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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의 지혜있는 자의 삶 (엡 5: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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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라고 하는 지혜의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 돈많은 부자들이 랍비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먼 뱃길에서 부자들은 한참동안 자기들이 갖고 있는 돈보따리를 내놓고 서로 뽐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랍비가 빙긋이 웃으면서 그들에게 ”현재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나요 그러나 현재를 보여줄 수 없소. 나중에 보여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후 얼마를 가다가 도적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갖고 있던 모든 돈보따리를 빼앗겼습니다. 마침내 도착지에 내렸을때에 랍비는 곧 그곳에 모여있는 학생들을 가르쳐 생업에 지장이 없었고 다른 부자 출신들은 낙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예화는 지혜를 재산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인간이 죽을때까지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재산이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지혜의 민족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그 땅이 우리나라 강원도와 경기도를 합친 조그마한 땅에 불과합니다. 인구는 우리 나라 인구의 1/3수준 밖에 안됩니다. 더구나 그들중 절반은 미국에 삽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적을 이기고 세계 속에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구약 잠언서에 보면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입니까 ? 지혜는 바로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지식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라면 지혜는 삶의 현장에 사리 판단을 분별하는 분별력입니다. 지혜로운 판단은 삶을 승리로 이끕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수많은 위험과 위기와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때그때마다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때에 지혜롭게 판단하면 위기가 전화위복이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혜는 칼보다 강하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자보다도 부자보다도 지혜자를 존경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15절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바울은 지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지혜있는 자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이 종말의 때에 우리는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과연 지혜있는 자의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1. 지혜있는 자의 삶은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16절 “시간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자의 삶은 시간을 아끼는 삶입니다. 여기 시간을 아끼라는 말은 소극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적극적으로는 시간을 아끼라는 것은 “기회를 만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기회를 만들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금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마귀가 권세를 잡고 사람들을 악한 방향으로 유혹합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악한 방향대로 따라갑니다. 마귀는 우리가 시간을 세상적으로 살도록 합니다. 육체적으로 살도록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17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게으르게 인생을 보내는 사람입니다.성경에서는 시간과 관련한 대표적인 어리석은 사람을 “게으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잠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합니다.

개미를 통하여 배우는 시간에 대한 지혜가 무엇입니까?
개미는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여름에 시간을 아껴서 겨울을 예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여름에는 아무리 더워도 열심히 시간을 활용합니다.두령도 없고,간역자도 없고,주권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겨울을 위해 양식을 모으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개미의 시간관리를 보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현재만을 위해 살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게으른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자꾸 핑계와 변명을 하면서 미룬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게으른 학생은 ‘내일 공부하자’미룹니다. 게으른 주부는 ‘다음에 청소하고 다음에 설거지하고 다음에 치우자’라고 미룹니다.
엣날 게으르기로 소문만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일을 가고 그 게르은 농부가 텅빈 집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오후가 되었는데 마루에 누워 낮잠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려 눈을 뜨고 보니 간큰 도둑이 마당에 담을 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잠결에 들은 것은 바로 도둑이 마당 담장을 넘다가 돌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도둑이 들어왓는데도 불구하고 농부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어어 도둑이네,저놈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이제 도둑이 담에서 내려와 마당을 살금 살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무겁게 내려오는 쌍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집안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 도둑은 농부가 잠든 것인줄 알고 집안으로 들어와서 농부의 곁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여전히 잠에 취한 농부는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했습니다. 이윽고 도둑이 값이 나갈만 물건을 챙겨서 안방에서 나와 대문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게으른 농부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현재의 주어진 시간을 구속하라 기회를 사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미루고 나중으로 미루는 게으름은 바로 시간을 도둑맞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시간과 관련하여 세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시간관은 불교나 회교도들이 생각하는 ‘윤회적 시간관’입니다. 그들은 시간이란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죽음은 또다른 생명에 맞닿아있고 그 생명은 죽음을 낳고 그래서 시간은 게속 동그라미처럼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이런 시간관을 갖게 되면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기회가 다시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다시 옵니다. 개도 되었다가 닭도 되었다가 소도 되었다가 어느날 인간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시간관이 있습니다. ‘변증법적 시간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사건은 그 경험하는 사건과 정반대의 또 다른 사건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새로운 하나의 창조를 낳습니다. 그러나 그 창조는 그와 정반대가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시간은 계속 발전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윤회적 시간관‘은 하나의 원으로 그릴 수 있고 ’변증법적 시간관‘은 하나의 삼각형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삼각형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삼각형을 그리면서 시간은 같은 사건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시간관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종말론적 시간관입니다. 처음이 있으면 나중이 있고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결코 다시 올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에 해당이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우리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 시간을 성경 시편0편 10절에서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시간이 날아가는 화살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은 쏜살같이 빨리 지나가는 것입니다. 올해도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월입니다. 그래서 그런말들을 합니다 . 시간이 30대는 30키로미터로 가고 40대는 40키로미터로 가고 50대는 50키로미터로 가고 60대는 60키로미터로 간다고 합니다. 갈수록 더 빨리 시간이 가고 있음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그런데 지혜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한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느정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대부분 시간사용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사용의 지혜가 있습니다. 반대로 실패하는 사람들은 시간 사용에 실패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은 시간사용의 지혜가 없습니다.
