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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사모해야 할 다락방 (행 1:12-14,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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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운데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2000안타의 기록을 최초로 작성한 양준혁 선수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2000호 안타를 3개 남겨둔 시점에서 목표까지 아직 1003개가 남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언론들은 2000호가 아니라 3000호를 염두에 두고 오늘의 기쁨보다 내일의 더 큰 꿈을 이야기 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야구 선수 가운데 대학을 졸업하고 늦게 프로에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선수들 가운데 평생에 한 번 이룰까 말까한 대 기록을 세운 선수의 말 한마디가 던져준 것은 오늘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앞산을 올라갈 수 있는 힘(현실 충실)"이 있을 때 멀리 있는 "에베레스트를 올라갈 수 있는 저력(미래의 꿈)"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현실을 넘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큰 유익을 주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전체가 대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고, 부흥을 갈망하는 2007년이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Beyond 1907!"이나 "Beyond 2007!"을 이야기하는 흐름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꿈이 잉태된 한 현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락방'입니다. 이 다락방에 모인 사람이 성경엔 120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들은 유명인들이 아닙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따랐으나, 이제는 실패자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들, 더 나아가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던 갈릴리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들의 인생은 대부분 낙심한 자들입니다. 거기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자도 있습니다. 홑이불을 두른 채 도망을 친 부끄러운 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자 들이었지만, 이제 주께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어느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기력한자들입니다. 이들이 지금 다락방에 모인 것입니다.

지금 이들에게 주님이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제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이제 증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적어도 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아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아무나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 자격과 연륜과 어떤 자질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명령을 들은 11명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120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병이 나은 경험이 있거나,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로서 대부분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고 했으니 무슨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명함도 못 내밀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명령이 현실성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흐뜨려 놓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설령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깨달았다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점령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사탄의 점령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악한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기에 너무나 현실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도무지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명령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난제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 같은 별 수 없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key가 성령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열쇠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령이 key입니다. 여기 2:1에 "다 같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 1"14절에 그들이 모여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전혀 기도에 힘을 썼다" 이제 그등 ㄴ더 이상 지난 날의 아픈 상처에 눌려 신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1:4-5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누가복음 24:49절에서도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부탁의 말씀은 한마디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이들은 이 다락방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언제 성령이 저들에게 임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10일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는지 1년이 걸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120명은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여기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핍박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다락방에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위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 지혜와 용기를 기다렸습니다. 성령 받아 증인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저들의 모습은 더 이상 지난날의 실패자요, 무기력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 다락방은 세상이 볼 때는 가치 없는 한낱 건물이지만 어머니의 자궁처럼,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킬, 새 역사를 주도할 잉태의 산실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철저히 회개합니다.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주님이 하늘로 올리워 가시자, 그들 가슴엔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랑의 주님 앞에 투정만 부릴 줄 알았지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잖아요. 어리석은 자신들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만들기에 힘을 씁니다. 무엇보다 지난날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 무엇을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가?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있는가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날 그렇게도 귀한 말씀을 직접 주님으로부터 듣고, 기적도 보았는데, 들을 귀가 없이 듣지 못했고 마음 눈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직접 함께 생활하며 기적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훈련을 누구보다 잘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들보다 더 잘 제자훈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십자가 앞에 서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결국은 팔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던 저들도 그러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제자훈련만을 잘 받았다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지만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절실히 알게됩니다. 자신은 제자로서의 십자가를 능히 감당치 못하는 사람임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꿈은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것인데, 나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훈련만으로는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제한합니다. 성령님을 부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을 제한하는 것이 오늘 신앙인들의 문제입니다. 자기 얄팍한 이성과 경험 안에서만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과 용서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한 신앙인은 피맺힌 절규를 합니다. "Your God is too small" -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어떻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를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그 사랑과 그 은혜, 그 능력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경험과 이성의 틀안에 가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보십시오. *사역을 하고 싶으나 사역할 힘이 없습니다./* 사랑을 하고 싶으나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용서를 하고 싶으나 용서할 힘이 없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 낫고 싶으나 나을 힘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지금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나태한 자리에서 무력한 신앙의 껍질을 깨고 약속을 붙듭니다. 결사적인 기도, 위로부터 임하는 그 능력을 사모합니다. 이렇게 모인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과 일가 친척들,그리고 예수님을 평소 사랑했으나 눈에는 안 띄게 따랐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첫째, 그들은 회의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세미나를 열거나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그들은 집단 행동이나 시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로 베드로는 회중에서 일어나 이야기합니다. 사도가운데 가롯 유다의 문제는 그 공동체 안에 아픔이 아닙니까? 그 아픔을 씻어내고 이제 새로운 사도 맛디아를 뽑게 됩니다. 이들은 기도 가운데 자신들이 할 준비를 최선을 다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언제 성령이 임할지 모르던 그들에게 2:1-4절에 보시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지 10일만에 하늘이 열리고 저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 받은 120 문도는 더 이상 옛날의 실패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이 저들의 가는 길을 막아도,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여도 그들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메시야인 예수를 죽일 만큼 시대가 어두워 있었습니다. 시대가 영적으로 다 타락하고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가 어디로 가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히 말해 줄 수 없는 캄캄한 밤과 같은 시대를 향해서도 당당하게 성령을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 앞에 그들의 무릎을 꿇고 3000명, 5000명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주 앞에 돌아오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성령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칼날에 목이 짤리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기도 합니다. 악형을 받았습니다. 희롱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광야를 방황하며 유리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토굴 속에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기적이 없다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거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오히려 감수하며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들, 이들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역시 이 변화를 기대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고약한 기질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잘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변화하더래도 두 가지의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으로의 변화'가 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이 생명으로의 변화는 성장과 성숙, 도약으로의 변혁이지만, 반대로 죽음으로의 변화는 늙어지고 쇠하고 죽어 가는 변질입니다. 한 건실한 40대 중반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셋방살이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10년 동안 허리를 졸라가며 아끼고 아껴 가면서 변소가 밖에 있는 집 한 채를 샀습니다. 하지만 변소가 바깥에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또 10년 허리띠 졸라매서 화장실이 두 개있는 큰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편리합니까? 하지만 그새 아이들이 자라고 아침마다 화장실 전쟁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10년 고생 끝에 화장실이 세 개 있는 큰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이 이상해서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이게 왠 말입니까? 암 말기로 판정이 났고, 이 사람은 자신이 애를 써서 모은 것을 누리기도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일평생 '변소 세 개 바꾸다'가 마친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뭐, 극단적인 예 같지만, 여기에 "아니요. 라고 내 인생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제 내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어 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다락방은 세상 앞에 초라하고 작은 장소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자 역시 소망이 없는 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이 커지는 것을 보는 기쁨의 현장입니다. 그 기쁨은 성장하는 것을 보는 기쁨입니다. 어떻게 겁쟁이들이, 자기만 안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내일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이토록 멋지게 성장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작은 것이 커지는 풍부의 기쁨은 단지 성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성장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참된 기쁨은 작은 것이 커지는 풍부 자체보다 나눔에 있습니다.

