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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 16: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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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누구든지 프랑스하면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할 만큼, 이 탑은 지금 프랑스의 상징처럼 된 유명한 탑입니다. 높이가 312m가 되는 높은 탑입니다. 그런데 이 철탑 건조물이 처음 세워질 때 이 도시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격렬한 반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탑이 아름다운 이 도시의 경관을 해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예술인들은 이 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사가는 소동을 부리기도 했고, 한 유명한 작가는 이 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은 이 탑 위의 식당뿐이라고 하여 이 탑에서 야유하며 식사를 한 에피소드를 남긴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909년 마침내 해체결정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무선 전신 안테나 탑으로 적격이라는 판단으로 사형선고를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이 탑은 수많은 테러리스트에 의해 폭파위협을 받기도 했고, 이 탑에선 지금까지 350명 이상의 사람이 자살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미운 오리새끼', '심지 없는 촛불', '오만한 철세공'의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탑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되고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상징이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탑의 운명이 꼭 교회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통해 수많은 안팎의 핍박과 비판에 직면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여전히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있고, 그가 받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등대요 빛으로 남아있는 그 모습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에펠탑의 건축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기초 때문인 것을 아시는지요? 이 탑의 건설자들은 12미터를 파고 내려간 곳에 돌로 기초를 세우고 이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탑은 반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2000여년 전 우리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사랑했던 12제자를 앞에 부르시고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가 세운 교회가 오래 오래 이 세상에서 건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소망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반석 위에 세운 교회'의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반석은 사막지대에선 적의 공격에서 유일하게 화살을 막을 수 있는 피난처요, 길을 지나는 나그네에겐 그늘을 제공하는 쉼터요, 임시 처소를 꾸미는 사람들에겐 가장 안전한 집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어떤 교회일까요?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면서 자기와 3년을 함께 해온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주실 목적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3년에 걸친 제자훈련의 핵심을 되묻는 질문으로 일종의 졸업시험의 성격이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은 후 그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이때 베드로는 바로 그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며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대화가 일어났던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은 어떤 곳입니까? 이 가이사라 빌립보라는 지방은 이스라엘 북부의 한 작은 도시입니다.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이 바로 이 마을에 신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이름을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과 자기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명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 붙여 있는 도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도시에나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조건이 선행되어야만 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도시 한 가운데 혹은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황제의 신상을 반드시 세워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한 도시 이름에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도시 한 가운데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기다 웅대한 황제의 신상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빌립보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상황입니까?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화려한 세상 종교들 속에서, 그들의 모든 역사와 세력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모든 부도덕한 범죄들의 한 가운데서, 이제 겨우 12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집도 없고 권력도 없던 나사렛 예수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터위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파라독스 - 역설입니까? 우리는 현대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번성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시대의 모든 문화는 교회에 대하여 너무 비호의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교회가 처음 세워질 당시의 상황은 우리의 이런 핑계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까?

여기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이 고백은 벌판 위에서 행해진 인간의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향해서 드려진 고백입니다. 바로 이 베드로의 고백 내용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는 베드로가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저 웅장한 로마 제국의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 비록 초라한 행색일망정 당신이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맨발의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외관상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저 황제의 신전에서 인간의 추앙을 받고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그 신전의 문지기보다 못한 옷을 입고 있을망정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진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황제의 신전 앞에서 옹색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려졌던 고백입니다.

죄악의 땅 우상의 도시 한 가운데서 어떤 도전과 유혹, 어떤 가치와 논리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습니까?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자, 이제 내가 너의 인생을 바꾸겠다. 내가 너를 변화시키겠다. 너는 이제 베드로이다. 너는 지금까지 시몬이었고, 시몬은 문제 투성이, 크고 작은 결점들 그리고 충동적인 실수들과 실패들로 가득찬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너는 교회의 밑바닥 - 그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이 교회의 반석이다. 바로 네가 교회의 반석이다. 그 반석 위에 나는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 시간 우리는 베드로 위에 세워지는 교회의 비밀과 신비를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자 주님은 비로서 자신이 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같이 보십시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 땅에서의 삶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인간이 당하는 죽음 가운데 가장 처참한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그 형벌이 얼마나 잔혹하였으면 로마 정부에서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이 형벌을 금지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자신이 제자와 함께 들어 갈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마자 베드로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고 하는 말을 보십시오. 22절에 보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정들고 사랑하게 된 스승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누가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자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스승님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의병이라도 일으킬 용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베드로, 의리의 사나이 아닙니까? 인간이 이렇게 신의가 있어야죠. 우리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보시며, “그래, 베드로, 고맙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이렇게 말씀하실 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나섰던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극단적인 책망만 받고 말았습니다. 23절에 보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치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겠지요? 베드로의 고백에 금방 그렇게 칭찬해 주셨던 주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고 까지 하셨던 주님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심하게 책망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음직도 합니다.