한 설교자는 자신의 어떤 글에서 미국 사람들이 평균 75년 정도를 산다고 기준할 때 그 75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사는지 설명했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 사람들은 20년은 잠자는 데, 20년은 일하는데, 7년은 노는데, 6년은 먹는데, 5년은 텔레비전 보는데, 5년은 내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고민하며 옷을 사는 쇼핑에 시간을 보내고, 3년은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는 일에 소모하고, 2년 반은 화장실에서, 2년 반은 잡념과 잡생각을 위해서 그리고 일생 중 2년은 커피를 마시는 일에, 그리고 1년은 전화 받는 일 등에 75년의 시간을 사용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우리의 인생을 아침 6시부터 저녁 12시까지 나눠 생각해 보았습니다. 15살이라면 그 학생은 아침 9시 38분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20세라면 10시 51분, 25세라면 12시 4분, 30세라면 1시 17분, 45세라면 4시 56분, 50세라면 6시 8분, 55세라면 7시 55분, 60세가 되면 저녁 8시 34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65세라면 9시 47분, 70세라면 11시, 70세를 넘으셨다면 당신은 12시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종말이 가까워지는 이 세상에서 지혜자는 어떻게 시간을 사용할까요?
지혜자는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삶의 가장 가치잇는 것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여러분 삶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소중한 것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누구와의 관계가 제일 소중합니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더욱 신뢰하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읽는 시간, 예배드리는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특히 하루의 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와야 합니까? 경건의 시간이요 기도의 시간입니다.세상 삶에 대해서 바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바쁘지 않는 분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쁘다 따라서 나는 더욱 더 기도해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요한웨슬리는 하루를 5분간격으로 나누어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5분간격으로 계획했습니다. 그는 1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그 시간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삶의 위대한 흔적을 남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들이 하나님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 다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남편을 향한 책임이요 아내를 향한 책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위해 시간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내를 위해서 얼마나 시간을 내는가?”“내가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시간을 내는가?” 중요합니다.종종 부부관계가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남편들이 일에 목숨을 걸고 시간을 아내와 가정을 위해 내어주지 않고 살아갑니다. 너무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남편들에게 일이 마치 아내처럼 중요하고 아내들에게 아이들이 마치 남편처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지상의 평생의 반려자로 내게 주신 내 남편 내 아내는 우리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가정의 남편과 아내 다음으로 우리가 시간을 투자해야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부모들입니다. 나는 부모를 향해서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는가? 나는 자녀를 향해서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종말의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삶은 바로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직장입니다.
그 직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곳입니다.그 직장에서 승리하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직상 생활하는 자입니다. 그곳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내 육신의 필요를 채우고 내 가정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의 나라의 필요를 채우는 물질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일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2. 지혜있는 자의 삶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18절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선 명령형입니다. 지혜잇는 자는 성령충만의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충만을 명령하는 것은 이것은 가만히 기다리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움직이고 행동해야 하는 것처럼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의 영적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고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별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는 이 명령은 “받으라”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이것은 어제께 성령충만받았어도 오늘 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성령충만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도 앞으로 이 종말의 때에 성령충만한 사람이 바로 지혜자요 성령충만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충만을 위해서 소극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방탕하게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허비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삶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 눅15장에 둘째아들 탕자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3가지를 허비하였습니다.
첫째는 시간을 허비합니다.세상에서 헛된 것에 시간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둘째는 정력도 허비합니다. 먹고 놀고 취하는데 주어진 젊음을 다 허비합니다.