여기 2:1절에 보면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입이 열려지는 역사로 임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불의 혀같이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불꽃이 너울너울 타오르면 타오르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성령의 불은 제자들을 태웠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욕망과 자산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누구의 역사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입증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이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인 성령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령은 이미 교회에 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은 우리 모두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향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 여러분의 열망을 포기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과거의 무거운 짐,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과거를 기억하므로 얼마나 괴로워하십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무거운 짐 뿐 아니라, 누구의 죄도,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자들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시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어둠과 사단의 세력입니다. 이제 이런 정의를 여러분에게 내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하십시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right now!'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늘 '지금'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우리 앞에는 늘 상존합니다. ‘핑계’ 혹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핑계 없는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어떤 변명도 이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잘못을 바로 회개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운 결심을 시작해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시겠습니까? 성령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성령의 능력과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품고 묵상하십시오.
어떤 전도사님의 고백입니다.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유명하게 연애를 했답니다. 자신보다 몸집이 큰 여인을 사랑하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여자 친구가 다리를 다쳤답니다. 그래서 강의실까지, 때로는 차를 타는 정류장까지 부축을 하거나 업고 가야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그 여자친구의 오빠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번갈아 가면서 부축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오빠가 동생을 업고 가면서 얼마나 무거운지 확 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는 그 무거운 여자 친구를 업고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이 무거운 여자 친구를 잘 업고 다니려면 체력을 보강해야 겠구나. 운동을 해야 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보혜사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시면 여러분의 인생을 보는 각도도 바뀌게 될 것이며, 생각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진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람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람이, 새 포도주의 은혜를 담기 위해서는 새 부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가슴과 머릿속에서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역사 하실 것이며,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시대와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다락방은 어디입니까? 내가 사모해야할, 내가 변화되고, 회복 되어야할 다락방은 어디입니까?

다 같이 일어나십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다. 주여! 우리 안에 쓴 뿌리가 뽑혀지게 하여 주옵소서! 원망의 쓴 뿌리, 죄악의 쓴 뿌리, 패배의 쓴 뿌리를 다 제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내 안에 성령을 모십니다. 나를 변화 시켜 주옵소서! 나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우리 이 찬양을 하며 기도하십시다.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나 주님만을 섬기리"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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