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선조들의 신앙따라 (마 5:1~12)

  • 잡초 잡초
  • 299
  • 0

첨부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1-16

6월은 국가적으로 보훈의 달이며 교회적으로는 순교자의 달입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12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예를 볼 수 없을 만큼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분들을 우리의 믿음의 모델로 보내주셔서 어떻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다”는 말처럼 우리 한국 교회는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성장해왔습니다.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섬긴 아름다운 분들이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달을 맞아 지난 주,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는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되시는 이기풍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을 기억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우리 교회 이사례 권사님의 아버님이십니다. 이 목사님은 원래 평양에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마팻 선교사님이 짓는 교회에 불을 지르고 선교사님을 때려 턱을 깨뜨리는 바람에 선교사님 턱에는 평생 흉터가 남았다고 합니다.
후에 이 분은 회개하고 신학교를 나와 한국의 최초의 목사 일곱 분 가운데 한 분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날, 마팻 선교사님께서는 탐라국, 지금의 제주도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의 제주도는 언어와 문화가 많이 다른 곳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마음속으로 ‘내가 탐라국에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가 “여보, 오늘 탐라국에 갈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왜 당신이 자원하지 않았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더 앞장을 섰습니다. 두 분은 제주도로 가기로 결심하고 평양을 떠났습니다. 이 목사님이 먼저 제주도로 떠나고 가족들은 당분간 광주에 남았습니다.

목사님은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는 산산조각이 났고, 목사님은 나뭇조각 하나를 붙들고 하루 반나절 동안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주도를 복음화 시키고 싶으시면 제 생명을 살려 주십시오.” 더 이상 기도할 기운도 없고 몸은 얼어오고 정신은 몽롱해져서 포기하려고 할 때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어 제주도에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제주도 생활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때로는 잘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자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로 가득 찬 제주도의 사람들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가 났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제가 어릴 때는 홍수가 나면 대동강에 집, 소, 닭, 돼지, 나무 등 온갖 것들이 떠내려 왔습니다. 이 목사님은 홍수의 물살에 한 여자가 나무를 붙잡고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살이 너무 쌔서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는 여자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옷을 벗고 거센 물살 속으로 뛰어들어서 그 여자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목숨을 걸고 여자를 살린 남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야소교 목사였습니다. 그때는 기독교를 야소교라고 했지요. 그 일로 인해 야소교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제주도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190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08년에 제주도에 갔습니다. 그 때는 참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거지도 많았습니다. 아침에 집집마다 들려서 밥을 얻어 갔는데, 옛날 사람들은 아침에 거지가 오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거지를 환영하는 집이 한 집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가정입니다. 사모님은 아침마다 밥을 잔뜩 지어서 상을 차려놓고 거지들을 대접했습니다. 동네 거지들은 이 목사님의 가족을 너무 좋아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거지를 보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분들은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제주도에 15개의 교회를 세우셨고, 몸이 약해져서 광주로 나가 목회를 하는 동안에 또 5개 교회를 더 섬기셨습니다. 나환자촌에서도 천 명의 환자를 온 몸으로 섬기셨습니다. 환자들이 죽으면 아무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지만 사모님은 직접 나환자들의 몸을 씻기고, 염을 해주었습니다.

사모님은 15살에 말라리아에 걸려 3년을 앓다가 죽음을 기다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팻 선교사를 만나 “기도하면 낫는다, 하나님이 낫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18살에 기적적으로 치유가 되어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사모님은 예수를 믿고 매일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예수 믿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딸을 가두고 때리기도 하시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머리를 싹 밀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사모님은 보자기를 쓰고 개구멍으로 나가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도 자유롭게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루는 평양으로 마팻 선교사님을 찾아갔는데, 마침 그 때 게일이라는 의사 선교사님이 그곳에 와 계셨습니다. 자녀가 없었던 게일 선교사님은 사모님을 양녀로 삼아 자기 집에서 많은 의술을 가르쳤습니다. 사모님은 그 때 배운 지식으로 제주도에서 산파로서 해산하는 엄마들을 도와 아이들을 받아주고 돌보아주었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실천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제주도가 복음화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1938년에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이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에 잡혀가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시고 결국은 2년 만에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1940년, 돌아가시기 직전에 집으로 돌아오신 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전력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희생적으로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고 사회단체와 자선단체들을 만들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한국의 현대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선조들은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문화의 변혁과 생활의 변혁을 이끌었습니다. 여성들을 온갖 인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린 아이들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기독교는 또한 이 땅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게 했으며 온갖 현대 학문을 들여왔습니다.

