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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행 17: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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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살아가는 모습들은 제각기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살아가는 목적은 똑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통해서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돈과 명예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권력을 추구하고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인생 스스로는 얻을 수 없는 궁극적인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종교를 찾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한계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인생이 영원한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인생이 끝나는 날 다시 이어지게 될 이후의 삶을 얻기 위해서 종교를 찾습니다. 문제는 그 어떤 것이 참된 종교인가 무엇이 우리 인생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괴롭히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피해서 아테네로 온 바울은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온 도시가 우상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그것은 참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 거짓 신인 우상을 통해서 영원한 삶을 얻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인들과 토론을 벌였고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도 날마다 토론을 벌입니다. 오늘은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전도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구원에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길은 토론과 논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많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바로 잡아 주어야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인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날마다 토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택하게 되는 방법이 바로 토론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면 시작은 토론인데 서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보니 논쟁으로 번지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결코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서는 은혜를 전할 수도 없고 은혜를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겪어 보지만 말씀을 배우면서도 그 말씀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때 흔히 성경 토론이라고 해서 서로의 의견을 토론을 통해서 바로 잡아보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토론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말씀의 바른 뜻을 깨달아 깊은 은혜에 들어가기 보다는 서로의 마음만 상하게 될 때가 더 많은 것이요. 오히려 그로 인해서 서로 서먹서먹하게 되고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을 겪어 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그냥 토론으로 그치면 좋겠는데 그 토론이 열을 띠다 보니 나중에는 자기의 주장만 하게 되고 결국 논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논쟁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말씀이고 은혜고 뭐고 다 집어치워 하고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게 되고 결국 시작은 은혜를 위해 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은혜에 대한 기대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듣거나 배우게 될 때 때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게 왜 그럴까 하고 의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그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반박한다거나 그게 왜 이해가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토론을 벌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고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그게 왜 그러냐고 하면서 토론을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 맞서서 그건 이런 것이라고 하면서 토론을 벌여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도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방법론을 가지고 서로 이것이 좋겠다 저것이 좋겠다 하고 의견 제시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조차도 서로 자기 주장만 하려고 하다가 보면 결국은 시작도 못하고 그냥 관두자 하고 물러서게 될 때가 흔히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서는 복음을 전할 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을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섬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배울 때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토론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그렇기에 믿을 수 없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왜 그걸 이해 못하느냐 왜 그걸 못 믿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고 믿을 수 있도록 하여 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먼저 성령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말씀을 듣는 입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는 말씀을 듣는 입장에서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 마음을 지금까지 사로잡고 있었던 악한 마귀를 예수의 이름으로 묶고 오직 성령께서 그 안에 역사해 주시기를 위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나가서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마귀는 끊임없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이 들게 만들고 반발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못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서로 한 마음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그렇기에 악한 마귀는 우리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토론하고 다투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먼저 기도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도 그 말씀이 내게 이해가 되느냐 믿어지느냐에 앞서서 먼저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악한 마귀는 우선 우리 마음에 의심의 마음을 품게 만들어 그 말씀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게 만드는 방법을 태초부터 사용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 의심이 생겨도 먼저 아멘 하게 되면 그 마음을 성령께서 붙잡아 주십니다.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의심이 생겼다가도 아멘 하게 되면 그 의심이 사라지고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나도 모르게 알게 되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말씀이 바로 깨달아지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 아하 그게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아지게 되고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들을 때 입을 벌려 아멘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왜 우리가 사람을 가리켜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짐승은 처음 사람인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름을 짓도록 하셨고 그에 따라 아담이 부른 그대로 개는 개라고 토끼는 토끼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개를 보고 개라고 하느냐고 그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냥 개는 개라고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만 자동차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럼 자동차가 어딘가 고장이 나면 그것이 왜 고장이 났고 그러면 어떻게 고쳐야 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고장이 났을 때는 그냥 믿고 카센터에 맡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문제라고 카센터에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또 제대로 이해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맡겨놓으면 카센터에서 다 수리를 해 놓지를 않습니까? 