셋째는 재물도 허비합니다.아버지가 주신 재물을 먹고 마시고 노는데 허비합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간과 정력과 모든 것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사용하는 자입니다.구약의 다니엘을 보십시오.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잡혀가서 궁중에 왕을 모실만한 종으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왕이 지정한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것은 거부했습니다. 그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출세를 거부하는 것이요 심지어는 목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채소만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왕 앞에 나가서 오히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벨론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를 방탕하게 하는 습관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것을 회개하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죄이든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 종말의 때에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조심하고 다스려야 할 육체의 죄가 있다면 술과 관련하여 육체로 범죄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술을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0장 8-11절을 보십시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 대대의 규례라고 합니다.여기 이 사람들은 바로 레위족장,레위성가대,아론의 족속들,아론의 족속들,아론의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제사장계급.제사장 족속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족속들에게 술을 엄격해서 금지하시고 만약 마시어서 잘못하면 너희가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거룩하고 속된 것,정하고 부정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가장 먼저 오는 피해가 무엇입니까? 지혜의 상실 즉 분별력의 상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술을 금하셨습니다. 만약에 술에 취하여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다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술에 취하여 왕이 정치를 한다고 가정하여 보십시오. 법을 잊고 공의를 굽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왜 술을 마시면 안됩니까?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제사장 족속이요 왕의 족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의 제사장으로 왕같은 족속으로 불렀습니다. 철저하게 구별되이 지도자처럼 우리를 세상에서 사용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별됨을 위해서 거룩을 위해서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능력있는 삶이 되려면 방탕을 끓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방탕을 끊어야 하지만 적극적으로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받는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라”하였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술과 성령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여 버리는 것과 성령에 취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술은 저절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과 수고가 선행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충만도 우리가 충만하기 위해서 열심을 갖고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종말의 시대에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구하셔야 합니다.
먼저 성령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내 안에 충만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병행구인 골로새서 5장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합니다. 말씀이 충만한 곳에 성령이 충만합니다. 한번 경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언제 우리가 가장 짜증이 나고 힘이 없습니까? 배가 고플때입니다. 그런데 밥을 충만하게 먹고 배가 충만하여 지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좋아지고 모든 것이 넉넉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밥을 먹었더니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도 같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먹을때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도 말씀을 먹을때에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일정하게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성령충만은 기도충만과 연결이 됩니다.
초대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
모여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때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다릅니다. 오직 그 기도는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던 기도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오직 먼저 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면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가 충만하여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삶이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충만을 자꾸 이상한 쪽에서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령님은 현실 속에서 실제의 삶에서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없이 그 혜택을 누리도록 역사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현실의 삶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더 가정에 충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바르게 행할 것인가? 현실에 충실하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직장에 더욱 충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더욱 승리하는 삶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내가정생활이 충만한 삶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다고 하면서 남편과 매일 싸움하고 아내와 매일 다투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하도 하면서 직장가서 매일 불평하고 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이 현실에서 오직 성령으로 무장하시어서 지혜의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지혜있는 자는 지혜있는 삶이 있습니다.

19-21절에 보십시오.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아름다운 표준입니다. 물론 이 삶이 있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하대히전제
먼저 종말의 삶에 필요한 삶은 바로 찬양의 삶입니다.
본문에 보면.“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면 찬송합니다” 여기 보면 시의 찬양,찬미의 찬양 신령한 노래의 찬양이 있습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우리는 다양한 찬양을 즐기고 고백하고 나타내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러분 찬양하는 자가 지혜자요 지혜자는 바로 찬양하는자입니다. 그 찬양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찬양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2가지의 중요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화답하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혼자 부르지만 말고 ’서로 찬양으로 화답하는 삶‘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있을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 받은 사랑 받은 기쁨을 서로 화답하여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으로’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삶은 입술과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마음이 우선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내마음의 중심이 주님께 고백되어지고 표현되어지는 마음의 찬양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종말의 지혜자의 삶은 감사의 삶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성령의 사람이요 감사하는 자가 지혜자입니다.고난과 억울함이 있고 핍박과 고통이 있어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억울하게 순교를 당할 때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삶에 감사로 말미암아 더욱 감사할 것들이 많습니다.미련한 사람들을 보면 그 삶에 원망과 불평과 부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있는 사람을 보면 삶이 감사로 행복하고 모든 것이 순탄합니다.
무엇보다도 종말의 시대에 지혜있는 자는 “복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복종이란 말의 원어를 보면 “특히 권위자의 말을 잘 듣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의 말을 잘 듣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듣습니다. 지혜로운 종은 주인의 말을 잘 듣습니다. 지혜자는 모든삶에 있어서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것처럼 복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복종하는 자가 지혜자로 복종하는 자가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축복의 삶입니다.

마치는 말)
종말의 시대 지혜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시간을 아끼고 있습니까? 나는 성령이 충만합니까? 나는 지혜잇는 삶의 실천이 있습니까?이제 저와 여러분이 가장 지혜잇는 자로서 새로운 출발이 있기를 바랍니다.지혜로운 삶으로 종말의 때에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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