1883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 알렌이라는 선교사가 의사로서 한국에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사실상 첫 선교사입니다. 중국에서 건너와 미국 대사관의 영사로 있으면서 고종 황제의 주치의가 됐습니다. 그를 통해 기독교가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때 민영익 씨가 일본의 자객에 의해서 죽게 되었을 때 알렌 선교사가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왕실 친인척들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담당하여 고종 황제로부터 땅을 얻어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분은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주 목사님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연세대학인 연희전문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안질이 너무 심해져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어 동네에 내려왔다가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소명을 받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마산 문창교회 담임 목사로, 부산 초량교회 담임 목사로 일하는 동안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모두 다 신사 앞에 절하고 타협하는 그 때에 젊은 주기철 목사님은 분연히 일어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우리 민족을 향한 일본의 억압에 항거했습니다.

그 당시 평양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주기철 목사님이라야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기철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오시오!” 주 목사님은 산정현 교회에서 7년 동안 신사참배와 싸우셨습니다.

당시 일제의 압박이 매우 심하여 천주교, 불교, 유교, 기독교까지 모두 신사에 가서 참배하기로 결정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몇 안 되는 분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께서 앞장을 서셨습니다. 7년 동안 감옥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아내에게 “따뜻한 미음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소”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노모와 아내와 자녀들, 가족을 뒤에 놓고 하나님을 일편단심,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믿었습니다. 결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주 목사님은 해방되기 몇 개월 전인 1944년에 순교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믿음은 순교자의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분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나,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도 핍박하거나 위협하는 사람 없고, 너무도 편안하고, 종교의 자유 속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에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따라서 오늘 아침 우리도 새로운 헌신을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분은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제자입니다. 주 목사님께서 초량교회의 목사로 계실 때 경남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학생으로서 주 목사님의 철저한 신앙, 헌신, 결단을 배우고 ‘예수를 믿으려면 저렇게 믿어야지!’ 다짐했습니다. 손 목사님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라고 하는,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나환자촌에 목사로 들어가 평생을 나환자를 섬겼습니다. 제가 제일 감동받은 것은 나환자들이 너무 힘들어 할 때 환자의 손에 흐르는 고름을 목사님이 직접 입으로 빨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의 사랑을 나환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나환자들은 구원을 받았고 소망이 생겼고 하늘이 자기의 본거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목사님은 5년 동안 감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자식들은 있을 곳이 없어서 고아원에 가야만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목사님은 감옥에서 나와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왔고 3년 동안 너무도 즐겁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1948년,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여수, 순천 지역의 인구가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지리산에 숨어있던 빨치산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1주일 만에 3,500명을 죽였습니다. 그 와중에 고등학교 3학년이던 손 목사님의 큰 아들 동인이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같은 반의 공산주의 친구가 동인이를 잡아 “너 지금이라도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줄게. 예수 안 믿겠다는 한 마디만 해!”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동인이가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예수를 믿어!”라고 하자 친구는 동인이를 죽이려 했습니다. 이를 본 동생이 막아섰습니다. “우리 형 죽이지 마세요. 형은 장자인데 집안의 혈통을 이어야 해요. 나도 예수를 믿으니까 형 대신 나를 죽이세요.” 그러나 이 공산주의자는 동생을 밀치고 형을 쏴서 죽였습니다. 동생이 “내 형이 예수를 위해서 죽었다면 나도 죽을 사람이요!”하자 “너도 죽어!” 하고 두 아들을 모두 쏘아 죽였습니다.

두 주 후에 이 살인자는 잡혔고,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손 목사님은 재판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의 두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을 죽인 이 젊은이를 나에게 주십시오. 입양해서 내 아들로 키우겠습니다.” 그 말에 너무 감동을 받은 재판장이 “데려 가시오”해서 그 살인자는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목회자로 사시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자들이 여수 지역을 점령하고 손 목사님을 잡아갔습니다. 목사님은 사형을 받으러 끌려가는 길에서 신발 없이 맨발로 걸어가는 거지를 보고 자기의 신발을 벗어 주었습니다. “나는 이제 신발이 필요 없으니 네가 신어라.” 손 목사님은 신발마저 벗어주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강렬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일편단심, 일사각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뿌리가 된 이와 같은 믿음이 오늘 아침, 여러분의 가슴속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희미해진 신앙, 이 세상에 끌려 다니고 죄에 끌려 다니며 나태해진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고, 자기 목숨을 바치고, 온 몸으로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사랑이 부족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사랑과 우리 선조들의 이웃사랑이 여러분의 가슴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신앙의 유산을 받아서, 순교자의 삶을 기념하는 이 6월에 우리 영혼이 새로워지고, 새롭게 헌신하고 사랑하는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정신과 헌신이 대대손손 이어져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민족이 되기를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