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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 (사 5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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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번 쯤 금식기도를 해 본 경험이 있을 텐데 사실 금식이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기에 한 끼만 굶어도 불편해지고 때로는 마음에 화까지 생기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찬란한 절경을 봐도 배가 부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 여성이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하루 동안 금식기도를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쓴 글입니다.
  “점심까지는 그런대로 잘 참아왔다. 저녁이 되니까 이제는 기도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 종류가 내 머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떡볶이, 순대, 김밥, 통닭, 족발, 튀김...... 아, 못 참겠다.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옆에 있는 남편에게 된장찌개 간을 좀 보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말하기를 찌개 간을 당신이 본 다음에 내일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금식을 시작하란다. 정말 미워. 이사람, 정말 내 남편 맞아? 금식을 하루하면서 나도 느끼는 바가 참 많다. 그동안 너무 편했었지. 내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이 갑자기 떠올랐다. 지금 시간은 저녁 10시 35분. 잠을 자려고해도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질 않는다. 이제 12시가 넘으면 나도 라면 국물에 밥 말아 먹어야지.”

  금식기도를 하면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먹고 싶은 것을 참을 것인가에 대한 식욕과의 싸움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아주 재미있는 친구가 한명 있었습니다. 그는 한 10일 동안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니까 아주 훤히 빛나는 것 같아 보여 다른 친구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금식기도하면서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게 있느냐?” 그랬더니 금식을 한 친구가 아주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지. 1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니까 너무 너무 배가 고픈 거야.” 그러면서 자신이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었던 이야기를 쭉 털어놓았습니다.
 
  금식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 육체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식기도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육체적인 욕심을 넘어서는 결심을 해보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하면 첫날도 어렵지만, 그보다 세 번째 날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 때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을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막 흘러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금식기도를 함으로써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우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에 또 하나의 의미는 습관적인 죄의 삶을 단절시켜보려는 결심입니다. 죄악에 물든 이런 상태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자신을 갱신시켜보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더 나아가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의 자리가 금식 기도의 순간입니다. 또 금식기도란 자기 삶의 영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금식이란 육체의 죽음을 자기 몸과 마음으로 경험할 때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육체가 부서지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한 끼 못 먹어서 고통 받는 것이 내 육체구나, 내가 갖고 있는 건강, 시간, 음식, 가족, 신앙, 직장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은혜구나, 하나님께서 잠시 내게 맡겨주신 축복이구나.’ 그래서 금식을 바르게 할 때 우리는 가진 것에 대한 청지기 직분에 대한 사명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식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금식기도를 내가 볼 수가 없구나, 그것은 기도도 아니다” 이것은 그런 기도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정기적으로 금식기도를 했으나 그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 고통스럽게 금식하면서 매달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들려옵니다.

  “너희는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구나, 너희는 금식을 하면서 세상의 오락과 쾌락을 다 즐기고 있구나, 너희가 금식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이 네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강제 노동시키고 학대하고 헐벗은 사람을 조롱하는구나. 그들을 핍박하면서 금식기도를 하고 있구나. 금식을 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싸우고 있구나. 그것은 기도도 아니고 금식도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금식기도, 자기만 자랑하는 금식기도, 남을 조롱하는 금식기도는 더 이상 기도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금식기도 하는 이들을 향해 형식만 갖춘 껍데기 종교성에 불과하다며 진노의 말씀을 퍼붓고 계십니다.
 
  금식은 자기 절제를 하는 순간입니다.
  금식은 자기를 죽이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금식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저도 금식하는 자신을 자랑하며 뽐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십니다. 앞과 뒤가 다른 종교적 행위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겉모양으로만 금식이지 속으로는 교만이 가득차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금식기도는 참된 금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하나님께서 꾸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것이 문제점으로 등장합니까? 우리의 종교형식이 신앙의 내용을 좀 먹어 들어가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도 드리지만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도 더 이상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다. 찬양을 해도 벅찬 감동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두렵고 떨리는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정말로 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 돌아볼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있다. 그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자랑하면서 하는 금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고, 네 주위의 학대받는 자, 고통 받는 자, 억압받는 자들의 사슬을 다 끊어주는 것이다. 그들의 멍에를 풀어주고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것이다. 친족이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금식이란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뜻을 네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 말씀에 견고히 서서 이웃의 연약함, 이웃의 아픔, 이웃의 부족함에 대해서 마음을 열지 않고 교리적인 것만을 강조하면 마치 하나님께서 금식기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광과 빛의 역사에 들어오고 싶으냐? 그러면 고통 받는 이웃을 섬기고 그 아픔에 네가 참여 해봐라. 그러면 내가 네게 빛을 비출 것이다. 네 영광을 높이 들려줄 것이다. 네가 육체의 질병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느냐? 그것 때문에 내 앞에 기도하고 있느냐? 그러면 너의 고통 속에 머물지 말고, 먼저 너보다 더 고통과 아픔이 있는 자를 마음속으로 돌아볼 마음을 갖으라. 그러면 네 질병의 치유가 급속해 질 것이다.”

