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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칭찬과 책망 (계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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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100% 완전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교회도 있습니다. 목사도 교인도 추구하는 일도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이런 교회를 떠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교인들이 좋은 교회를 찾아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것이 보기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나무랄 수도 없는 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을 가르치고 전하고 행하는 엉터리 교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교회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탓만 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는 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베소교회도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들은 교회입니다.
이 시간에는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주님의 책망과 칭찬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사실 2장부터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장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사도요한의 편지입니다. 당시 아시아라고 하면 오늘날의 터키의 서해안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 지역을 아시아라고 하는 것은 로마가 그 지역을 아시아 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밧모 섬에 귀양 간 사도 요한이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에베소가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리적 위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밧모 섬에서 편지를 가지고 출발하면 제일 먼저 카이스터 강어귀에 있는 에베소 항에 도착합니다. 에베소는 로마에서 동양으로 가는 무역 로로 중요한 도시이고, 세계 7대 불가사이 중 하나인 다이아나 여신의 웅장한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가고자 하였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여행 때 그곳에 가서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곳입니다.

이제 밧모 섬에 있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받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받았으며,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보다 칭찬을 더 많이 받았고, 사데 교회는 칭찬보다 책망을 더 많이 받았으며, 버가모, 두아디라, 에베소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반반씩 받았습니다. 교회들마다 무엇이 칭찬 받을 만하고 무엇이 책망 받을 부분이었는지 우리로 배우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칭찬은 무엇인지 보십시다.

첫째, 그들의 수고를 칭찬하셨습니다.
2절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 수고란 모든 교인들이 꿀벌과 같이 부지런 했는데 모두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책임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잘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수고란 매우 힘든 노동을 말합니다. 외로운 자를 위로하고 환대하는 일, 아픈 자를 간호하고 돌보는 일, 젊은이를 교육하고 가르치는 일, 늙은 분들을 존중히 여기고 돌보는 일을 말합니다. 이 일에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칭찬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일은 물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전도와 구제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 일과 병행하여 중요한 일은 외로운 자를 위로하고 환대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할 때 기존의 교인들이 기뻐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오해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외로운 자 우선입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교회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마음의 병든 자, 믿음의 병든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요청하고 기도 제목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 제목이 있거든 기도를 요청하십시오. 목사가 기도 요청을 받으면 기도 제목에 따라 모두에게 알려 함께 기도하게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은밀하게 기도할 제목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게 된 기도 제목은 모든 성도들이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교인이라야 침 신자입니다.

