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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달음이 있는 신앙 (마 1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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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각기 다른 환경적 영향과 특징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또한 자라가는 과정도 각각 다릅니다. 그에 따라서 성격도 달라지고 기질도 변합니다. 각각 다른 성격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 약 5%의 사람들은 변화를 즐기며 모험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항상 창의적인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또 사람들 중에는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유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변화를 원하기는 하는데 소극적이라서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남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하고‘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하는 것까지 생각하다 보니 쉽게 변화를 이룰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대략20%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추종자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남이 가면 가고 오면 오고 남이 입은 옷을 내가 못 입으면 속상하고 남이 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면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이런 타인 추종형의 사람이 무려 70%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5%가운데는 자신의 고집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철학, 생활 태도, 방법이 무너지면 인생이 망가지는 줄로 생각해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아주 고집불통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골치입니다.

사람이란 때로는 배워서 알아야 하고, 익혀서 깨달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배우겠다, 내 철학대로만 살겠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것과<지혜>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들으면서 기억하고 기억이 축적되어서 논리적으로 정돈해서 이해가 됨으로써 그것이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건에 부딪히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지혜입니다. 말하자면 살면서 몸으로 부딪혀 가면서 거기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이 지혜를 주고 지혜가 믿음을 주고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실생활에서 생명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가운데는 무언가 알려고 하고 깨달으려고 하는 자세가 틀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아예 듣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듣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들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우리들이 이렇게 된다면 문제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종종 나옵니다. 그 중에 대표자가 있습니다.

요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근처 우물가에 앉으셨는데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나옵니다. 그때 말씀을 하십니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깨닫고 이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이 여자는 뭐라고 했습니까?“그런 물을 날 좀 주어서 이렇게 힘들게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주세요.”정말 맹추 같은 여자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요3장에 보면 유식한 사람 중에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바리새교인이요 당대 종교 지도자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네가 거듭나야겠다. 중생해야겠다.”라고 하십니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뭐라고 합니까?“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어찌 이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너는 이스라엘 랍비가 되어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정면으로 충고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상식에 집착을 해서 세상을 보고 살았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문제는 깨닫지 못하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워 말씀하십니다.“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배후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덩이로5000명을 먹이는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굉장한 사건입니까? 이런 엄청난 사건을 볼 때에 당연히 깨달음도 많고 느낌도 많고 감격도 커야 옳습니다. 아마 실제로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과 몇 시간 후에 그 깨달음이 없어지고 맙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말씀하시기를“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누룩은 유대인들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옳지 않은 것들, 비 신앙적인 것들을 주의해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누룩”하시니까 제자들이‘아이쿠, 빵이 없구나. 우리가 빵을 준비하지 못했구나!’고 완전히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서로 시비를 벌였습니다.“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겠지요.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그래서“너희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내가 지금 빵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까짓 빵 정도의 문제라면 몇 시간 전에 기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 기적입니다. 그래서 인간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경험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한 일이 있을 때에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기적은 많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든 곳에는 기적도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적이라는 말을 달리 표적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일어난 일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 성경에 어떤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건은 저 사람에게 나타났지만 말씀은 나에게 하고 계십니다. 어제 된 사건이지만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2000년 전에 된 사건이지만 지금 새롭게 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나 기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남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몇 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제자들은 그 이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큰 능력을 보고도, 감격하고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떡 하나 없는 것 가지고 시비를 벌이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참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지금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로 서로 헐뜯고 있단 말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을 보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더군다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들로 종종 다툽니다. 깨달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한참 잘못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라도 할 때 함부로 하지 말고 생각하고 해야 됩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더 그렇습니다. 생각도 하지 않고 내뱉어 버리는 말이 불씨가 되어서 문제를 일으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나 생각 없이 하는 말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신앙 없는 말이 문제가 됩니다.[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적어도 세 가지를 생각하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실 된 말인가’하고 물어보라 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남의 말이라고 하면서.“뭐, 그런다더라.”,“글쎄, 그렇대”이런 말을 잘 합니다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누가 뭐라 했든지 내 입으로 말하는 한 그것은 나의 말입니다. 남의 말이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남의 말이지만 내가 하면 내 말입니다. 나를 통해서 듣는 사람은 내 말로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말은 조심도 해야 하지만 책임도 져야 됩니다.

결론은 뭡니까? 쉽게 이야기하지 말란 말입니다. 특히나 신앙인은 자기가 하는 말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해야 될 말인가 이 상황에 꼭 필요한 말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확연히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물건이 없어져서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다가“그 사람이 평소에 손버릇이 못됐다던데..”하면 졸지에 도둑놈 만드는 겁니다. 말조심해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제자들, 어느 사이에 5000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보았건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감격도 없습니다. 그 능력도 잊어버리고 함부로 서로를 원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깨닫지도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어찌하여 서로 의논하느냐.”바리새교인의 누룩이란 외식주의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 이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비유해서“한 번 받으면 자꾸 퍼져나간다.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조심해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려는데 이 중요한 교훈 앞에 깨닫지 못하고 어째서 떡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 불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두 주일도 못 가서 그 은혜를 잊고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결정적인 죄목이 원망 죄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함부로 말하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깨닫지 못하느냐?”,“기억하지 못하느냐”여러분,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됩니다. 그 큰 은혜에 감격했으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살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습니다. 이 어려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큰 은혜에 감격하는 순간 오늘의 모든 문제가 시원하게 풀려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깨달아야 은혜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능력으로 바꾸어집니다. 결국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기억하고 그 기억한바 은혜로 오늘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합니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합니다. 어떤 분이 정치인의 IQ도 0.3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 것을 보면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하고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날의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옆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복 받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IQ 0.3을 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받은바 은혜에 대하여 깨달음이 있어서 늘 감사하고 그 은혜 속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 받으면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깨달음이 없어서 늘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행하면서 믿음 없는 자처럼 살아가고 계십니까? 부디 깨달음이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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