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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 2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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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 90:10).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애는 밤의 한 순간처럼 잠시잠간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 짧은 시간마저도 편안한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이 많고, 또 언제 질병과 재난과 죽음이 밀어 닥치게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들이 덫과 같이 갑작스럽게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올 이 모든 일들을 대비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1.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여야 됩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인생을 마음대로 좌우하거나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개인이나 어떤 공동체라도 자율적인 능력이 없을 경우 불가불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게 됩니다. 사람도 결국 다른 세력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요 그 주인입니다.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도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습니다. 생명을 주신분이 하나님이요(창 2:7),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사 2:22).

오늘날 고도화 된 인간의 지식과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문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한없이 교만해 져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무엇이나 마음 먹은 대로 다 행할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자기의 머리카락 하나도 검게 하거나 희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마 5:36).

2) 마귀에게 얽매여 있습니다.

원래 타락한 천사를 마귀라고 부르는데(유 1:6), 이 마귀를 두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살후 2:4), 악한 영(엡 6:12), 미혹하는 영(요1서 4:6)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마귀의 정체는 어두움의 세력을 대표하며 공중의 권세를 잡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시조 아담이 타락한 후에 모든 인류는 사실상 마귀의 세력 안에 사로 잡혀있습니다. 에베소서 2:2에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그의 도구인 죄와 죽음을 무기로 하여 인간을 위협하고 지배하게 됩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사람과 사람끼리 얽혀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가까이는 가족에게서부터 친구와 이웃, 그리고 사회나 국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살 수 없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행동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가족 때문에, 이웃 때문에, 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원하지 않는 일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까지도 자기 의지대로 좌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무능함과 능력의 한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2.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질병과 재난과 죽음 같은 원치 않는 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범죄한 인간이 겪게 되는 불행 중의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되면 인간이 무지하고 무능 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사건이라도 그 속성을 미리 알고 거기에 대비하게 되면 이를 극복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고 하였습니다(눅 21:36).

1) 예고 없이 오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는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덫’이란 짐승을 잡는데 쓰는 기구를 가리킵니다.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다 보이지 않게 잘 숨겨두고 짐승이 좋아하는 먹이를 가지고 유혹하여 끌어 들이고는 순간적으로 덮쳐서 꼼짝 못하게 잡아 버립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할 때도 중요한 길목에 복병을 숨겨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앞뒤로 포위하는 매복 작전과 같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3-4에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예외 없이 오는 것입니다.

질병과 재난과 죽음과 같은 것은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옛날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면서 “내가 지금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왕상 2:2). 히브리서 9:27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원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35절에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 필연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재난이나 죽음과 같은 것은 인간이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문제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인체의 구조도 질병에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과 같이 나이가 들어가면 사람에게 질병과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난도 그렇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재난과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있게 마련입니다(마 7:24-27).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전 3:1-2).

3. 신앙적으로 대처 하여야 됩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 하게 당하는 사건이지만 신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냥 불행으로만 생각하고 더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36절).

1) 착각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판단이 흐리게 되고 대처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신앙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치거나 더 큰 시험과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것은 평소 자기에게는 전혀 불행한 일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경우입니다. 혹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을 자기혼자만 당하는 불행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또 고난이 오거나 죽음이 예고되었을 때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단정 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인간의 시조 아담이 타락한 이후 모든 인류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숙명적으로 예고되어 있었습니다(창 3:17-19).

2) 지혜롭게 대처하여야 됩니다.

인간에게 오는 불행은 대부분 불가항력적인 것이어서 당하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그것을 거부하며 막아내겠다고 억지를 부린다든지 또는 남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대하여 전적으로 승복하면서 신앙적으로 대처 하였습니다(욥 1:21). 먼저 포기해야 할 것은 깨끗이 포기하며 체념하는 것이 좋습니다(삼하 12:23). 어떤 사건이 터지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매달려 허둥대거나 어떤 대책도 없이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것은 매우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3) 성도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죽음을 당했을 때도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살전 4:13).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이 캄캄한 지경에 이르렀더라도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게 되면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희망의 틈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시 42:5). 어느 때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 하시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십니다(롬 8:28). 시편 30:5에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오늘 하루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재의 고난보다 비교할 수 없도록 더 큰 영광을  준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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