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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겨진 사람들 (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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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부터 룻기를 시작하여 앞으로 몇 주일간 연속으로 설교하기로 하였습니다.  한 주간 동안 룻기를 읽어보았습니까?  룻기는 베들레헴이라는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이웃 나라 모압 땅으로 이사를 간 엘리멜렉의 가족이 타향살이 10년 사이에 만난 불행하고 슬픈 가족사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룻기는 이 가정이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임시로 살던 10년의 행적을 다섯 구절로 짧게 압축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고향을 떠남, 모압 땅에 우거함, 죽고 남음, 만남(결혼), 그리고 또 죽고 남았더라는 몇 마디의 말로 10년을 요약해 버립니다. 

룻기의 이런 구성은 한 가정이 겪은 지나간 삶의 슬픈 이야기보다는 앞으로 전개될 새롭고 희망찬 삶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이 있다는 저자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드러내는 이야기 전개방식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룻기를 이미 읽어보신 분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절망에 잠긴 한 가정을 어떻게 새로운 소망 속에 살도록 바꿔주시는지 그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타향살이 10년 사이에 경험한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한 내용 속에는 이 가정이 고향을 떠난 이유와 그 목적지, 그리고 그 결과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소개해 드린 것처럼 그들이 왜 고향을 떠났고 또 목적한 곳이 어디였는가 그 배경을 좀 더 정확히 알면 룻기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그리고 회복의 기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좋은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이 떠난 고향 땅 베들레헴 에브랏은 ‘수확이 풍성한 떡집’이라는 넉넉한 뜻을 가진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냥 곡식이 풍성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그의 조상 히브리인들과 약속하신 가나안에 속한 땅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면 자손대대로 그 땅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궁하게 되자 그 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사사들이 나라를 이끌어가던 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였습니다.  내 생각에 옳으면 그것이 법이고 규칙인 세상에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 하고픈 대로 살았던 것처럼 엘리멜렉도 자기 생각에 옳다고 기껏 결정한 것이 양식이 많은 모압 땅으로 이사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여 베들레헴의 모든 사람이 그 땅을 등지고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일가 친척들과 이웃들이 엘리멜렉에게 조금만 더 참고 견뎌보자고 이사를 말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엘리멜렉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은혜로 주신 땅을 팔고 집을 팔아 정리하여 더 좋은 땅으로 보이는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그냥 단순히 조국과 고향 땅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난 것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룻기는 그들이 단순히 땅을 떠났다는 것보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삶 가운데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다스림과 보호받는 자리를 떠나 자기 스스로 고난을 피하고 편안한 삶을 개척해 보겠다고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긍휼과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사람이 왕이신 하나님의 그늘을 벗어나 다른 왕과 다른 신을 섬기는 나라로 피난을 가고 말았습니다.  곡식이 넉넉해야 할 땅에 왜 흉년이 찾아와 백성들이 고통 속에 살아야 했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보다는 우선 궁핍하고 구차한 환경을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섰던 엘리멜렉의 가정이었습니다.

떠남과 돌아옴은 룻기의 중요한 또 하나의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살던 집을 바꾸기도 하고, 직장을 옮겨보기도 합니다.  결혼을 하고 오래 손을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나의 과거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도 합니다.  지금껏 살아오던 방식을 떠나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고국을 떠나 영국에 온 것도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변화를 가지게 되었습니까?  그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가를 떠나고 바꿀 때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리 도망하는 것인가 꼭 먼저 살펴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눈앞에 펼쳐질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번영과 생존에 우리의 마음이 더 먼저 쏠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든, 사소한 문제를 결정할 때든 뭔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정할 때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면서 이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따라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이시라면 이 일을 좋게 여기실까 먼저 여쭙고 떠나기를 바랍니다. 

몇 주 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하여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롯이라는 사람이 삼촌으로부터 독립하여 가문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롯은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소돔 성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드넓은 초장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죄악의 도성 소돔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 주변에 머물며 그 사람들과 거래하여 이득만 얻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롯의 가족은 어느새 소돔 성의 주류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성이 유황불로 멸망할 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겨우 목숨만 건지게 되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엘리멜렉의 가정이 처음에 모압으로 이주할 때는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우거했다’(sojourn)는 말이 2절에 와서는 ‘유했다’(remain)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잠시만 머물려고 했는데 거기 살다 보니 자리가 잡히고 형편이 좋아져서 아주 정착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 그런 식으로 시작합니다.  ‘잠깐만 내 방식대로 살겠으니 하나님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잠시만 외도하다가 곧 다시 돌아오겠으니 눈 감아주시기 바랍니다’ 합니다.  그러나 그 생활이 익숙해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빠지고 맙니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면 그때 하나님 앞에 나오겠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 떠나간 발걸음을 다시 돌리는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고향을 떠나 들어간 곳이 모압이었다는 점은 그의 선택이 왕이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자기 소견을 따른 결정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롯이 가족들과 소돔 성을 빠져 나왔을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가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었고 롯과 두 딸만 살아남았습니다.  이때 두 딸들이 세상의 도리로는 자기들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인종을 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한 후 동침하여 큰 딸이 아버지로부터 낳은 아들이 바로 모압의 조상이 되었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은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길목에서 이스라엘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예언자를 뇌물로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던 민족이기도 합니다(민수기 22장).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압 사람들을 위해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고 하실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신23:6).  그리고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이스라엘이 모압 왕 에글론에게 침략당하여 십팔 년 동안 속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삿3:12-14).

