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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베레스트산 오르려는 사람과, 도봉산 오르려는 사람은 생각부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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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든지 나름대로의 삶의 목표를 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어 기쁘기도 하고 혹은 실망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것을 이루었는가, 이루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그 이룸과 이루지 못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4천 번의 실험을 거쳐서 마침내 실험에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따지고 보면 3,999번은 실패했던 겁니다. 하지만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고 성공에 이르는 계단으로 보았기에 중단하지 않았고 결국은 마지막에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실패하는 사람은 과정의 실패를 결과의 실패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꿈과 소망을 버리지 않으면 그 꿈과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꿈을 버렸기 때문에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또 그 꿈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결혼해서 자녀 낳고, 또 직장 다니고,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러한 일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분명한 꿈과 계획을 내 현실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은 그 꿈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꿈과 소망이 무엇이냐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으로는 매우 길고 또 평상시와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이 목사가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생각 드시기도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목만 봐도 무슨 말 하려는지 다 아실 것이고 혹시 또 전혀 모르실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자세가 다르고, 준비도 다르고,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마음의 각오도 다릅니다. 그리고 작은 성취를 나의 삶의 종점으로 여기느냐, 아니면 그것을 통해서 또 새로운 삶의 원대한 꿈을 이루어나가는 계단으로 여기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 중에 우리가 어떻게 목표를 설정하고 어떤 꿈과 비전을 가지는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생각해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삶의 목표를 무엇으로, 그리고 어떤 수준으로 정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삶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가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갈 것을 목표로 삼느냐, 아니면 내가 도봉산을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상당히 마음의 준비도 달라지고, 각오도 달라지고, 목표도 달라지고, 모든 과정 속에 느끼는 것도 달라집니다.
아무리 고도로 훈련된 산악인이라도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아마 적응해 가면서 차차 올라가니까 그렇겠죠? 그리고 비용도 여섯 명이 출발 했을 때 약 2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아마 여러 가지 재정적인 내용도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등정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또 많은 훈련과 강도 높은 훈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훈련에 임하는 자세도 틀릴 것입니다.
웬만한 어려움정도 겪어서는 내가 이런 정도 어려움은 아마 등정했을 때 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생각하고 어려움이라고 생각조차 안하고 극복할 것입니다.
혹시 훈련하다 다치더라도 내가 이와 같이 등산을 하는 가운데 이것보다 더 큰 부상도 있을 텐데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결국 끝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극복해 갈 것입니다.

만약에 도봉산 오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아마 그렇게 훈련받을 필요 없습니다. 동네 앞산 좀 올라가보고 도봉산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정도 올라가려면 어느 정도 훈련하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쳐도 그 마음이 다릅니다. 혹시 산에 오르다가 넘어져서 골절을 당한다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다치는 일이 있어도 산에 다니다가 다치는 것은 유익이 아니다 생각해서 그만 둘지도 모르지만,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가기 위해서 훈련받는 사람들은 부상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 삶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버립니다. 그리고 생각자체도 틀리고 우리 삶을 맞이하는 모든 것이 다 틀립니다. 그러면 우리 삶을 무엇으로 어떻게 정할 것인가, 목표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데 있어서 내 처지와 형편과 현재 능력만 가지고 결정하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능력이 요만큼이고, 내 형편이 이렇고, 내 주변여건이 이러니, 나는 요렇게 결정하고 산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 27절>을 보면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즉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 인생들이라는 것은 원통한 일이 많아요. 그리고 억울한 일도 많고요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많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고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소개하며 초청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리고 그를 예수님 앞으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단번에 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게 뭐냐면 나사렛이라는 촌동네-변방지역, 그와 같이 누추한 지역에서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그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인 편견, 가지고 있는 편협한 사고,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전제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 말을 단번에 제압합니다.
<와보라> 네가 와서 눈으로 보면 내가 말한 것이 옳은지 틀린지 단번에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와보라> 이 한마디에 나다나엘이 제압당합니다.