거기서 그건 아니라고 내 생각은 이렇다고 아니면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따지고 드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들을 때는 왜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고 믿을 수가 없다고 해서 논쟁을 하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 주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하여 주시고 믿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토론이나 논쟁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라고 또한 오직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길은 설득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토론이나 논쟁보다 좋은 것은 설득입니다. 토론이나 논쟁은 내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설득은 상대방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 이해는 될는지 몰라도 은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일을 부드럽게 그리고 쉽게 해 나가기 위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일을 잘 처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상대방을 설득한다고 해도 그래서 내가 설득한대로 상대방이 따른다고 해도 그 마음에 어떤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설득을 통해서 상대방이 우리의 말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설득하는 것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설득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해시켰다고 해도 그렇게 설득하는 내 마음이나 그렇게 설득 당한 상대방이나 모두 흡족한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일을 하려고 하면 상대방을 설득해서라도 일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지 않느냐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거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상대방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시켜 주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견이 서로 다르다고 할 때 그것은 내 의견이 맞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의견이 맞는다면 상대방을 설득하여 따르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내 의견이 틀렸다면 상대방을 설득하여 따르게 한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설사 내 의견이 맞는다고 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나중에 그 책임을 모두 내게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득을 통해서는 결코 그들이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시도록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합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설득이 아닌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감동대로 따르게 될 때 내 안에 기쁨이 넘치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6장 18~19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하는 자도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담대히 입을 벌려 전해야 하는 것이요 듣는 사람들도 그 마음이 열려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준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때 어떤 반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어찌 내 힘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이 채워질 때 가식 없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 전서 2장 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직 담대한 말씀의 증거와 믿음의 역사는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능력과 권세가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본디 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1절에 바울 사도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제일 좋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다음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신 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된다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이 사랑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바울은 붙잡아 아레오바고에 있는 시의회로 데려갑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에 바울을 핍박하기보다는 바울의 설명을 먼저 듣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만약에 아테네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같았다면 어땠겠습니까? 그 결과가 참혹한 결말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이제는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얻지 못했던 바울이었지만 이번 증거를 통해서 아레오바고 시의회의 의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그 밖에 몇 사람이 바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부활의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부활의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만드시는 핵심이기 때문이요 그 분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참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부활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뜨겁게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며 그 사랑을 품고 뜨겁게 기도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담대히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니고서는 어찌 사랑의 간구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이동영 집사님의 아버님이 되시는 이우영 장로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화성중앙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헛소리도 하시고 바른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사지가 마비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며느리 되시는 김진숙 집사님이 기도해 달라고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 병원으로 쫓아갔더니 집사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 응급실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평안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아무 염려하지 말라 오히려 이를 통해서 더 큰 역사를 보게 하실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 그 마음을 두 분 집사님께 전해드렸는데 어제 완쾌되셔서 퇴원을 하셨습니다. 그래요 사랑이 아니고서는 눈물로 기도를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하고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물 뿌려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사랑의 간구가 그래서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사랑으로 구하고 사랑으로 축복하여야 합니다. 사랑으로 돌보고 사랑으로 격려하며 감싸 안아야 됩니다. 사람이 잘못할 수 있습니다.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시오. 누가 내게 상처를 주거든 그런 그 사람을 더욱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시오. 오히려 지극한 사랑으로 더욱 그 사람과 가까이 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덮습니다. 사랑으로 함께 할 때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으로 기도하는 중보자들 되시기를 바라고 사랑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그 말들을 보면 그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바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간절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그냥 쉽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간절한 중보기도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또 그런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오늘 저와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주일 말씀을 전하기 전에 우리 교회의 중직자들이 제 방에 와서 저를 위해서 먼저 축복하며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그 하나님께서 종을 사로잡아 주실 때 증거하는 말씀이 힘이 있고 역사하는 힘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이런 기도의 사람 특히 사랑으로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여러분의 중보 기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또한 좋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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