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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왕상 21:1-10, 갈 2:15-21, 눅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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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를 국시로 하여 출범했던 조선조가 끝나갈 무렵 유교의 타락은 극에 달했고 따라서 우리나라 상황은 말이 아닐 정도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미국, 프랑스 등 열강이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삼키려고 마치 굶주린 사자들처럼 기회를 엿보면서 틈만 생기면 괴롭혔습니다. 이런 와중에 임금은 허수아비처럼 되었고 신하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세상 돌아가는 줄도 모른 채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싸웠습니다. 이런 틈을 이용하여 관리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여념이 없었으며, 사방에 도적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녔습니다. 거기다 흉년이 들고 무서운 역병마저 돌아 정말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삶이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종교가 그 본연의 빛을 잃고 타락할 때 그 폐해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을 증거해 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럴 즈음에 들어온 종교가 가톨릭이었습니다. 국가적인 무서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이 새 종교를 믿었던 것은 거기에서는 사람을 사람 대접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내세의 소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온데 반하여 최제우는 동학이란 이름으로 새 종교를 일으켰습니다. 그도 역시 민초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人乃天” 즉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하여 억눌린 민중들의 한을 한껏 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학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정부로서는 외세를 빌려서 토벌해야할 만큼 위협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이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복음이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같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국기독교가 세계 선교역사상 기적이라고 할 만큼 급성장 한 이면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도 역시 한 몫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토록 30세 시골 청년 예수에게 열광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수 백 년 전부터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에 이어 로마에 이르기 까지 나라를 잃고 숱한 고난의 세월을 지나온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소위 선민이라고 자처해 온 그들이 겪은 민족적인 수욕과 고난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유대교는 이미 형해만 남았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종교가 국민들에게 소망이나 위로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난 짐만 지워주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무엇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복음은 마치 스펀지에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유대 나라 갈릴리 한 구석에서 출범한 예수 운동은 3세기를 지나지 못하여 온 로마제국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정치고, 문화고, 사상이고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모두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는 사람을 구원하고 영원한 소망을 주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헬라인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 같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첨단을 자랑하는 기술이나 학문이 결코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하물며 그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를 점점 더 무서운 혼란과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역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처럼 오늘 우리도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교회마다 마치 백화점같이 요란한 프로그람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론을 배우기 위하여 수많은 돈을 들여 미국교회를 탐방하는데 이것이 교역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되는 비결은 오직 십자가의 도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네 맏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오늘 구약 성경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아합이라고 하는 우상숭배자로 여호와 종교를 지독하게 박해했던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왕이 저지른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엄청난 권력과 부귀 영광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랬는데도 나봇이라는 사람이 왕궁 근처에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왕이 나봇과 흥정을 하려했으나 나봇은 조선전래의 신앙과 전통을 수호하려는 의지 때문에 감히 왕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거절했습니다. 이런 일은 왕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이방인으로 간교한 여인이며 왕후인 이세벨입니다. 그 여인이 나봇을 제거하는 방법이 아주 악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봇을 정죄하고 죽이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지조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나봇을 죽일 때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독재치하에 있을 때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독재에 맞섰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습니까? 그들에게 한결같이 뒤집어씌운 죄명은 “공산주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정치적인 사건이지만 교회 안에서도 소위 보수니 정통이니 하면서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합과 이세벨이 이런 음모로 나봇을 죽이려고 할 때 누구하나 왕이나 왕비를 향해서 “아니요!” 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반대하기는커녕 왕의 명령일하에 너도나도 나봇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자신의 믿음도 양심도 다 팔아먹고 불의한 일에라도 앞장서서 왕의 환심을 사서 출세하려는 알량한 사람들이 나봇을 죽였습니다. 힘이 곧 정의였습니다.

  1980년 대, 일단의 군인들이 엄청난 폭거를 통해서 권력을 탈취하고 났을 때 그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한국의 여호수아라고 축복하면서 매스컴을 탔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감옥에서 피투성이가 될 때 그들은 최고급 호텔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용비어천가를 불렀으며 반대급부로 엄청난 특혜들을 누렸습니다.

  아니 이런 거창한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만두고라도 우리 주변의 일들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모여서 주고받는 대화들이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대화는 사람을 살리는 대화입니까? 아니면 죽이는 대화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판단 기준이 성경적입니까? 진리에 입각해서 하는 말입니까? 내 기분에 따라서 또는 이해관계에 의하여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의 말을 듣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부풀려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므로 사람을 매장하는데 덩달아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아합의 돌에 맞아죽는 사람은 비단 나봇만이 아닙니다. 아합의 반열을 잇는 숱한 그리스도인들이 손에 돌을 들고 선량한 이웃을 향해 무지막지 하게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돌에 맞아 피 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음소리를 우리 주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신 주님은 오늘도 이 땅에서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3.  오늘 복음서 본문에는 바리새인 가운데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찬에 초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몬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대하기는 했지만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절을 무시한 것을 보면 오히려 저의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우선 손님을 초대했으면 발 씻을 물을 내어놓아야 하고, 손님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또 손님을 맞이하게 되면 중동 사람 특유의 인사법으로 서로 얼굴을 부비면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인인 한 여인이 들어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고 머리털로 씻어드렸으며, 그 발에 입 맞추므로 인사예절을 대신했습니다. 이 일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먼저는 이런 여인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에 대하여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당돌하게도 주인을 제쳐놓고 예수님에게 기름을 붓고 하는 행위가 도저히 용납 받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덩달아서 이런 여인을 용납하는 예수님까지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판단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여인도 이제 도마 위에 올랐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주변 사람들의 판단을 일거에 뒤집어 버렸습니다. 의인인척 하던 바리새인 시몬에게 그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두가 죄인이라고 간주했던 이 여인이 한 일을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칭의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여인의 모든 행동은 바로 그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스스로 의인인척 하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두가 죄인이라고 취급하던 이 여인,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께 나온 이 여인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내 판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우리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 서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내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해야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즉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일 만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일만 달란트면 한 사람이 15년을 벌어야 하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 나오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즉 석 달치 임금 빚진 동료를 만나서 속히 그 빚을 갚으라고 재촉했습니다. 그 동료는 잠시만 기다려 주면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탕감 받은 종은 자기 동료에게 참아주지 않았습니다. 당장 갚지 않는다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소식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그는 듣는 즉시 노발대발했습니다. 당장 그 종을 불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빌기에 탕감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네 동료에게 참아주지 못했느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주었듯이 너도 네 동료에게 그렇게 해야 마땅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일 뿐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는 내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총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형제의 눈에 티뿐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도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예사롭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 속한 일은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내가 할일, 형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에게 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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