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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하나님이다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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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인구의 20% 가량이 평생 한 번 이상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세계보건기구 WTO 에서는 2020년까지 우울증이 심장질환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울증은 가장 흔한 질병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이 우울증이 심합니다. 잘 살게 되었는데 왜 우울증이 늘어나는 것일까요?
요즘 초등학생들 사는 것을 보십시오. 학교 마치면 밤늦게까지 학원 생활이 시작됩니다. 95%의 학생들이 상위 5%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무한입시경쟁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학교와 사회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습니다.

또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학업, 외모, 재산, 지위 등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모두 비현실적인 높은 기대치를 갖고 삽니다. 주변의 요구는 큰데 이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감을 갖게 됩니다. 이 상실감은 안개처럼 스며들어 마음 구석구석을 갉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주변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도 없고 도와주는 이도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절망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이 우울증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사회에 책임이 있습니다.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게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못난 사람이 설 자리를 내주질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프로작이란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은 뇌에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증가시켜줍니다. 그래서 감정을 조절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호전성과 자살 충동을 키운다는 논란이 있습니다. 아직 약으로 우울증 낫게 하지 못합니다.

우울증은 의료진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역시 우울증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랑은 절망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특효약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한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율법사는 넓은 의미로 서기관에 속합니다. 서기관의 주 업무는 성경을 옮겨 적는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율법 문제를 재판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서기관 중에서도 율법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의 목적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계명 가운데 어떤 계명이 가장 큰가? 이 질문은 당시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 토론했습니다. 또 율법을 짧게 요약하려고 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계명은 모두 613가지나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다 외워야 했고, 지켜야 했습니다. 그 자체가 상당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사는 율법에도 정통해 보이는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답변을 하려면 율법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도통해야만 합니다. 전체를 짧게 요약하는 일은 그 분야를 통달한 최고 전문가만이 할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를 잘하는데 율법이나 제대로 알고 하는 것인지 떠보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율법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첫째 되는 계명은 신명기 6:5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레위기 19:18에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분량의 구약 말씀 가운데 족집게로 두 구절을 뽑아 낸 것입니다. 이런 요약은 당시에 대단히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율법을 요약하려고 한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힐렐이란 랍비는 율법을 요약하기를 “네가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아키바라는 랍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율법 중 가장 큰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모세 오경 토라를 쉽게 풀이한 미쉬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소송, 제의에 관한 일, 정결에 대한 규정들을 꼽았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에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lo)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율법을 요약했습니다. 이 견해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러나 필로는 이 두 강령만 지키면 다른 모든 계명은 무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전 율법의 항목을 총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두 가지 조항을 꼽은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많은 율법 조항을 요약해서 단두 가지로 정리하지 못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 오경을 포함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의 초점은 십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면서 두 가지 사랑법이 성경의 정신이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첫째 계명으로 꼽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만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꼽으신 첫째 계명은 신명기 6: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일명 쉐마 말씀이라고 합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의 히브리어인데이 구절이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모세는 이 쉐마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요약으로 삼아 마음에 새기게 했습니다. 어린 자녀에게 이 말씀만은 언제나 암송하며 지키게 교육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게 했습니다. 또 미간에 붙여 표를 삼게 했습니다. 작은 성냥갑만한 상장에 이 말씀을 적은 종이를 말아서 넣고 상자에 끈을 달아 손목과 이마에 매고 다녔습니다. 이것을 트필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문설주와 대문에 써서 나가며 들어가며 읽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메주자라고 했습니다. 이 메주자 말씀 상자에 드나들 때마다 세 번씩 입을 맞춥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그토록 사모하고, 계명대로 살려는 유대인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대인들의 말씀 사랑은 점점 형식적으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본래의 율법의 정신보다는 형식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겉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꼽으라면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대제사장, 백성들의 장로들, 사두개인, 열혈당원, 에세네파 등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유대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이 쉐마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부탁도, 권유도, 선택도, 기대형도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을 사랑하냐고 질문을 하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십니까? 마음은 사랑이 머무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의 일부가 아닌 마음의 전부를 내어 드리면서, 내 마음의 전부가 하나님께 향해 있으면서, 내 마음의 전부가 하나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또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까?
또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내 뜻을 하나님 뜻 밑에 두고 살 수 있습니까? 내 뜻은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 물질을, 내 시간을 온전히 주께 드리며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이요, 신앙의 전부요, 신앙의 마지막인데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데는 모두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은혜 체험을 하고 한참 신앙에 불이 붙어 있을 때는 조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대상을 사랑하자니 허공에 대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해도 반응이 없고,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 것일까요?

또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데강단에서 설교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니까 사랑에 대한 부담이 생깁니다. 사랑이 복음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운 율법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내 자신이 굶주려 있는데 남을 사랑하라고 하니 사랑하기엔 너무 벅찬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어렵습니다. 그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기 어려운 일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쉽고 즐겁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우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를 무시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먼저 부모를 사랑합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10 말씀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기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또 19절 말씀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못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마다 나와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율법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부담스러운 명령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한다고 합시다. 그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는 의심이 많아서 부모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게 됩니다. 사춘기 청소년 모양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요즘 ‘내려놓음’이라는 몽골 선교사의 간증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했지만 세상 명예와 성공을 내려놓고 평신도 사역자로 몽골을 섬기는 이용규씨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하루는 몽골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달리는데 갑자기 자동차 시동이 꺼졌습니다. 차가 멈춘 곳은 한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습니다.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 천막이 한 채씩 눈에 와서 박히더랍니다. 그래서 한 가정 한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를 마치자 차에 시동이 걸렸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마을은 김성호라는 형제가 이 지역에 와서 교회 지붕을 수리하다가 감전사고로 사망한 곳이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는 김성호 선교사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눈보라 때문에 가까스로 찾아낸 무덤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진 곳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을 느낀 것입니다. 죽음이 실패가 아닌 승리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김성호 선교사가 못 다한 사명을 채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오감으로 느껴지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다른 감각기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감각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현장에는 언제나 사랑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느끼고 싶다면 전도하십시오. 죽은 영혼을 사랑하시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시다고 여기고 나지막한 소리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불러 보십시오. 하나님께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고 계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요리를 먹고 맛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어떤 맛인지 말로 설명하면 압니까? 직접 그 요리를 먹어봐야 그 맛을 압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면 믿어집니까? 내가 직접 사랑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겪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느껴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현장에서 아~! 하나님이다 하고 탄성을 지르며 온몸에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겪으면 우울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여서 풍성한 생명과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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