확신에 찬 말에 제압당하는 나다나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는 나다나엘이 가졌던 편견을 생각해 봅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시대의 통상적인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것에 매여 있으면 아무리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지경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주변 여건 내가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능력 만에 근거해서 ‘내 능력이 요만하고 내 사정이 요렇고 하니까 나는 요렇게 목표를 세우면 돼.’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날마다 그 수준에서 밖에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떻게 우리의 목표를 설정하느냐?
우리는 나를 바라보고 내 능력에 근거해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계획과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실까를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과의 신앙적 질문 속에서 내 삶의 목표와 수준을 정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나를 하나님이 인도한다면 내 사정과 형편과 원함이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실 것이며,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실 것이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느 곳까지 가기를 원하느냐고 하나님께 질문하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우리 삶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사사기 6장 11절>을 보면 기드온이라고 하는 우리가 잘 아는 사사가 하나님께 불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드온은 그 전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이 처음에 등장할 때 기드온의 비범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주 마음이 좁고 또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이 없는 소심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당시 이방에게 압제당하고 있어서 모든 곡식을 다 빼앗기니까 밤에 몰래 포도즙 틀에서 밀을 조금씩 까불어서 그것을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밤에 이와 같이 몰래 밀을 포도즙 틀에서 타작을 해서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하냐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큰 사람이라서 큰 용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큰 용사라고 불러주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큰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드온이 대답해요.
‘내가 무슨 큰 용사입니까?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 주변에 미쳤겠나이까 나를 큰 용사라고 하시는데 나는 그런 사람도 못되며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살아서 역사하신다면 우리가 이런 압제를 받고 있겠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반문하는 겁니다.
기드온이 아직까지도 평범한 필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문득 기드온을 세워 주십니다.

<사사기 6장 16절>을 보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냐면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바로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할 때 기드온이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여건이나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결국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필부에 불과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큰 용사라 라고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니까 기드온이 문득 다른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6장 17절>에서 기드온이 뭐라고 묻느냐면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이전까지는 별로 꿈이 없었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에게 꿈과 소망을 주실 때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난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이니 내게 확신을 주십시오.’ 뭔가 추구하고자 하는 소망이 생긴 겁니다.
‘아이, 난 안돼요. 나는 안되겠습니다.’ 가 아니라, ‘만약에 정말 내가 그렇다면 내 마음에 확신을 좀 주십시오.’ 뭔가 마음이 적극적으로 바뀌어져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가 무엇이 될까,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질까는 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계획과 하나님을 보고 정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다르면 기본 출발의 생각도, 조그만 일을 이루고 성취에 빠져서 자만에 빠지는 것도, 작은 어려움에 실망하거나 포기하는 것도 각각 그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작은 목표, 낮은 목표를 정해버리면 그것을 성취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난 양 자만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밭에 곡식이 많아요. 이걸 어떻게 하냐? 그 곡식을 다 거두어서 지금 내 창고에 다 넣으려니 창고가 넘쳐요. 그럼 내가 창고를 더 지어서 거기에 다 쌓고 평생 먹고 마시고 즐겨야 되겠다. 이 부자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수준에서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곡식이 나면 창고에 쌓아두는 것을 알았고 이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곡식이 나니까 창고에 쌓아두는 것 밖에 몰랐어요. 그러니까 창고를 더 지어서 거기에다 쌓아두고 이건 내가 평생 먹어도 되니까 내가 평생 먹고 마시고 즐기자-이게 그의 꿈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또 다른 계획을 세웠으면 어떻게 할까요?
