.
유치원 교사인 이 자매는 다시는 이 신학생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신학생 총각도 애가 탔지만 자매의 부모들도 애가 탔습니다.
집안이나 모든 조건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그런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못생기고 잘 생기고를 떠나서 아이들만 보면 즐겁고 기분이 좋고 행복해지고 그래서 유치원 교사가 되었는데, 아직 젊은 사람이 “애들이 딱 질색이라니”
그 말 가운데 그 사람의 성품과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짝을 잘못 찾으면 사람은 평생 불행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누가 자신과 맞는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사주팔자를 보아서 정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짝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합니까?
어떤 사람이 나와 맞는가 안 맞는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합니까?
기쁨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을 그가 기뻐하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내가 기뻐하면 맞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을 상대방은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맞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결혼의 조건이 많지만 내가 제일 기뻐하는 것을 상대방은 딱 질색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1. 사랑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누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삶이 힘들어서 ‘죽고 싶다’ 이런 생각 한 번씩 안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실제로 죽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있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기 때문에 살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큰 사고를 당해서 죽음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견디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너를 놓고 죽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온갖 시련과 박해와 유혹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 섬기는 주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손도 잡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손도 잡아 보지 못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힘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넣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다 버릴 수 있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힘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 힘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듭니다.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징조가 보여 보세요.
제일 먼저 달아날 사람들이 지식인들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이 한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고 선거 때에 공약을 걸었던 정치가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희생하고 헌신하고 고난을 참을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나를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진하게 느껴질 때에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느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사랑의 감정은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감정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기쁨의 감정을 동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에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돈을 다 주고 나는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으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것을 다 주고 그는 풍요롭고 나는 가난해도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은퇴하신 목사님 사모님이 건강이 좋지 못해서 겨우 끼니 해결하고 사시는데 명절이 되자 자녀들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자녀들의 대접만 받으라고 전화가 왔답니다.
그러나 딸들과 아들들에게 대접을 받는 것이 전에 자신이 음식을 만들어서 차려 주는 때보다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기쁩니다.
내가 배부른 것보다 그가 배부른 것이 기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이런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가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 사랑이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큰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3. 우리는 이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사랑을 배우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온 우주에서 최고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죄 없으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사랑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을 달게 받으신 사랑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칠 때에 이 사랑을 먼저 둡니다.
우리가 형제끼리 사랑하는 것도 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우는 또 하나의 길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하는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과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고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과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아가서는 두 가지 목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하는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건전한 방법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과 연들의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이 연인들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느껴보고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두 사람은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에 나온 여인들의 진한 사랑이 그들이 남다른 사랑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신부는 완전한 미모를 갖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조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5,6)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이는 햇볕에 그을리며 농사를 짓다보니 몰골이 말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예쁘게 화장하고 치장한 여인과는 사뭇 다릅니다.
얼굴이 검었습니다.

가정도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
어머니가 재혼을 해서 씨가 다른 오빠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 오빠들이 못됐습니다.
어린 동생을 포도원지기로 보냈습니다.
그 포도원을 지키다가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보내지 못했습니다.
잘 생기지도 못하고 가정의 형편도 좋지 못했지만 이 여인의 신랑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의 기쁨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뛰어난 미모가 있거나 집안이 좋거나 학벌이 높은 여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의 눈에는 어여쁜 자 중에 어여쁜 자로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습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도 아니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에스(S)라인의 몸매를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무엇이 평범 이하의 이 여인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 것일까요?
그녀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쁘게 본 것도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만한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해서 사랑하고 귀하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라볼 때에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바라보면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죄가 많고, 늘 하나님께 반역만 하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라보시면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주실 수 있지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해로 운 것은 아무리 작은 것도 주시기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큰 기쁨을 느끼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사랑의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이 기쁨을 느껴야 활기차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를 읽어보면 내용의 많은 부분이 신부가 신랑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며 신랑을 찾으러 나섰다가 많은 봉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아3:1-2)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아5:6-7)

요즘 많은 여성운동 하는 분들이 여자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남편들이 집에서 설거지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집안일을 잘해 주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스위스 사람들인데 이혼율도 세계에서 일등입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이 여인의 남편은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는 찾아 헤매지만 어디 있는 줄도 모릅니다.
신랑을 찾아 나섰다고 경찰들에게 얻어맞고 옷을 빼앗깁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신랑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신랑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랑이 자기와 똑같이 자기가 신랑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무 고통 없이 살아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나를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뻐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환난과 시련을 주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가서에 신부가 신랑 때문에,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냈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그 마음에 사랑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여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여 집사님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인데 직업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궂은일을 하면서 항상 찬송을 부르며 일을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인데도, 매일 얼마나 기쁨과 은혜로 살아가는지, 그분을 보면 곧 감동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 년에 수십 명씩 그 집사님에게 감동이 되어 교회를 오는 분들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환경에서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느냐고 감동하여 교회로 인도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느라 애를 쓰는데 여 집사님이 1,000만원을 헌금했습니다.
목욕탕에서 번 돈으로 말입니다.

자, 이 분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로써 그는 이 같은 기쁨과 간증과 찬송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이요,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주시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은, 매일 새벽 3시가 되면 일어나, 성전에 나와 이 구석 저 구석을 닦느라, 바쁘신 모습을 봅니다.
그 권사님은,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넉넉해서, 그렇게 봉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쁜 마음으로, 그 모든 일들을 하십니다.
그렇게 구진 일을 하시면서, 항상 즐겁게 하시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가득하기에,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채워져 있기에,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키시기에,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신앙생활의 진수는, 진정 예수님이 나의 삶에 가장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우리 마음에 넘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에 솟아나는 기쁨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 사랑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의 기쁨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기쁨을 느끼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 사모할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하고, 그 기쁨을 느끼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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