그 다음은 어린이와 젊은이를 교육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일학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바른 모범과 전통을 다음세대에 물러주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신학생만 길러내고 지원하고 선교사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달란트에 따라 모든 젊은이들을 바른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시켜 닥터, 변호사, 회계사, 시의원, 학자, 공무원, 사업가, 정치가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런 분야에 달란트가 있는 젊은이들을 발굴하여 기도하고 물질적으로도 지원하여 세상으로 내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될 게 아닙니까? 사실 미국에서는 교회가 이 일에 기여한 바가 많습니다. 미국의 좋은 대학은 거의 교회가 세운 학교들입니다. 지금의 교회들은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을 공경하고 돌보는 일도 교회가 솔선해야 합니다.
이 일에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들은 것을 보면 이 일을 제대로 못하면 책망 받는 다는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들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뿐 아니라 신자 개인적 생활에서도 이런 일을 힘쓸 때 교회적으로도 이 일을 잘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퀴즈제일교회는 외로운 자, 병든 자를 우선 돌보는 교회가 되고, 젊은이들을 복음사역자로 또는 사회 각 분야의 일꾼으로 배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노인을 공경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들의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에베소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요, 우상 다이아나 여신의 숭배지입니다. 많은 종교가 모여 있고 각종 마술이 성행했던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매를 금지 당했습니다. 신체적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신자들은 그 도시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당시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매매금지였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물건을 사지도 못하게 하였고 팔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계 13: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바로 에베소 교회와 같은 형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이 에베소에서 은감실이 우상이라고 설교하여 우상 상인들의 미움을 사서 곤욕을 치렀던 곳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에베소 교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잘 참았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내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참는 것, 인내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잘 참는 사람이 승리하고 성공합니다. 주님도 인내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인내를 칭찬하신 것을 보면 인내는 신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 틀림없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모든 인간관에서 인내로 주님께 칭찬받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신앙의 정통성을 잘 지킨 것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니골라 당이 들어와 부도덕을 용납하므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니골라당이라는 말은 두 개의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정복하다를 뜻을 가진 니카오(Nikao)와 평신도를 뜻하는 라오(Lao)라는 단어의 합성으로 니골라당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 뜻은 "평신도를 정복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니골라당은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목사의 높아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직을 계급적으로 평신도와 구별하여 군림하려는 세속적 사상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런 니골라당을 배척하고 미워한 것을 좋아하시면서 나도 니골라당을 미워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가톨릭이 성직을 계급화한 니골라당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로테스탄트들이 바로 개혁을 부르짖었던 것 중에 하나가 만인제사장설입니다. 그것은 가톨릭의 사제들이 너무 계급적으로 신자들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신약 시대에는 신자는 모두가 제사장이고 모두가 왕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개신교 안에 그들이 그렇게 미워하여 개혁했던 니골라당의 성직계급의식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크고 부흥하는 교회는 상당할 정도로 니골라당적인 성직자의 지배의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 점을 배격했다는 것은 매우 칭찬받을 만 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점을 분별하여 경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에게 일체 자기에게 반대하지 못하도록 위협적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감히 반대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은 지도자를 존경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존경해야 합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려는 것은 용납하면 안 됩니다. 권위도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기 위한 권위는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권위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마치 폭군처럼 하는데도 목사를 비판하다가 벌받을까봐 아무 말도 못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가 스캔들을 일으키고 부정을 저질러도 교회가 부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한 분별력을 가진 교회입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는 상당히 수준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강조하여 칭찬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일 4:1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살전 5:21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본문 6절에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관심 가지시는 것이 관심 가지고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취하여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도 칭찬 받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칭찬 받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올라가면 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누가 좋은 일로 칭찬받는 것을 그냥 두고 못 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코지를 합니다.
한국 귀신 중에 손이라는 귀신이 가장 성질이 나쁜 귀신인데 좋은 일을 그냥 두고 못 보는 귀신입니다. 그 귀신이 미국까지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민간에는 손이라는 귀신의 피해를 예방하는 민간처방이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말조심 행동조심 출입조심을 하되 손이라는 귀신이 출몰하지 않는 날을 길일로 잡았고 그가 출몰하지 않는 장소로 다녀야 했습니다. 이사 날도 손 없는 날, 결혼식도 손 없는 날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불신자들은 손이라는 귀신을 이렇게 경계하는데 신자들은 마귀를 그렇게 경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성질 고약하기로 말하면 마귀도 손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를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칭찬 받을 때 마귀를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칭찬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칭찬을 아기십니다. 우리도 칭찬을 아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칭찬이 좋은 것이라고 해서 별별 소리를 다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고...
칭찬은 우선 듣기는 좋지만 그것 참 부담스럽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칭찬을 그대로 믿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은 속으로 칭찬을 기대합니다. 칭찬을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칭찬 잘하는 사람은 돌아서서 비난도 잘합니다.
그래서 칭찬은 좋은 것이지만 칭찬 받을 때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몸을 낮추고 숨을 크게 쉬지 말고 눈에 빼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신 주님은 이제 책망을 하십니다.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마 24:12절에 마지막 때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딴 짓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그들이 하나님의 신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의 여러 신들과 놀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교회들도 배가 불러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오묘하게도 물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고후 11:2-3절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기 30년 전에 바울이 에베소에 보낸 편지 엡 6:24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30년이 지났는데 그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게 수고를 했으나 그것은 사랑의 수고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정의감은 사랑의 행위보다 약한 것입니다. 사랑은 지식보다 크고 정의보다 탁월합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큽니다. 바울은 모든 은사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골 3:12-14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지만 사랑이 없으면 예배가 무효가 됩니다.
모든 행위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금 나의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적 사랑이 있는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여 바로 세우시려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명령을 잘 받고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는 이 전 상태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라고 하십니다.
죄악에 대한 미련으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닌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아내어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발견하였으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넘어진 자는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바보가 미끄러운 눈길에서 넘어졌습니다.
조심하여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또 넘어졌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바보는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하는 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넘어졌을 때 일어나지 말걸...???”라고 하였답니다. 바보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넘어졌거든 일어나십시오. 칠전팔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회개는 넘어진 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싸웠으면 화해하는 것입니다. 맺혔으면 푸는 것입니다. 빚졌으면 갚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울면서 통성기도 하는 것이 회개인줄 압니다. 구체적인 잘못과 악습을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셋째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처음 마음을 가지라고 하지 않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물론 처음 행위에는 처음 마음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선행의 발걸음을 내 딛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망설이면 안 됩니다. 발을 내 딛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십니다.
5절 하반절에“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지 순례를 가면 화려했던 교회들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남아 있는 교회 건물은 거의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교회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없애버리시려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경고 뿐 아니라 약속도 하셨습니다.
회개하면, 7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여러분은 이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에덴에서의 저주를 거두시고 금지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자와 주님의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같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사워야 할 싸움이 있고, 옹호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우리의 주님이시며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증거하고 찬양하고 섬겨야 합니다. 책망을 잘 듣는 자에게 약속된 이 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책망을 잘 들으면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낙원이 회복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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