내가 곡식을 많이 거두는 것이 내 계획이었는데 정말 내 창고가 차고도 넘쳤구나! 그럼 이 남은 곡식을 어떻게 할까? 어려운 사람을 도울까? 이걸 가지고 또 무슨 새로운 일을 할까? 이런 순간부터 그의 삶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한계 속에서 그게 전부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늘 낮은 목표 정해버리면-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작은 성취의 자만에 빠져서 그것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표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마음도 다릅니다. 힘들다고 늘 쉬운 목표만 정해버리면-좌절하기 싫어서 어려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우리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도 저학년이면 쉬운 문제를 풀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점점 어려운 문제로 갑니다. 풀기 싫고 귀찮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쉬운 문제만 풀면 우리의 실력이 별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좀 어려워도 어려운 문제 점점 풀어보고 그런 과정 속에서 다 맞지 못해도 결국 우리 실력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 모든 일을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목표를 정했다면 도달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결국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어떤 목표를 설정했을 때 내가 왜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까라고 논리를 개발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래서 못했고 이래서 못했고 이래서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한 것은 당연해요.’ 라고 논리를 개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지금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럼 내가 그 일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논리를 개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한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고, 비록 어려워도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것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이루기 위한 수고를 쏟아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한 방법, 마음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내가 실패했다는 마음의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고, 늘 편하게 살다보면 모든 기능이 약화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몸이 너무 피곤해요. 늘 일에 지치고 피곤해서 집에 오면 쓰러져 자고, 기껏해야 목욕해서 풀고 자고 뭐 이렇게 하다보면 나중에는 우리 몸은 점점 약해지고, 면역력도 기능도 모든 근육력도 다 점점 약해질 겁니다. 점점 피곤해 질 겁니다. 그런데 도저히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 해서 과하게 하면 안 되겠지만 내게 주어진 형편껏 에서 ‘그래도 내가 조금이라도 좀 더 움직여보자’ 하고 몸이라도 한 번 풀고, 운동이라도 하고, 조금씩 시간을 늘여보고, 없는 시간이라도 좀 더 짜서 ‘내가 운동이라도 해보자’ 그러면 의외로 우리가 더 피곤해지지 않고 덜 피곤해지고 우리의 모든 기능도 강화될 겁니다.
쉽게 살면 편한 것 같지만 우리는 점점 나중에 갈 곳이 없어요.
늘 말씀드리는 것인데 오늘 또 따라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못해서, 힘들어서, 하기 싫어서, 귀찮아서 안하고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집니다.
하기 싫어서, 못해서, 힘들어서, 귀찮아서, 안하고 못하면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져요. 우리는 나중에 피해서 달아나다 도망갈 구멍이 없어져요. 어려워도 정한 목표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보면 결국 우리의 삶은 점점 달라집니다.

우리 성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여기 굉장히 쉬워’ 편하게 연습도 안하고, 잘 할 수 있는 이런 곡만 하다보면 좀 편하기는 할 텐데 실력이 별로 늘지 않을 겁니다. 정말 수준에 어려운 것 같아도 평상시에 연습하는 정도 가지고도 안 되면 시간을 쏟고, 더 노력하고, 애쓰고, 그 곡을 부르기 위해서 일반 다른 기능의 연습까지도 해서 결국 그 곡 하나 끝내고 나면 그 사이에 우리가 한 번 하면 능력이라고 한 수준 올라갈 겁니다.
거기서 또 출발해서 한 수준 올라가고 그러다보면 우리는 훌륭히 연주를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어려워도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보면 우리의 삶은 점점 달라지지요.
특별히 그러면 우리가 어떤 목표를 정했는데 내 힘과 능력이 약하고 상황이 좋지 못해서 그것을 이룰 수가 없다면 뭘 의미할까요?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내 힘이 약하고, 내 능력이 안 되고, 내 주변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이루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어렵다는 의미-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렵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도움이 꼭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라고 말씀하시지요.
여호와는 피곤하지 않고 곤비하지 않고 명철이 한이 없으셔서 어떤 능력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니 그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극복의 어려움이 없이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쉽게 얻는 것 치고 좋은 것 없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반드시 그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치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구원을 값없이 얻었다고 했는데 값없이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귀한 값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겁니다.
우리는 값어치 없이 값싸게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정말 이 세상에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생명을 값으로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극복의 어려움 없이 좋은 것을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쉽게 얻은 것치고 보석일 수는 없습니다. 보석은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극복의 어려움을 통하여 가장 고귀한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승리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청년부 초청의 축제를 하는데 청년들이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더군요. 사실 청년들이 밖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요새 서현역에도 매주 가서 전도하고, 야탑역에 가서도 전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 같아요. 제가 보니까 한두 사람 가서는 잘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무더기로 가니까 거기에 묻혀서 가서 잘 하는 것 같아요. 한 120명씩 이렇게 간데요. 그러니까 분위기에 밀려서 한단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아는데 역에 가서 백 몇 십 명씩 가서 찬송하고 퍼포먼스도 하고 여러 가지 많이 하는데 그거 보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죄송합니다. 목사가 믿음 없는 소리해서요.
