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 힘을 의지하여 (갈 3:23-29, 눅 8:26-29)

  • 잡초 잡초
  • 216
  • 0

첨부 1



1.  날이면 날마다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아이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니 집안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주님을 잘 믿는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허구한 날 남편에게 시달리면서도 아내는 하루같이 사랑으로 대했으며 남편의 상태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편은 늘 하던 데로 그날도 술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도무지 술이 받지 않았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졌고 머리가 심하게 아파왔습니다. 그날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남편이 아내와 함께 교회를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날 교회에서 남편은 믿기로 결심하고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술친구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남편이 어느 날 가장 가까이 지내던 술친구를 만났습니다. 만나자 말자 그 친구는 이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자네 같은 지성인이 그 황당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를 믿는단 말인가? 성경이라는 책을 보았는가?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래 자네는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그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믿는단 말인가?”

  친구의 비아냥대는 이런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직 처음 믿어서 성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만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있다면 나는 그것을 그대로 믿겠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우리 집에서 그보다 더 엄청난 기적을 이루고 있으니까.”

  이 말을 들은 친구는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옛날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예수님은 지금 우리 집에서 술로 가구를 만들고  계신다네”

  성도 여러분, 이 말의 뜻을 아시겠지요? 전에 예수 믿기 전에는 돈이 생기기만 하면 술집으로 달려갔고, 그래서 술이 취해 집에 돌아오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부수고 했으니까 있던 가구들도 성한 것이라고는 남은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믿고 난 이후부터는 술 마시던 돈을 아껴서 그동안 부셔버렸던 가구들을 하나하나 장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옛날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에 못하지 않는 기적을 자기 집에서 이루시고 계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그 가정에 잃어버렸던 평화와 사랑 그리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정말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십니다.

  오늘 믿는 우리에게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 일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십니다.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주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시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님은 엄청난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주께서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는데 그것은 군대귀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군대귀신은 로마군대의 레기온을 말하는데 여단규모의 병력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사람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놓아도 그것을 끊어버렸습니다. 옷도 벗어 버린 채 무덤 사이에 거하면서 돌로 자기 몸을 상해하며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습니다.

  우리는 이 군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 젊은이들, 청소년들의 모습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의 어떤 규범이나 심지어 법으로도 저들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무법천지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오폭 족”과 “자폭 족”입니다. 즉 오토바이 폭주족과 자동차 폭주족을 말합니다. 이런 극단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 사회의 모든 쇠사슬도 고랑도 이미 그 힘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영화관에 갔다가 학생규율을 담당하는 체육선생님에게 적발되면 영락없이 정학처분을 받았습니다. 야한 소설을 몰래 읽다가 가정에서 어른들에게 들키면 집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걸리면 말 그대로 “각오” 단단히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까지 음란물이 침투했고, 그것을 막을 길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단지 음란물뿐만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인간의 기술과 지식이 발전할수록 더 심해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락없이 더러운 군대귀신에게 단단히 걸려버린 세상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제어하거나 심지어 그 근처를 지나다닐 수도 없는데, 우리 주님이 거기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미 멀리서 그 사람을 보신 주님은 그를 사로잡고 있는 더러운 군대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들은 주님 명령일하에 모조리 나와서 이천 마리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고 그 돼지 떼들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초점은 2천 마리의 돼지 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귀신 지폈던 그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포커스를 주님에게로 맞추게 됩니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단지 옛날 거라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절실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자는 오늘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뿐이신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저 거라사 광인을 구하기 위하여 온갖 지혜와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만일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면서 저 갈릴리 나사렛 사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예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 로마 제국의 그 막강한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복음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당시 세계는 정신적으로는 헬라가 지배하고 있었고, 무력으로 말하면 로마가 제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오직 복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달라지고 발전해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음 말고 다른 처방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하려는 꿈을 버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처럼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어리석은 방법론에 유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오직 복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오늘 구약성경은 유명한 엘리야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얼마 전에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그 선지자들을 모조리 처단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갈멜 산에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여 3년 6개월 가뭄을 해결하는 비가 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엘리야에게는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였던 엘리야였으나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자기 생명을 위하여 브엘세바의 광야까지 도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세벨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순간 기진맥진하여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든지 선지자답지 못하게 로뎀나무 아래 주저 물러앉아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제만 해도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하여 하늘에 닿는 듯 했는데 별것 아닌 것에 속이 상하여 오늘은 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엘리야가 저 정도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5절에 보면 “천사가 그를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먹고 힘을 얻을 음식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힘을 의지해서 40주야를 달려 하나님의 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장 약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을 영육간에 공급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다소 의기소침해졌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에서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는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의 천사를 나를 위해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엘리야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서였으나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산에서 엘리야를 새롭게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비로소 엘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패 같은 현실을 바꾸셔서 새로운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합력위선의 은총이요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도 결국은 엘리야처럼 때로는 갈멜산의 승리와 때로는 로뎀나무 아래서의 패배 사이를 왕래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갈멜산의 승리만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로뎀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그때 우리도 엘리야처럼 낙심천만하여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온갖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 “죽고 싶다”든지 “죽어야 겠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 환경이나 내가 지금 겪는 상황이 아닙니다.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인생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 까지 떨어졌으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까 그 밑바닥이 승리를 위한 디딤돌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편에 보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요 능력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로마서 8: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이가 무엇을 아끼겠느냐?” 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 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