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파란이 아닌 일상으로 (고전 15:58)

  • 잡초 잡초
  • 361
  • 0

첨부 1



  사람들 중에는 일상적인 것보다는 "파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있습니다.  그래서 일상 대신에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남들과는 다른 행동을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파란"이 무엇입니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순탄하지 아니하고 어수선하게 계속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시련", "문장의 기복이나 변화. 또는 두드러지게 뛰어난 부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든다면 "파란 많은 삶, 파란을 겪다, 파란을 일으키다 , 파란이 일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파란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잠재된 불안정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주목을 끌고 싶어하는 심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영웅주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극단적인 영웅주의 속에는 열등감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왁짜지껄, 야단법석을 떨어야 무엇인가 해냈다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일상적인 것보다는 건수를 좋아합니다. 묵묵히 숨어서 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내기를 좋아하고 라면 몇상사 구제하고서도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찍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런 사람을 가만 놓아두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종노릇하게 됩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인생여정을 실패하게 만드는 많은 유혹이 있음을 실감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에 의하면-
1. 가까운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 그리고 핍박과 박해를 이기지 못하는 크리스챤은 천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2. 잠시 절망의 늪, 수렁에 빠졌다고 쉽게 낙심하고 도망가는 변덕쟁이는 천로역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3. 복음신앙을 잃어버리고 세상 현자의 거짓된 가르침에 넘어간 자도 순례자가 될 수 없습니다.
4. 우리신앙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 얼음냉수를 끼얹는 마귀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는 자도 천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늘 사모하는 크리스챤은 마귀의 바람이 강할수록 더 많은 기름을 공급받을 수가 있습니다.
5. 이단에 빠진자, 배교자는 쭉정이처럼 멸망의 불에 던져집니다.
6. 크리스챤이 좁은 산길을 지나가는데 길 양 옆에 사자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던 크리스챤에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크리스챤, 놀라지 마라. 그 사자는 발 묶인 사자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바른 길을 가라." 비틀거리는 사람은 천로역정의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7. 세상 허영에 눈이 끌려 이것도 사고 저것도 움켜쥐려는 자는 순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순례자는 낭떨어지로 굴러떨어질 위험성이 높습니다.

  프랑스 말에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란 말이 있습니다. 로블레스는 '고귀한 신분'이란 뜻이고 오블리지는 '의무'라는 뜻입니다. 즉 고귀한 신분에는 그만한 의무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특권에는 사명이 따르고 신분에는 반드시 의무가 수반됩니다. 일상적으로 감당해내야할 사명과 의무말입니다. 어느 순간 빤짝하는 것이 아닌 어떤 경우라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할 그런 일상말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파란으로 유혹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파란으로 유혹합니다.
크게 한건 하면 크게 성공하면 은퇴하면 그 이후에 행복하게 살꺼야,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정거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삶의 즐거움과 행복은 여행 그 자체이며 일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인생 열차의 통로에서 괜시리 서성거리지 말고 삶 자체 일상 자체를 즐기고 행복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더 웃고, 한번이라도 서 사랑하고, 한번이라도 더 수영하고 한번이라도 더 산에 오르고 한번이라도 더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하여 있고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님은 파란보다는 일상을 더 사랑하시고 귀히여긴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닮아가는 그의 제자들이며 그의 친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란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을 일상으로 겸손하게 섬겨가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이며 좋은 성도인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파란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잠잠히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고 그 나라를 사실뿐이셨습니다. 그러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파란은 파란을 낳습니다.  그는 자기 분노, 자기 좌절, 자기 학대, 자기를 망가뜨리는 일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받는 돈도 내 던지고,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새무얼 스마일즈의 저서「인격론」속에 담긴 명 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영웅적인 것이 아니다. 일생생활에서의 용기다. 솔직할 용기, 유혹에 저항할 용기, 사실을 말할 용기,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용기, 다른 사람의 부(富)에 부도덕하게 의존하지 않고 갖고 있는 것 내에서 정직하게 살아갈 용기 말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웅, 히어로의 시대는 가고 일상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겸손하게 잘 감당해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그 동안은 영웅주의가 민족을 이끌어오고 교회를 이끌어왔다면 이제는 소시민들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모두 일상적인 역할을 감당함으로 민족도 교회도 움직여 갈 것입니다. 이제 파란의 시대가 아니라 일상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아주 큰 헌신을 하는 것 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인생의 큰 문제 앞에서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는 것 보다 변하지 않는 똑같은 일상 가운데 주님께 헌신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눈에 보여지는 헌신과 봉사 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형제 자매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동일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입니까?

  영웅적인 신앙생활도 좋고 영웅적인 특별한 헌신도 좋지만 그보다는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기도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해 나가는 사람이 더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런 성도가 저는 더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어쩌다 왕창 하는 헌금, 어쩌다 멋진 선물, 그런 것보다는 매 주일 정성스럽게 준비한 헌금, 날마다 보여주는 작은 미소가 더 아름답고 귀한 선물입니다. 저는 그 진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에서 영웅적인 신앙인이 나오는 것 그런 것보다는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잘 하는 그런 성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잘 하면 됩니다.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한가지 일상이야 말로 내 인격이며 내 실체이며 내 본 모습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하셨습니다.
  "견실하고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안에 굳게 선즉 살리라"(살전 3:8)하셨습니다. 어쩌다 한번 파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하지 말고 견실하고 흔들리지 말고 상 주안에 굳게 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무심코 혹은 급하게 주님께 방문하곤 하는 성도에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홀로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갖는 것이 그 분을 알고 그 분과 영향력을 함께 가지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알기 위한 끈질긴 기도, 끈질긴 믿음에 기꺼이 응답하십니다. 집요함의 진지함 뿐만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사모함과 감사함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충만히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