그럼 오지도 않는데 왜 가서 하느냐? 굉장히 중요합니다.

청년들이 거기에 가서 그 일을 열심히, 준비도 많고, 비용도 많이 들고, 노력도 많이 해요. 그걸 보고 오는 사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해야 되느냐?
그 과정 속에서 청년들의 믿음이 자라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영적인 야성이 자라나는 거예요. 그저 그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이 생겨나고, 준비하는 과정 속에 기도하면서 또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담대히 복음을 외치면서 또 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지나가다 아는 사람도 볼 것이고 모르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마음속에 복음에 대한 비밀을 스스로 터득해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오는 사람은 몇 명 안 되지만, 그 사이에 이 청년들의 믿음이 강력화 돼서 그 이후에 몇 명이 아니라 몇 십,명, 수백 명, 수천 명까지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낼 능력이 청년들에게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분위기속에서 매일 중요한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잘 되는 곳에 계세요. 그러면 잘되는 승리의 논리를 배우게 됩니다. 어떤 일이 안 되는 곳에 있다 보면 늘 왜 실패를 할까하는 실패의 논리를 배울 수밖에 없어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심리적인 방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되는 길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적인 분위기 자체가 ‘야 나가서 전도하자’ 라는 분위기니까 가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해봐야 몇 명 오지도 않는데 뭐 하려 하냐? 창피하게’ 이런 분위기이면 안 되는 겁니다.
저는 저희교회 성도님들을 볼 때 참 마음이 기쁘고 감사하고 너무 목사로서 마음이 감격스럽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전도하는데 있어서는 아주 탁월합니다.
제가 들리는 얘기로 분당에서 전도하는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거나 우리 교회 교인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얼마나 전도를 많이 하시는 겁니까? 보면 전도를 안 하는 것이 이상한 것 같아요. 이웃사랑 초청축제나 평상시에도 늘 그러는데 전도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같아요. 가서 전도를 하는데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이게 영적인 분위기입니다. 영적인 승리의 기운을 잡은 겁니다. 위축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으세요.” 라고 말할 때 위축되면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고 당당하게 그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우리는 극복해야만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저희 교역자들이 지리산 종주를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교역자들이 한 삼십 명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갔습니다. 그래서 젊은 목사님들이야 뭐 왜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전도사님들인데 오십 넘은 전도사님들도 계셨는데 '지리산 종주를 한 번 해야 되겠다'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연습을 하고 가야 되잖아요. 모든 것이 연습을 안 하고 가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여기 동네 맹산을 갔는데 거길 못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지리산을 올라갑니까? 2박3일로 갔는데도 상당히 길더라고요. 거길 못 올라가더라고요. 거기 가서 몇 번 쉬었다 가도 못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 제가 안 갔겠습니까?

그때부터 매일 새벽기도 끝나고 훈련을 하고, 또 날 잡아서 주변에 있는 작은 산들도 가고, 이렇게 해서 결국 갔습니다. 몇 달 훈련을 해서 거기를 갔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출발해서 다 잘 마치고 왔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기쁘더라고요. 왜냐하면 30명 있어도 맨 처음에 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맨 마지막 30등에 있는 사람에게 기준을 맞추어서 가야 하는 겁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다 갔다는 것은, 또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갔다는 것은, 글쎄 제 표현은 이런데 그 분들의 표현은 잘 모르겠습니다. 참 감사한 거였습니다.

어디든지 그렇지만 첫날이 제일 힘들지 않습니까? 굉장히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거기 가서 자고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 산장까지 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속도도 첫날은 좀 늦었습니다. 그래도 가긴 가야 하니까 선발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두 분을 미리 보냈는데 목표한 산장 말고 중간에 산장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가다가 거길 보니까 목사님들이 거기에 앉아 있더라고요. 아니 왜 여기앉아 있는가요? 했더니 여기서 거기까지 갈려면 해도 어두워지고 했는데 너무 멀어서 도저히 오늘 안 된다고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해서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 교육받은 데로 하자 우리 뭐라고 교육했냐? '약속대로 정한대로'
우리 어떻게 약속하고 어떻게 정했냐? 우리는 저 멀리 있는데 가서 자기로 정하지 않았느냐? 그럼 우리는 약속대로 정한대로인데 왜 여기 있느냐?

