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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 최대의 관심사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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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이 길 가시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영생의 문제를 질문하였을 때 그에게 대답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을 찾아 나온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마19:20에서는 이 사람을 “청년”, 눅18:18에서는 “관원”, 그리고 눅18:23에서는 “큰 부자”라고 하였다. 본문 22절에서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분명 관원이요, 부자로서, 사회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재물과 명예를 함께 가진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돈 많은 부자, 명예와 권세를 얻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고, 문제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 때문에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삭개오를 보라.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요, 바리새인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자신의 문제 때문에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인기와 명예, 물질이나 권세, 소위 성공출세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족하게 해주지 못한다. 돈 있으면, 건강에 이상이 있고, 건강에 이상이 없으면, 물질이 없고, 돈도 건강도 있으면, 자식이 문제인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100%의 행복을 주시지 않으신다.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할 제목을 주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전1:7=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세상의 모든 것은 바닷물과 같은 것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 17에 보니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꿇어 앉아” 물었다. 이 부자 청년은 종교적인 열심이 있었다. 
“달려왔다”는 말은 그만큼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시급한 문제였으며, 또한 영생을 구하는 열심히 대단했음을 의미하고, “꿇어앉았다”는 말은 그의 겸손함과 진실함을 가르친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말한다.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의 발 앞에 이 돈 많은 귀족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른 동기와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께 접근한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목수이고, 어부들이나 세리들과 어울려 다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대단한 용기이며, 예수님에 대한 깍듯한 예의였다. 자기의 체면과 자존심을 모두 버린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바로 이 자존심이다. 이런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은혜의 샘이 솟는다. 축복의 물고가 트인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시여”라고 호칭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이 구세주는 아니어도 훌륭한 선생님일거야” 라고 생각한 것 같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자, 석가, 무하마드, 같은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 니라” 라고 대답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라는 의미인가?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으로 알고,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그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은 모두 다 죄인이어서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 나를 너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면서 어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라는 뜻이다.
인간의 선은 진보적이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상대적으로 선할 수 있으나, 절대적으로 선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이다.

1.이 사람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이 청년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빵을 위해서, 또는 질병의 치료를 위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처럼 까다로운 질문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서 찾아 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문제는 “영생”문제였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영생문제이다. 영생문제 해결 없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무의미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3:11)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이 영생의 길을 찾고 있다.

그래서 빌립보의 간수는 바울 사도에게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라고 물었다.(행16:30)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가진 사람만이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다.

오늘 날도 영생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도, 이 청년처럼 뜨겁고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겸손하게 주님께로 달려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동기나 호기심, 그리고 피상적이며 종교적인 심리로 교회를 찾는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2.청년의 오해.
영생문제는 예수님을 향한 존경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경은 결코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을 탁월하고, 선한 선생님으로 대한다고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

이 청년은 영생문제를 무엇을 행함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부자 청년은 율법은 잘 준수하였으나 그것으로 영생을 얻을 확신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100% 지키면, 물론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롬3:20에 의하면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선해질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아니니”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네가그 동안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줄 알고, 열심히 선한 일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아직 영생을 얻지 못했느냐?” 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인간에 관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속여 취하는 것, 부모공경 이 여섯 가지 계명만 언급하셨다.
이는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율법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인간에 대한 계명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칭찬을 들을만하고, 훌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그 동안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켜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또 예수님께서 영생을 위하여 요구하신 것이 그 정도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우 자신감 있게 “이런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을 한 것이다.

이 청년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받으면서, 그 의미나 정신은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문자에 매여 지켰다. 그것은 형식적인 율법준수였다.

인간이 과연 율법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지킬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는 일이다. 우리 인간이 구약의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있다면, 신약은 필요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필요가 없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이지, 죄를 없이하거나, 구원을 주는 방편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착각했다.

더구나 율법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알고, 그 근본정신까지 지킨다는 것은 부패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하나의 꿈과 희망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21절에 의하면 그를 “사랑”하셨다. 물론 이 청년이 율법의 계명을 100%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키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쓴 그것만으로도 그를 사랑하신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믿음일지라도 진리를 추구하고, 영생 얻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주님이 유심히 보시고, 관심을 가지시며 사랑하신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사람은 깊이 살펴보면 누구에게나 부족한 것이 하나, 둘 있기 마련이다. 부족함이 전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일 것이다.

물론 이 한 가지 부족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아무개는 다 좋은데 욕심이 너무 많아서, 아무개는 다 좋은데 게을러서, 아무개는 다 좋은데 성격이 너무 급해서, 아무개는 다 좋은데 절제가 좀 부족해서, 아무개는 다 좋은데 너무 명예욕이 강해서 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그 부족한 한 가지를 고치고, 채워야 한다.

이 부자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그에게도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전체적인 흐름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 사랑이요, 수평적으로는 이웃 사랑이다.

이 사람이 도덕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일도 악한 일을 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선은 무엇을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데 있는 것이다.
문자적인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하더라도, 내면에 있어야 할 이와 같은 진실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외형적인 율법준수는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 청년은 자기가 손해 날 일은 하지 않았다. 돈 들어가지 않을 일만 부지런히 지켰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사기 등 이런 돈 들어가지 않는 계명만 열심히 지켰다.

그의 부족은 내적인 순종에서 비롯되는 진실한 사랑과, 자기의 희생인 것이다. 이 사람은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을 실천하는 일에는 힘을 썼으나, “하라”는 적극적인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였다.

19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그로 하여금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이웃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 도덕적인 책임,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함을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이러한 책임을 망각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일념으로만 살아간다면, 기독교는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종교로 전락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를 알아야 한다. 그 부족을 채워야 한다.

3.주님의 처방.
주님은 그에게 두 가지 처방을 내리셨다.
①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거지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너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영생을 얻으려고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켰는데, 율법의 정신은 사랑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네 있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그가 가장 귀히 여기고, 의지하고, 자랑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같지만, 과거에는 내가 주인이었고, 이제부터서는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써야 하고, 살아야 한다.

여기「가난한 자」는 꼭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약한 자요, 위로가 필요한 자요, 사랑이 필요한 모든 자들을 지칭하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보화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은혜요 축복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생이다.
②나를 쫓으라.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다. 믿지 않으면 따를 수 없다. 영생을 얻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따라야 한다.

영생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결론.
이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영생은 얻고 싶었으나, 재물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 가지 다 가지고 싶었다. 적은 것은 버리기가 쉬우나, 많은 것은 버리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그의 근심과 슬픔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데서 온 것이다. 만일 그가 순종을 택했더라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얻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재물이 우상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물질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중심에 자리 잡을 때 바로 우상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도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어떤 사람은 가난해야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수용하여 실천에 옮길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영생과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삶 가운데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된 성도란 가장 큰 가치를 영생에 두는 자이며, 영생의 길에 거침이 되는 것은 모두 끊어 버리고, 희생할 수 있는 결단을 가진 사람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영생문제이어야 한다. 구원문제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자기의 영생관과, 예수님의 영생관이 달라, 고민하고 슬퍼하며 돌아갔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따르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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