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악 (롬 1:18-32)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적당히 죄를 지은 죄인이 아니라, 철저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구원받을 만한 어떤 구석도 없다(롬3:10-18). 어떤 인간이든 다 죄인이다. 도덕적으로 조금 선하고, 덜 선한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다 똑같은 죄인이다.

  죄는 2종류다. 하나님께 대한 죄가 있고, 사람에 대한 죄가 있다. 하나님께 지은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한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도 용서받고 또한 하나님께도 용서받아야 한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사람에게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를 빈다.

  영화 밀양을 보면, 살인범이 주인공(신애)에게 용서받기도 전에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피해자 신애는 자신이 빠진 용서를, 하나님이 해주었느냐고 하면서, 자신이 배제됨을 알고 분노를 느낀다.

  이 영화는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지만, 피해 본 당사자가 배제된,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신앙이 바로, 구원파 신앙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1대 1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만 그친다면, 관념일 뿐 아편과 같은 잘못된 신앙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사람에게 죄 짓고도, 그저 기도로 하나님께 고백만 하면,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는 생각은 심리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세상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들에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께 지은 죄를 가지고,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고 해도, 역시 소용없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을 받아야 한다.

1. 하나님께만 지은 죄 :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불경건한 자(21)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존귀를 올려드리지 않는다. 이를 죄라고 하는데, 이 죄는 본질적인 죄이며 영적인 죄다.

  하나님을 나와 연결시키려 하지 않고, 내 인생에 간섭하지 못하게 함이 바로 불경건(godless)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한다”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숨겨져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함은 거짓이고 반항이다(19-20).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과 내 인생이 관계를 맺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죄다. 보통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무신론자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다. 다만 불신자가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아버지 없는 태어난 자식이 있는가? 없다.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못된 놈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없이 태어났다고 하는 자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패륜아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게 된다. 그 대표적인 믿음이 진화론이다. 어떤 사람은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은 어떤 가설에 대한 반복적 실험이 가능해야 한다. 진화론은 입증하기 위한 어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없고, 그 결과가 없기에 과학이 아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이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이지만,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에 속했다고 생각할까?

  창조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화론은 어떤가? 진화론 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전지전능하면 했지, 못하지 않을 보이지 않는 존재 ‘우연’이 자리 잡고 있다. ‘우연’은 ‘시간’이란 친구의 도움으로, 물속에서 프랑크톤을 먹고살다가, 인간이 됐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지 못하면서, 우연은 과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우리가 진화론을 사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잠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는 부모보다 늦게 태어났기에, 조금이라도 더 진화한 존재다.

  그렇다면 더 진화한 자식이, 왜 덜 진화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가? 더 오래됐기에 존경해야 한다면 오히려 원숭이를 존경해야 하지 않겠나? 또 우리 몸에 병이 생겨도, 인위적으로 고치면 결코 안 된다. 그 병이 생각지도 못한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 우리를 더 진화시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진화론을 믿으면 누가 누구를 죽인다고 어떻게 재판을 하고, 감옥 보내고 사형시킬 수 있는가? 결국 진화 과정에는,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죽이고, 적응해 가면서 이룬 성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썩어질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23). 썩어질 동물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다 미쳐버린다. 히틀러는 600만을 죽이고, 스탈린이 6,000만 명을 숙청한 사건은, 대의를 위해서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취급한다. 이처럼 진화론은 종교인데, 잘못된 이단 종교다. 이단 종교에 빠지면 많은 사람을 죽이고 피해를 준다.

  많은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이유는, 사람 속에 하나님 의식이 있음을 증명해준다. 아무리 우상숭배가 심각한 곳에 가도, 선교의 가능성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되었다.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싸운다. 교육이라는 말은, 선한 인간의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발휘하면 된다는 의미로 education(ek + ducare)라는 말을 썼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감사치도 아니하며”라고 했다. 감사가 떠난 모습이, 죄악에 사로잡힌 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죄의 포로가 된 사람은 항상 불평, 불만, 원망이 그치지 않기에, “참된 믿음은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통해 알 수 있다.

(2) 불의한 사람들

불의는 하나님을 모시지 않거나, 경건하게 생활하지 않는데서 온다. 도덕적 윤리적 타락을 가져온다. 죄를 이길 힘이 없다. 걷잡을 수 없이 자신이 부패해진다. 본능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

  인간이 정욕대로 살면, 자기 몸을 더럽히는 본능, 쾌락 중심의 사회가 되고, 거짓이 판치는 사회가 되고, 물질 중심의 사회가 된다. 다른 말로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가 된다. 모든 광고, 물건이 성에 초점을 맞춘다. 성이 상품화된 사회다. 본능의 무서움을 아는가?

  개구리와 전갈이 있었다. 전갈이 연못을 건너고 싶은데, 전갈은 사막에 사는 동물이기에, 연못을 헤엄쳐 건널 수 없었다.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생각했더니, 개구리 등에 업혀 건너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갈은 개구리를 불렀다. 하지만 개구리는 당연히 거절했다.