두 번째 우리 뭐라고 교육했느냐? '동네 지나가는 아저씨 말 듣고 우리 운명을 걸지 맙시다.' 항상 그렇게 교육하거든요. 동네에 지나가는 사람 얘기 듣고 우리 운명을 걸면 안 된다. 그렇잖아요. 아무도 모르는데 동네 사람들이 얘기한다고 동네 사람도 아니에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얘기한다고 계획에 없는 것 거기 앉아서 “여기서 자고 갑시다.” 하고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 무모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배운 대로 해야 되니까 두 가지 배운 사실을 적용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비는 부슬부슬 오고 밤은 어두워졌고 길도 미끄럽고 상당히 난감하죠.
그런데 결국 아주 잘 가서 밤에 늦게 도착했지만 잘 가서 예정한대로 아주 늦은 시간이지만 도착했습니다.
아주 새벽에 출발했지만 그날 마침 비가 왔어요. 최악의 상황이지요.
거기에 도착하니까 다음날부터는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겁니다. 더 어려울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둘째 날부터는 잘 가서 셋째 날까지 잘 마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는 설악산 대청봉을 갔습니다. 사실 그게 더 어렵거든요. 처음에 가는 사람들은 꼬박 걸어서 12시간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갈 때는 아무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게 더 어려운 거거든요.
극복하면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삶속에서 극복해서 얻을 수 있는 것과 그리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극복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어려움을 극복해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높은 목표를 성취한 사람은 더 높은 목표를 정하게 됩니다.
우리 목표는 끝이 없는 겁니다. 끝이 없다고 하면 ‘끝내고 수고하면 끝도 없고 한도 없겠네’ 하고 피곤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죠.
여러분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갔다고 합시다.
“야! 됐다. 이걸로 끝이다. 그리고 이제 산에 절대 안 간다.” 그럴까요? 그 사람들은 다음에 또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겁니다. 만약에 거기에 올라갔다고 해서 끝이라면 어리석은 부자하고 똑같아지는 겁니다. 인생에 목표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끝없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피곤한 것일까요? 아니죠.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해서 내가 달려갈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이 우리 믿음의 사람의 과정입니다.
4부 예배니까 이런 말씀드려도 될 것 같네요. 한 주 은혜 받으면 은혜 다 받았으니까 다음부터는 교회 나올 필요 없어요? 우리는 또 새로운 은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이 설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너무 가슴이 설렙니다.
봐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장형입니다. 주위의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확장형입니다. 처음에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삶의 길이라는 것은 정말 끝없이 확장되고 정말 하나도 우리 마음속에 예상치 못했던 일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끝까지가 뭘 의미할까요? 우리가 땅끝까지 다 밟을 수가 있을까요? 이 세상, 온 세상을 평생 다녀 봐도 다 밟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다하기까지겠지요.
우리 삶이 다 할 때까지 우리는 무엇인가 누리고 즐길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우리 삶에 임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그 말은 뭐죠? 하나님이 내게 은혜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가면 더 큰 꿈과 계획을 이루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아까 나다나엘과 만난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렸죠. 이제 빌립의 인도를 받아서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지요?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예수님 나를 어찌 압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는 것을 내가 알았다’
‘아니 예수님 나를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십니까?’
이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 모습입니다. 그 때 이 나다나엘이 깨달은 겁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적도 없는데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이렇게 고백한 겁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저는 이 말이 마음에 그렇게 감격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아래서 보았다고 믿느냐’
자 따라서 합시다.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저는 이 말이 그렇게 감격스럽습니다.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심정이 들 때가 있고, 감격스러울 때가 있죠. 믿음 안에 감격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이겁니다.
<너는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께 감사할 일도 많고,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격할 일도 많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 기쁘고 감사한 일이 참 많아요.