여기 왜 주님이 이처럼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를 사탄으로 몰아치며 호되게 닦아세웁니까?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이 저 무자비한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난 당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붙잡히든지, 함께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힘이 없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힘없이 붙잡혀 죽임을 당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이 목적을 가지고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려다 보니까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죽으심을 용납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참 고맙고 기특한 일일지 모르지만,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공작일 뿐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가깝고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였습니다. 또 방금 그렇게 칭찬했을 만큼 믿음직한 베드로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베드로의 사랑과 충성을 통로로 삼아서 사탄의 유혹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승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아무런 대책없이 바라만 보아야 했던 베드로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그 방법 외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에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길 외에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었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우리의 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3. 이제 주님은 당신의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언제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또 주님을 따르지 않은 적이 어디 있습니까? 마 4:19를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보면 저들이 순종하여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22절을 보면 저들이'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순종하여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마 19:27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한 마디로 저들이 주를 위해 다 버리고 주의 뒤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미 나름대로 다 버리고 주님을 좇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또 다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맹목적인 따름'이 아니라 '사명적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엔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는 자기 십자가의 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계속해서 주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이사랴 빌립보 땅을 함께 밟고 서서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지금 이 말씀은 빈들 광야 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황제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화려한 도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12제자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다. 그들의 모습, 깡마른 몰골, 초라한 옷, 거지 일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갈릴리 빈민 출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색이야말로 로마 황제 신전의 문지기보다 더 못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주님은 열쇠를 하나씩 주십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진 여기 12제자들은 하나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쫓겨나기도 수없이 했습니다. 죄수도 아닌데, 착고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순교의 제물로 아낌없이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이 아닙니까?

오늘 그 주님은 동일하게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나는 누구냐?" 우리의 고백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고백을 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가 여러분의 고백이라면 오늘 주님은 당신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의 성도들에게 열쇠를 하나씩 맡기실 것입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눈먼 날 볼 수 있게 주내게 행하셨네'

사랑하는 교회 여러분, 교회는 바로 여러분 위에 세워집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바로 여러분을 통해 목장이 세워지고 성장되고 번식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비밀입니다. 이것은 곧 여러분의 축복입니다. 한없이 부족한 나를 통해 세상은 구원되고 이 도시는 복음으로 정복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예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영광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약하기 때문에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요. 어차피 교회는 연약한 나를 통해 세워집니다. 늘 교회는 약점과 허물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천년동안 주님은 이 부족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 또한 지역교회를 통한 전도가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의 공동체입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포로 된 천국가족을 구원해 내는 구조대입니다. 이제 우리가 공격에 나서면 주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견고한 진은 겉보기에는 굉장해 보이지요. 그러나 막상 교회가 공격에 나서기만 하면 속으로는 벌벌 떨게 되어있습니다. 예수 이름, 성령의 능력, 예수의 보혈, 말씀의 능력, 믿음이라는 이 무기들은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핵폭탄입니다. 일순간에 마귀의 성이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부수는 능력도 있습니다. 늘 똑같은 문제에 묶여 신음하며, 동정을 구하며 징징거리며 사시겠습니까? 당신에겐 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정복하고 오히려 내 곁의 연약한 지체들을 섬길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복음 무기 들고 나가기만 하면 음부의 문들은 열릴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앞에 지옥의 문들이 부수어집니다. 보혈의 능력 앞에 견고한 진들이 보기 좋게 무너질 것입니다. 교회는 지옥의 대문을 깨뜨리는 주님의 군대입니다. 성도는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이 땅의 정복자들입니다. 기억하십시요. 주님의 심장 속에 있던 그 교회는 바로 세상을 힘있게 구원하는 교회, 세상을 정복하는 교회입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38년의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 동안 숱한 음부의 권세 앞에서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지역과 이 민족 앞에 그리고 세계 열방 앞에 희망의 공동체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는 계속 사람을 세우고 그 세워진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명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최고의 가치의 십자가, 그것은 '사명'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또한 그 일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무엇, 그것이 십자가요, '사명'입니다. 세월에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증인의 삶은 복음을 통해 영혼을 살리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일에 충성하는 식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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