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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에 피곤함이 왔을 때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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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60회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씨가 출연한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남편이 죽은 후에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고향인 밀양에 살고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 서울과는 아주 많이 다른 낯선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면서 남편과의 유일한 유산인 아들 준이를 양육하는 일에 전력을 쏟습니다. 워낙 아이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자 아이의 성격을 변화 시키려고 웅변 학원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원에 갔던 준이가 집에 돌아오질 않습니다. 전전긍긍하면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신애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유괴범의 전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유괴당한 부모의 당황하고 무서워하는 엄마의 리얼리티를 잘 보여 주었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었습니다. 결국, 아이는 시신으로 돌아왔고, 신애는 그 받은 상처와 충격을 받아 방황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아이의 살인범은 웅변학원 원장이었고, 더욱 절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절망하는 중에 약국집 부부가 그녀를 교회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의 가슴 속에 맺힌 한을 다 토해 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힘들게 고민한 그녀는 결국 범인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라고 용서의 고백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일입니까?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안했습니다. 신애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용서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유괴범의 얼굴은 정말 평안했던 것입니다. 유괴범은 용서를 말하는 신애를 향해 "저는 주님의 은총으로 평안합니다. 여기와서 하나님을 믿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벌써 이전에 저의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았습니다. 이제 평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그 모든 시간이 얼마나 의미가 없고 허무했던 공허의 시간들이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의문을 던집니다. 그녀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왜? 내 아들이 죽을 때에도 도와주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비롭게 이 유괴범을 용서해주고 평안을 주었는지 그리고 아이의 어미인 내 자신만이 이런 유괴범을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이미 하나님께서 다 해 버리셨다니..." 그녀는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애는 범인과의 면회가 끝나자 실신하고 맙니다. 이 실신이 있은 후 주인공 신애의 삶은 또다시 완전히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어떤 죄인도 살리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 남편과 우리 아이는 죽게 내 버렸는지?”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결국,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시위로 자신을 교회로 인도한 약사의 남편을 유혹하고,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그만 정신병자가 되고 맙니다.

1. 자신의 형편을 보면 인생이 힘들고 지치게 된다.

  우리는 주인공 신애처럼 인생의 피곤함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화에 나오는 어느 주인공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850:1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승리자였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승리 후에 그는 너무나도 큰 좌절과 낙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에서 죽였을 때에 그들을 먹여 살리며그들을 배후에서 도왔던 왕후 이세벨의 위협이 그를 두렵게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그것은 바로 환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네가 죽인 저 사람들의 한 사람처럼 만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은“내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할 것이라”고 엘리야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세벨이 믿는 신은 참된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섬기는 신은 이미 갈멜산에서 무참히도 참패한 거짓 신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엘리야가 도망을 쳐야 했습니까?

  하루 전만 해도 엘리야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멜산에 섰을 때 그는 능력과 권능의 사람이었습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단을 새롭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영적인 큰 권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엎드려 무려 7번까지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을 열고 닫고 하는 능력과 큰 권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엘리야는 크게 낙심하고 인생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낙심하고 상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오늘 말씀 3절을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자신의 형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낙심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 형편을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환경에 붙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그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큰 폭풍을 만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큰 폭풍과 파도와 싸울 때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환경을 보고 두려워 했습니다. 극심한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해 왔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주여 어찌하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 볼 때는 갈릴리 호수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보고 파도를 보자 그는 갈릴리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붙들어 잡아 올리시면서 그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적으면 물에 빠집니다. 환경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에게는 환경이 참 중요했습니다. 어떻게 환경을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에게도 환경이 참 중요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죽이겠다고 군사를 보내는 이세벨의 정치적인 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이나 엘리야는 환경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상황을 아주 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환경을 다스리고, 믿음으로 어둠의 권세를 쫓아 내기 때문입니다. 따라합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매주 좌절하고, 매일 낙심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창조하신 후에 복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생육하는 복입니다. 둘째는 번성하라는 복입니다. 셋째는 다스리라는 복입니다. 넷째는 충만하라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환경에 지배 받는 인생이 아니라 환경을 다스리는 주인으로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합니다. “우리는 환경을 다스리는 주인공이다”

  엘리야는 환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순교의 정신을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과거에 갈멜산에 설 때 그는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섰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가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고 결단했을 때 그의 마음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는 환경을 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자 갑자기 두려움의 영이 그에게 역사했습니다. 공포가 밀려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하겠다는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위협 속에서 우상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과 순교의 신앙으로 맞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설상 그들이 죽었다고 해도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 순교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5절에는“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고 했습니다. 사실 생명을 포기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포기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생명을 포기면 환경에 결코 묶일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들에게 두려움과 위협을 주는 영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보라고 자꾸 말하는 영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앗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13:22)라고 하셨습니다. 성장하려면 환경을 보면 안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생명을 거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쟁처럼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그분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하며 형통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엘리야처럼 환경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환경을 보면 반드시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보고 낙심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심지어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절망하여 밤을 새워 통곡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형편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들의 형편 즉 환경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럼,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가 내 환경은 참 좋다. 나는 이 환경에 너무 너무 만족한다.”이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제가 집들을 심방을 가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집을 사서 이사를 한 후에 심방을 가서 축복하면서 예배를 드리면 참으로 감사해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고 그렇게 입이 찢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이사 참 잘 가셨어요. 하나님이 참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 주신 것같아요. 감사하지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이제 좁아서 안되겠어요. 새로 집을 마련해야 겠어요. 집이 마음에 안들어요”이렇게 말합니다.

  직장도 어렵게 취직했으면 감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기쁘게 잘 다니다가 몇 년이 지나면 환경이 어떻고, 상황이 어떻고 해서 감사가 사라집니다. 입에서 불평이 나옵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결혼할 때보면 남자고 여자고 너무 예뻐서 죽고 못 살 정도입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면 바꾸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저에게 아직 바꾸고 싶다는 말씀을 안하고 계십니다. 가정이 바뀌면 안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바뀌면 안됩니다.

2. 그래도 우리를 떡과 물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엘리야가 이렇게 자신의 형편으로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광야로 도망쳤을 때 그이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그는 4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는 살기 위해 광야로 도망친 것입니다. 지친 몸과 마음에 안식과 평안을 얻기 위해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도 도망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금 거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이중적인 모습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피곤하고 지치면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삶과 죽음과 낙심과 절망 속에서 평안을 추구하는 이중적인 엘리야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생명의 물과 떡을 공급해 주시고,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위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말씀인 떡과 물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통해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면서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드시지요? 힘들고, 지치고 낙심이 되시지요? 환경을 보면 소망이 없고, 한숨만 나오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치고 피곤함으로 인생의 혼돈에 빠진 엘리야를 위로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기를 내어 일어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가는 길에서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지친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생명의 떡과 물을 먹고 마시고 힘을 내었던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명의 물이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은 진정한 우리들의 위로자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평안이요 평강이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마음게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를 위로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씀의 떡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고, 생명의 물이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들에게 쉼과 안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말할 수 없는 성령님의 크신 평안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참아내면서 오직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환경을 보지 말고, 나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주는 떡을 먹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고 힘을 얻어 인생의 승리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 나에게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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