그런데 순간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그러나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시간이 가면서 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는 거죠.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역사를 보는 겁니다. 우리 2007년도 시작하면서 뭐라고 말씀드렸죠?
죄송합니다. 또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보며, 해보지 못한 일을 하며, 우리의 영역 밖이라 여겼던 것을 우리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의 확장을 이룹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거기까지 가 본적이 없어요.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거기 가는 겁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능숙하게 합니다. 이건 내 능력 밖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을 내 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의 확장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한 번도 못한 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일, 이건 내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을 내 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하나님의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 우리들에게 있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뭐라고 말씀합니까? <29절> 이하에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으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제가 일 년 중에 교회에서 많은 기도회가 있지 않습니까?
가장 뜨거운 기도회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여러분 뭐겠어요?
우리 교회에서 일 년 동안 이루어지는 모든 기도회 중에서 가장 뜨겁고 열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회가 뭐겠습니까? 여러분들 잘 아시네요.

11월에 있는 수험생기도회입니다.
수능고사 보는 날 그 수험생기도회 때 부모님들이 오시는데 정말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는 안 할 겁니다. 너무너무 뜨겁게 기도하시는데 애들 시험 보는 시간에 똑같이 기도하시는데 자세라도 흐트러지면 아이들 마음이라도 흐트러질까봐 똑바른 자세로 하고, 잠시 딴생각하면 아이들이 시험보다 또 헷갈릴까봐 딴 생각도 못하고, 집중해서 눈물 뚝뚝뚝뚝 떨어뜨리면서-자기 죄지은 것도 없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합니다. 제가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식들이 저걸 알까? 자식들이 저걸 알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걔는 시험장에 갔어요. 부모가 눈물을 뚝뚝뚝 흘리면서 정말 숨도 제대로 안 쉬고 기도하는 것 모를 것 같아요. 우리 엄마 기도하러 갔겠지. 엄마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들도 오시더라고요. 직장 하루 휴가내고 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자들만 많이 있는데 남자가 가서 기도하면 창피해’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날은 정말 너무너무 간절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제가 하나님이라고 해도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들어줄 수는 없는데 제가 하나님이라면 들어줄 것 같아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들어주셔야죠.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까?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까? 오늘 얘기하잖아요. 정말 너희의 사정을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정말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자신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나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 인도하실 겁니다.
우리는 우리를 믿어야 됩니다.

동네사람에게 물어보고 인생결정하지 말고, 우리는 모든 얘기를 참고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판단해서 내가 결정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셔야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와도 내가 한 최고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이 결과는 나에 대한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여 수용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날마다 남을 탓합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이 하라고 해서 안 되면 “아, 당신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잖아.” 하고 탓해봐야 아무것도 좋아지는 것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나 자신을 믿읍시다.
자신 있게 나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결과가 와도 나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에베레스트 산 오르려고 목표를 정해야 할 것인가, 도봉산 오르려고 목표를 정할 것인가에 따라서 모든 것은 아주 달라집니다. 이 교회는 도봉산 오르는 것이 목적인 교회는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목적으로 교회가 이루어졌다면 처음에 20년 계획을 안 세웠을 겁니다. 아니 무슨 도봉산 오르려고 20년 계획을 세웁니까?
이 교회가 처음에 하나님 앞에 20년 계획을 세우고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분명한 계획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누구죠? 성도예요.
이 교회라는 것은 이 성도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축복하신다는 것은 성도를 축복하시는 거고,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그저 편안하고 좋게만 지내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꿈과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오와 작정을 가지고 달려가다 보면 우린 어느새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서 있는 것 같은 우리 모두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정말 내가 그 정상에 서 있는 우리 성도들을 보기라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 육안으로 보려면 꼭대기 부근까지는 올라가야 눈으로 보이지 산 아래에서는 안 보이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사람보고 기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산꼭대기에 같이 올라가서 기쁨으로 아름다운 하이파이브를 나눌 수 있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이 은혜 받는 것을 보고 ‘참 기쁘고 감사해’
다른 사람이 간증하는 것을 보고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데 나도 그들 중에 하나가 되셔야 합니다.
나도 그들 중에 하나가 돼서 나도 은혜 받고, 나도 기쁘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않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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