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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닮도록 고치자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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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의 책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교회의 일곱 유형을 보여준다. 연대기적으로 교회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일곱 시대를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지상의 모든 교회는 언제 어디서든지 이 일곱 유형의 교회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교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교회는 주님의 돌보심 속에 있다.

계1:12을 보면 요한 사도가 주님과 함께 일곱 금촛대를 본다. 일곱 금촛대 사이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뜻이다. 계1:20下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하였으니 주님이 항상 교회와 교회 사이를 다니며 돌보시는 것이다. 머리 되신 주님이 감독, 치리하시며 명령하심을 따라 철저히 주님 중심으로 움직이는 성도들이 진정한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는 다른 권세자의 말에 의해 치리 받아서는 안된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하였다. 명령자가 예수인 것이다. 

2) 교회는 연합해야 한다.

‘일곱 금촛대’라 하였다. 일곱은 완전수다. 하나님의 숫자다. 6은 완전수가 아니다. 하나가 빠진 사단의 숫자다. 5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되려면 7이어야 한다. 이는 다양한 교회가 연합함으로 온전케 됨을 보여주는 뜻이다. 교회는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머리로 하는 참교회라면 온전하도록 연합해야 한다.

3) 교회의 최고 자랑은 믿음이다.

촛대를 만든 재질은 금이다. 금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녹슬지 않는 믿음을 의미한다.

벧전1:7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고 하였다. 믿음은 최고의 보석인 금 이상의 보화다. 교회는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 신앙 고백이 있는 곳에 교회는 든든히 선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마16:18의 약속처럼 항상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교회가 된다.

4) 교회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비추는 사명이 있다.

주님은 왜 요한에게 교회를 금촛대의 환상으로 보여주셨나? 빛을 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교회는 언제 어느 때이든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이 사명이다. 기쁨의 빛, 생명의 빛, 진리의 빛, 의와 화평, 거룩의 빛을 발하여 슬픔과 죽음과 거짓과 더러움을 드러내고 몰아내야 한다.

빛이 비추이면 다 드러난다. 숨겨둘 수 있는 것이 없다. 빛이 비추이면 정화되고 깨끗하게 된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빛이 됨에 있다.

우리는 일곱 금촛대가 일곱 교회라는 이 간단한 환상 속에서 건강한 교회를 알게 된다. 그 교회는 바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나와 여러분이다. 사람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 교회가 귀하기에 주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있다. 그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다.(계1:20) 바로 주의 사역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자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메시지를 받아 교회에게 그 계시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오늘의 본문 속에서 주님이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고쳐라. (계3:16)

라오디게아 지역은 온천이 흐르는 지역이다. 그런데 치료의 효과가 있는 온천은 냉천이든지 열탕이든지 차고 더운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이렇게 식어버리고 저렇게 데워진 미지근한 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미지근한 물은 사실상 하수도로 버려지는 물이었다. 미지근한 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신앙의 행위도 미지근한 것은 주님은 싫어하고 역겨워 하셨다. 그냥 두는 것이 아니다. 미지근한 행위는 토해버리는 역겨움이었다.

계3:15을 보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신앙 행위가 확실해야 한다. ‘냉냉하든지, 뜨겁든지’란 의미는 살려내는 신앙, 치료하는 신앙 행위, 회복하고 힘을 돋아주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지근한 신앙 행위는 잘못된 신앙에서 온다. 무기력, 망설임, 나약함, 무정함, 게으름, 도전을 싫어함 등 이 모든 것이 미지근한 모습의 원인들이다. 적당하게 넘어가는 태도, 기회나 엿보고 자리를 차지하는 태도 등 미지근함과 관련되는 모든 생각과 행위의 태도들을 청산하자.

둘째, 거짓된 부요 의식을 고쳐라. (계3:17)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그런대로 잘 살았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았다. 그것이 곧 신앙의 수준인 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자만하였다. 아직도 변화되고 성장할 것이 많이 있는데 잘못 생각하였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자기의 생활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자족인 듯하나 그것은 오만함이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실은 부요하다고 생각하는 저들이 곤고하고 가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3:18에서 주님은 저들을 권한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금은 믿음이다. 흰옷은 속죄와 성결이다. 안약은 말씀의 능력이다. 저들은 영적 부요자가 아니고 벌거벗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내가 신앙의 부자라는 이 오만은 정말 고쳐야할 병든 모습이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말 믿는 자처럼 자처하고 부자라, 부요한 자라, 모자라는 것이 없다는 듯 으시대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회주의의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닌 북녘 땅의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바라보면 우리는 부끄럽고 신앙이 무너져 있음을 본다. 「예수님 전사들의 수칙」이라는 고백문을 보면 ①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요, 승리이다. ② 칭찬 받는 것보다 욕 먹는 것을 먼저 배워라. ③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은 인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주위의 고통 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④ 사랑이 사랑을 낳고 또 그 사랑이 새로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 ⑤ 성경이라는 잣대로 자신이 먼저 살아야 한다.

그들은 고통과 억압 속에서도 실천하고 행동하는 신앙을 다짐하고 있다. 이 땅에 1,000만 크리스챤이 있지만 고난을 받아도, 욕을 먹어도, 사랑의 전사되어 몸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있는가?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 고난받는 형제에게 도움의 손, 기도 해주는 입, 얼싸안으려는 가슴이 없었던 신앙, 그저 오만하기만한 신앙을 회개해야 한다.

셋째, 영적인 무지함을 고쳐라. (계3:17下)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계3:17下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책망하셨다.

모든 일은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계3:19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쳐야 한다. 배우고 듣고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을 모습을 보라. 계3:14을 읽어볼 때 고침을 받아서 따라가야 할 주님의 모습은 책망받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① 미지근함이 아니고 모든 것에 분명히 예하여 영광 돌리는 아멘의 주님

② ‘이만하면 된다.’는 오만이 아니고 더욱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서 열정과 헌신이 넘치는 주님

③ 영적으로 무지한 신앙이 아니고 더욱 창조의 근본이신 모든 것을 새롭게 고치고 만들어 역사하는 주님

꼭 필요한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교회가 이 주님의 모습처럼 변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과 너무도 다른 모습 그대로 두면 안된다. 어떠한 핑계를 앞세우지 말고 주님 닮도록 고쳐야 한다.

나는 북녘 땅을 돌아보면서 회개하였다. 선교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북방 선교에 대하여 언제나 미지근하고 오만하고 무지하였던 것을 회개하였다 다시 열심을 내고 고침 받아야 할 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주님 닮도록 고침 받아야 할 자는 나의 영혼이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주님의 모습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입니까? 행여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열정없이 미지근하고 무기력과 게으름 속에 머물면서 부요하다고 착각하는 삶의 계속해 왔다면 열심을 내자. 잘못된 것을 고쳐서 주님 닮은 건강한 교회로 세우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건강한 교인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자. 이기는 교회, 이기는 성도가 되자.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주님 보좌에 앉게 해 주신다. (계3:21)

오늘 말씀은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로 끝이 난다. 오늘의 메시지는 성령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듣는 귀가 있어서 그대로 순종하고 고치고 회개하고 열심을 내면 이기는 성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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