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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착한 사람 바나바의 복음 사역 이야기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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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행전’은 ‘성령의 행전’이고 ‘사도들의 행전’이지만 동시에 ‘착한 사람들의 행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착한 사람들이었고 일곱 집사들이 착한 사람들이었고 도르가와 고넬료가 착한 사람들이었고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고 디모데와 루디아가 착한 사람들이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한 평생 살아오면서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믿음의 사람도 좋고 성령의 사람도 좋고 능력의 사람도 좋지만 착한 사람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도 좋고 재력이 있는 사람도 좋고 예쁜 사람도 좋지만 결국 착한 사람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착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착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착한 사람이란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몸을 바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돕고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스데반과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행7:55). “형제 사울아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성령으로 충만하기 하신다”(행9:17).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행11:24). 세 사람은 또한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고꾸라진 다음부터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본래부터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행11:24).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들인 스데반과 바나바와 사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씨앗의 역할을 했고, 착한 사람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와 기둥의 역할을 했고, 사울은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벽과 지붕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인공인 바나바가 어떻게 착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님과 조상으로부터 착한 성품을 물려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착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7).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은행이나 집으로 가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수 있는 사람은 틀림 없이 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경제적으로 파산에 처했던 어느 여 집사님 한 분이 천만 원이 든 봉투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저에게 달려와서 건축헌금으로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은행이나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사도들에게로 달려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가 착했기 때문에 밭을 팔았을 수도 있고, 밭을 팔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성경은 바나바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또 하면 우리의 세포와 성격이 차츰차츰 바뀌어져서 착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과 시간과 몸에 인색한 사람은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나바는 물질과 시간과 몸에 인색하지 않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착한 사람 바나바가 수행한 복음 사역 세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 교회를 세우는 목회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이 뿌린 순교의 피는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멀리 이방 땅인 안디옥에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안디옥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고 의론을 하다가 착한 사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어 이방인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게 했습니다. 인종과 문화가 다른 이방 사람들을 신앙으로 격려하고 지도하는 데는 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도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몸을 드려 이방인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했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착한 마음과 착한 손길을 저들에게 폈을 때 많은 이방 사람들이 주님에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이방인 목회는 진리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마음과 착한 손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제주도는 이방과 같은 곳이었는데 평양 교회가 제주도에 목회자를 파송할 때 마음과 인격이 착한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을 파송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딸 이사례 권사님은 지난 금요일 아침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1908년 2월 달에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렀고, 같은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완전히 말과 풍속이 달랐습니다… 제주도에 아주 큰 홍수가 났습니다. 40대나 되어 보이는 여인이 큰 통나무 가지에 매달려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 대열에서 가슴 아픈 광경을 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여인을 발견한 즉시 죽음을 각오하고 물에 첨벙 뛰어 들어가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여인을 언덕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평양 대동강에서 헤엄쳤던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주민들은 너무나도 놀라서 숨을 죽인 채 도대체 저자가 누구인가를 살폈습니다. 제주도 주민들은 아버지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도 자기들이 박해했던 야소교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각기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양 귀신을 믿으라는 야소교 목사란 자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 '거참 대단하군' 이때부터 주민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1908년 4월에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두 달 후에 제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애기를 낳다가 산모가 위험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가서 거의 살아날 소망이 없는 산모를 살리고, 애기를 잘 받아내었습니다. 애기의 배꼽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간 산모의 수발을 해 주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오면 그 산모가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 예수를 믿게 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게일 선교사에게 시체를 처리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상갓집에 가서 역시 묵묵히 시체를 잘 닦아내고 옷을 입혀주는 등 여러모로 어려움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 상갓집 식구들 역시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어머니는 자기 몸을 희생하며 이웃 사람이 울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해 주고 모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밥을 많이 지어놓고 찾아오는 거지들에게 따뜻한 밥을 한 그릇씩 떠서 담아 보냈습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이 분들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온 나환자 환우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환우들을 더 싫어했지만 어머니가 제일 반가와 하는 손님들은 이 환우들이었습니다. 사모님! 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황급히 나가서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앉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시자 급히 손을 움직여 밥과 국과 김치를 상에다 받쳐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 손님 중에 제일 많이 찾아오는 분은 양손이 없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꼭 밥을 먹여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방인 목회는 진리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마음과 착한 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아방인 목회를 착함으로 했고 바나바는 안디옥의 이방인 목회를 착함으로 했습니다. 바나바의 착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물질과 시간과 몸과 관련해서도 착했지만 동역자들과 관련해서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개척 목회를 얼마동안 하다가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사울과 함께 협력 목회를 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5,26).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고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그 사람과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허물 많은 과거가 있는 사람 사울을 귀하게 여겼고 앞에 내 세웠고 그리고 함께 협력했던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협력 목회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가장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둘째,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는 이방인 목회 사역뿐 아니라 소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 선교 사역에도 크게 공헌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교제와 예배와 섬김과 금식과 기도가 충만했을 때 성령께서 두 사람을 지목해서 불렀습니다.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을 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13:2). 이방인 선교의 주역은 바나바였고 조역은 사울이었습니다. 물론 후에는 사울이 주역이 되었지만 지금은 바나바가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었습니다.