  개구리는 “내가 선행을 베푸는 건 좋지만, 목숨을 걸고 가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갈은 “내가 너를 쏘면 연못에 빠져, 너도 죽고 나도 죽는데, 내가 설마 너를 쏘겠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구리는 “어차피 내가 전갈을 업고 연못을 안 건너가면, 분명히 전갈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럴 바엔 전갈을 업고, 연못을 건네주자” 개구리는 전갈을 믿고, 등에 업고 연못을 건넜다. 그런데 연못 중간쯤 건너갔을 때, 전갈이 개구리를 쏘았다. 죽어가는 개구리가 전갈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업고 연못을 건너 주면, 안 죽인다더니 전갈, 너 왜 나를 쏘았니?”

  전갈이 말했다. “침을 쏘는 것은 내 본능이야, 나는 내 본능대로 행동했을 뿐이야” 우리는 본능은 같이 망하게 만든다. 그러면 성경은 인간을 왜 이토록,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말씀하나요? 그 이유는 죄인이 아니라면,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절망 없이는 소망이 없으며, 사망이 없이는 부활이 없다.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주님을 따르는 길이 없다. 우리의 구원이 왜 희미한가? 구원의 감격이 왜 없는가? 그 이유는 죄인이라고, 진실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임을 인정하라.

  (18)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된다.

  삼풍백화점이 어떤 무게까지는 버티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되자,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도 쌓이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진노가 폭발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가 있는 곳에 머물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참아 넘기시는 분이 아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죄로 인하여 파생된다. 죽음의 문제, 질병의 문제, 고통의 문제, 전쟁의 문제, 살육의 문제, 다툼의 문제, 갈등의 문제, 모두 이 죄로부터 나온다. 죄는 인간을 죽이고 성도의 능력을 모두 빼앗고, 사명을 잃고 방황하게 만든다.

  죄 때문에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는데, 문제는 성도들이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별로 놀라지 않는다.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의인의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마음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의 피로, 복음으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품위를 높이는 교양과 만사형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믿음을 버리자.


3.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했는데, 악인의 형통함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하나님의 진노가 곧바로 임해서,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지면, 악인들이 회개할 텐데 그렇지 않다.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순교의 길로 가게 만들었던 김일성은, 오래 살다가 죽었다. 이단의 괴수들이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볼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말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크게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즉결 심판과 버려지는 심판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 상당부분 직결 심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고의 심판은 내버려두는 심판, 유기다. “내버려 두사”(24,26,28) 3번 반복된다. 하나님의 진노의 절정은, 범죄한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어떤 부모에게 속 썩이는 자식이 있다. 자식을 올바르게 만들려고 훈계도 하고, 매도 든다. 그래도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에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이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조금만 잘못해도 간섭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두지 않으신다.  내 멋대로 살도록 하나님이 놔두지 않으신다. 조금만 교만해지면, 몸에 큰 병이 생긴다. 큰 시험과 환난이 찾아온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히12:8)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붙들고 있기에, 우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나타나게 됨을 말한다. 손수레가 가파른 벼랑 끝으로 내려간다. 누가 붙잡아 주어야 하는데, 잡아주지 못하면 그냥 내려가, 결국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무서운 범죄에도 불구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전혀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은, 사업이 너무 잘돼서, 예배할 시간조차도 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딴 짓 하다가, 지옥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은, 말로 안 되면 쳐서라도, 쳐서 안 되면 목덜미를 잡고서라도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다. 믿는 자가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사랑하시기에 맞는다. 따라서 병 든 것을 감사하자. 사업이 잘 안 되고, 부도나는 것도 감사하라. 하나님의 사인이다. 하나님의 간섭이다.

  나쁜 짓을 해도 잘되는 것은 저주다. 철들면 칭찬보다 충고가 귀하고, 선물보다 매질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정금처럼 나오기 원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죄를 이길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 주인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신가요?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고, 예수님을 진리라고 하면서도, 예수님께 배우지 않았고 예수님을 빛이라 하면서도, 바라보지 않았고, 예수님을 길이라 하면서도, 따라오지 않았고, 예수님을 능력이라고 하면서도, 의지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응답이라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삶이 가난하더라도, 주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 죄를 가볍게 보지 말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극복하고, 죄를 이기며 승리하며 살아가는 주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설사 살아가다가 죄를 지었다면, 가볍게 넘기지 말고, 그 죄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 빨리 가지고 나와서, 빨리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피로 깨끗이 할 수 있기 바란다. 곧 있으면 망할 악인의 형통을 결코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빛이 아니다. 그러므로 빛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치유하는 광선이 나타나, 모든 습기와 곰팡이가 다 제거된다. 더러운 것이 드러나고 깨끗해지기 시작한다. 계속 빛을 쪼이게 되면 더 완전하게 치유되고, 새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들을, 모두 다 몰아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 위해 꼭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청소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어두움을 몰아낼 수 없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할수록 더 죄를 짓게 되지 않는가? 죄를 안 짓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치유의 광선을 보내주신다. 모든 쓰레기와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끔히 씻어 주신다. 영혼이 빛나고 밝아지고 건강해지기 시작한다. 어둠의 세력들이 빛 앞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인된 삶을 살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