모압으로 이사를 간 엘리멜렉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위기를 만난 엘리멜렉에게는 지금 그런 관계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우선 내가 살고 보아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일이라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가볍게 여기고 잠깐만 외도하고 적당한 때에 돌아오리라고 자신하지만 그 잠깐의 외도가 정말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얼마 못 가서 그 집의 가장 엘리멜렉이 죽고 홀로 된 아내와 두 아들만 남는 슬픔을 만나고 맙니다.  잘 살아보려고 고향을 떠났는데 타국에서 남편을 잃고 만 나오미는 기가 막힐 뿐입니다. 

남편을 잃은 된 나오미는 이대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모압에 더 머물면서 두 아들을 모압 처녀들에게 장가들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아들들이 낳은 자손들을 거느리고 성공하여 떳떳하게 돌아가야 집안 말아먹었다는 손가락질은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그런 계획마저도 얼마 못 가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압 땅에 있은 지 10년 된 즈음에 두 아들마저 젊은 아내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직 살붙이 하나 세상에 남기지 않았는데 큰 아들도 작은 아들도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그 집안에는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이제 막 시집을 와서 남편들을 잃은 젊은 며느리 룻과 오르바 이렇게 가련한 세 여인들만 남았습니다.  이보다 더 기가 막힌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비극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픈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누가 보아도 이 집은 이제 모든 것을 다 잃은 실패자였습니다.  더 이상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절망적인 자리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과 자포자기 밖에 더 남은 것이 없는 이 가정에 너무나 귀한 은혜의 불씨를 남겨두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번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처럼 이 집안에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 잃고 다 떠나버린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남겨두셨고 두 자부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오미와 룻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진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룻기의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성경 곳곳에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들 중에 가인과 아벨이 있었는데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 셋이라는 아들을 아담의 후사로 주셔서 믿음의 혈통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하여 세상이 죄로 가득 차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생명이 있는 동물들이 물로 심판 받아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노아와 그의 식구 여덟 명을 남겨두시려고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사람들이 물로 죽임을 당한 후 남겨진 노아의 식구를 통해 세상에 다시 사람들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에 맞서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기도 대결을 벌여 하늘의 불이 내려와 제단의 제물을 태우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비가 내리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이세벨의 칼을 피해 도망했던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죽고 나만 남았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시며 심신이 지친 엘리야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그 나라가 심판을 받아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여 모든 성들이 무너지고 땅이 황폐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그 땅에 사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오리니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 곧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뢰하던 자들을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들이 장차 메시야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의 정의와 진리가 다 무너진 것 같고 다 망하여 사라진 것 같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들을 남겨두시며 그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십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이렇게 남겨진 은혜의 씨앗과 그루터기로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남은 자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버림을 받은 자처럼 외로움과 고난의 그늘에서 탄식하는 자녀들에게 소망의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고난과 질곡 가운데 마치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과 같고 상한 갈대와 같은 인생들을 아주 꺾고 불어 꺼버리지 않으시고 남겨두시며 소망의 소식을 들려주십니다. 

나오미가 모든 것을 잃고 손들고 있을 바로 그 즈음에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부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眷顧)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권고하셨다’는 말은 돌아보셨다, 또는 돌보셨다는 말입니다.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던 그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돌보시고 풍년을 주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때 조금만 더 견디고 기다릴걸 하는 후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나오미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모압 땅에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남편도 아들들도 재물도 다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모압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드디어 두 자부와 함께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는 은혜의 땅으로 돌아가려고 모압을 떠났습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통보다 앞으로 더 크게 부어주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회복을 더 강조하는 책입니다.  나오미가 지난 10년 동안 겪은 고통스러웠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낱낱이 기록하려면 장편소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했던 과거를 드러내어 주눅이 들게 하시고 과거의 실패와 슬픔, 죄책감에 눌려 살게 하시기 보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 돌아오는 사람이 얻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훨씬 더 많이 강조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남과 고난의 이야기는 짧게 다루시고,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자녀들이 누리는 기쁨과 복을 훨씬 확대하여 다루시는 풍성한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고집할 때 잠시 풀어주시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손을 들면 비록 실패자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그 불행이 우리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상황을 바꾸기도 하십니다.  타국에서 쓴 잔을 마신 나오미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그 땅을 떠나는 날로부터 룻기의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아직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한 새 길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엄청난 계획을 보여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룻기의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는 나오미가 고향을 향해 출발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의 빛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앞날에 어떤 일이 전개될 지 알 수 없지만, 룻기를 읽는 독자들은 그의 회복과 기쁨의 결말을 압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을 좇아 인간의 수단만을 의지하며 살려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그분께 돌아와 내 삶을 맡기는 사람에게 소망의 빛을 드리우십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는 성도들입니다.  룻기의 말씀을 통해 내 삶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대하며 주님과 동행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앞날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즐거운 작업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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