이방인 선교도 진리로만 되는 것은 압니다. 이방인 선교는 무엇보다 착함으로 됩니다. 5세기 아이랜드 선교의 주역이 패트릭이었는데 그는 착한 사람이었고, 6세기 스코트랜드 선교의 주역이 콜럼바였는데 그도 착한 사람이었으며, 7세기 영국 노덤부리아 선교의 주역이 아이단이었는데 그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콜럼바에 대한 이야기만 간단히 소개합니다. “콜럼바는 불쌍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까지도 자비를 베풀었던 인자한 성품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브루스 교수가 지적한 대로 초기의 오만하고 극렬했던 성격이 깊은 참회와 영적 변화의 과정을 거쳐 결국 인자한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다. 콜럼바는 폭풍에 상처를 입은 학을 치료해준 일을 비롯하여 동물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쇠약해져서 쓰러져 있을 때 말이 찾아와 슬퍼했다고 했다. 그의 인자한 성품 때문에 그를 ‘비둘기’ 즉 콜럼바라 불렀다고 했다. 콜럼바는 596년경 아이오나 섬에서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의 이동휘 목사님도 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주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교회의 주 사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은퇴 후에도 이방인 선교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무엇보다 먼저 평양에 어린이 심장병원을 지으려는 것도 바나바의 착함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도와 선교의 방식이 성령과 착함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바나바도 예수님을 따라서 성령과 착함으로 이방인 선교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셋째, 착한 사람 바나바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편안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스데반의 뒤를 이어 자기의 몸과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면서 고난과 핍박을 기쁨으로 받는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가는 선교의 길에는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들은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행13:49-51).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1-7).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14:19-21). 나중에 사도 바울은 고난과 핍박을 몸에 짊어지는 고난과 핍박의 사도가 되었는데 바울이 그 길로 가는 데는 바나바의 격려와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바나바와 바울이 걸어갔던 고난과 핍박의 길을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이들 주광조 장로님이 지난 금요일 아침 바로 이 자리에서 아버지의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다섯 번째로 연행되어 갈 때는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 예감했던지 할머니에게 큰 절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놨습니다’ 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예배드리려 찾아오셨던 20여명의 교인들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그리고 내 영광까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면 끝나버릴 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

“옥살이 7년. 마침내 욥의 고난과 인내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어머님과의 마지막 면회는 1944년 4월 21일 평양 형무소에서였습니다. 면회 직전, 형무 소장은 주목사님을 병보석으로 풀어주겠다고 허락했지만, 간수 등에 업혀 나온 주목사님을 뵌 어머니 오정모 사모님은 ‘목사님!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의 승리가 곧 조선교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고난을 이겨내도록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살아서는, 눈 뜨고는 생명이 붙어있는 한 이 붉은 벽돌문을 나가지 않을 것이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나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혀 병감으로 돌아서 가며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해방을 1년 4개월 앞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형무소에서 기나긴 7년 여간의 옥고 끝에 순교하는데, 그 때 그분의 연세가 48세셨습니다.”

주광조 장로님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으로 양식삼고, 인내로 거처 삼아, 결국 죽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제 아버님이신 주기철목사님이 그러셨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성도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 고난도 십자가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오로지 축복과 은혜만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편함이나 인내는 참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에게는 욥의 어떤 고난이나 인내, 신앙을 위한 손해를 감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입술은 쉼 없이 부흥을 말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갈구합니다. 우리 모두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채, 솔로몬의 영광만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부흥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부흥은 곧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일 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가 살아날 때, 그리고 그 고난에 인내할 때 진정한 축복과 부흥의 시작이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 주기철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세월이 어느덧 6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마치 어제 일 인양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평양 형무소의 묵중한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뵌 푸른 죄수 복에 짧은 머리, 그리고 깊게 패인 아버님의 두 눈은 어느 누구의 눈빛보다도 강렬했고, 아버님의 잔잔한 미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애로우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버님의 믿음과 선택, 그리고 순교를 다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아버님의 믿음은 옳았습니다. 분명 아버님의 순교는 저와 저희 가정, 그리고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아침 사회를 하면서 이와 같은 주광조 장로님의 고백을 들은 다음 가슴이 꽉 막혀서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참 만에야 고개를 떨구고 조그만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지금 주기철 목사님 앞에서 통곡을 해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손동희 권사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고난은 최고의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이런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됐지만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입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추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 교회를 세우는 목회 사역을 수행했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수행했고, 고난과 핍박을 달게 받는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사역을 수행할 수가 있었습니까? 착함과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착함이 너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8복 설교를 하신 다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 바로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 앞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라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착한 사람이란 자기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 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몸과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크게 축복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목회지에서도 그렇고 선교지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이고 우리 교회와 강남지역에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이 보고 싶은 시대입니다. 바나바 같은 손양원 목사님 같은 한경직 목사님 같은 박윤선 목사님 같은 착한 사람이 보고 싶은 시대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모두 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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