  본문 말씀은 인간의 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아마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더 기도해라. 더 금식해라. 하루가 뭐냐? 일주일해라. 아니 일주일이 뭐냐? 한 20일은 해야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금식기도는 안 해도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옆에 고통 받는 사람, 굶주린 사람이 있는데 너만 잘 먹고 떵떵거리면서 기도하고 있으면 그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냐? 아니다. 네가 질병에 들어 더 큰 고통에 있는 사람을 돌보면 그들의 병 치유 받지만 네 질병도 더 빨리 치유 받을 수 있다. 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느냐?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너보다 더 큰 아픔의 기도제목을 갖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해봐라. 그들의 멍에를 푸는 일에 참여해봐라. 그러면 내가 네 기도에 응답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생각 속에서만 머물지 말고, 손과 발로 움직이면서 부딪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스카 헤머슈타인(Oscar Hammerstein)이라는 사람이 쓴 노랫말에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종(bell)은 당신이 그 종을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닙니다.
  노래는 당신이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닙니다.
  당신 마음에 있는 그 사랑은 거기에 그냥 머물도록 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당신이 그 사랑을 나누어 줄 때까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귀한 축복을 주위의 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어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시간을 내놓는 사람들, 헌금을 기쁨으로 드리는 사람들, 자기의 달란트와 전문성을 내놓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에는 청지기 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시간은 내 것이 아닌데, 이 돈은 내 것이 아닌데, 이 명예는 내 것이 아닌데, 이 권력은 내 것이 아닌데,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하나님께서 내게 빌려주신 것인데,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모든 것을 다 훌훌 털어놓고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데.’
  이런 귀한 마음으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이웃을 향해 내놓을 수 있는 축복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노숙자와 행려병자 같은 버려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종합사회복지센터입니다. 교회 장로님 중 한분이 그곳에 병원 내과과장으로 자원하고 계셔서 여러 가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보람 있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고자 수고하며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통 받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모습에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분들은 한 두 분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참으로 많습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각종 복지시설에서 시간봉사, 사랑의 봉사, 노력 봉사하는 분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곳에는 서울에서 온 중학생들이 2박 3일 동안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자원봉사 하러 왔는데 뭘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청소를 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목을 붙잡아 드리고 안마도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텔레비전을 보시면 옆에 앉아서 배우 이름도 이야기해 주고 함께 수다도 떤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참 아름다운 봉사입니다.
 
  자원봉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경기도 이천에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위한 베데스다 집과 성남의 소망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올 해 6월부터는 서울시가 짓고 우리 교회가 위탁을 받아 노인 치매를 위한 서부노인전문요양센터를 운영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어린이들, 장애인들, 노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사랑의 역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사랑과 기도 없이는 감당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분명히 신앙이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이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확대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그냥 머릿속에 있는 사랑으로 멈춰 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원봉사를 위해 직장을 내려놓거나 가정의 모든 일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전념하는 것은 전문 사역가가 합니다. 다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잠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운영될 수 있는 대부분의 동력은 이런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다가 피곤하고 얼굴이 찡그려지고 불평하게 되면 모든 봉사를 잠시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봉사는 나에게도 이득이 안 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안 됩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 불평하면서 하는 봉사, 피곤해 하면서 하는 봉사는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마음의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다시 기쁨이 생길 때까지 쉬셔야 합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이런 봉사사역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나는 자신들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고통스럽고 곤고해 보이는 사역자들을 보면 걱정스럽다.”
 
  예수님께서 내 십자가만 지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다 지려고 하지 마세요. 고통당하는 이웃을 돕는 일에 부담을 갖고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원하는 심정으로 시도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약간의 후원금을 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나면 방문 신청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옆에서 지켜만 봐도 좋습니다. 마음속에 내키면 그분들의 손을 붙잡아 주어도 좋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어렵고 힘든 일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자원봉사를 한 분들의 똑같은 고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봉사할 수 있다니,
  아직도 내게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니,
  아직도 내게 봉사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니,
  아직도 내 손과 발이 움직일 수 있다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봉사하며 섬기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하고 기뻐하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봉사의 현장에 우리 자녀들을 함께 데려가도 좋습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라고 가르쳐도 안 듣던 자녀들이 나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보면 모습이 바뀌어 집니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내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봉사하면서 인생을 새롭게 깨닫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년에 1-2번은 자원봉사, 선교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선교관 1층에 자원봉사 센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문의하시면 어떤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에 복입니다.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우리를 성숙하고 넉넉하게 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복되고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들은 우리를 사랑해주어야 되지 않느냐, 예수 믿으면 다른 사람보다 받은 사랑이 많지 않느냐고 우리를 향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귀한 일에 함께 참여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이 될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봉사할 시간과 건강과 맑은 정신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그것이 바로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칭찬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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