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쁨을 충만히 가지라 (요 17:13)

  • 잡초 잡초
  • 261
  • 0

첨부 1


기쁨을 충만히 가지라(요한복음 17:13)

  "1분을 웃으면 인상이 변하고 하루를 웃으면 인생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음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웃음은 마음의 치료제일뿐만 아니라 몸의 미용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웃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고속도로나 순환도로에 보면 어김없이 요금을 받는 정산소가 있습니다. 요금정산원은 하루 종일 네모 박스 안에 갇혀서 매연을 마시면서 반복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유독 유쾌, 통쾌하게 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파티를 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산소의 춤추는 직원은 특별한 것도 아니었고, 같은 곳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제한 된 삶과 전혀 다르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그 요금정산소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유쾌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이 됩니다. 기쁨은 환경이나 조건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 중에 일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저들 안에 있어서 저들의 기쁨이 충만한 삶" 그 삶을 주시기 위해서 주께서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그 몸 버려 죽어서라도 우리들에게 주시고 싶어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토록 선물하고 싶었던 삶 그것은 기쁨의 삶이었습니다.

  성도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실제 성도들의 얼굴에는 참 기쁨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고민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루에 400~500번을 까르르 까르르 웃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갈수록 웃음의 횟수가 적어져서 하루에 단 몇번 웃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근심이 많아지고 걱정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주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인데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또 아프리카의 성자인 슈바이처 박사는 현대 크리스찬을 이렇게 비유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물없는 강이 많다. 모래 언덕 사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초라하고 비참하다. 오늘날 크리스찬들도 물없는 강처럼 억지로 흘러가는 신앙생활, 메마른 정신, 형식과 전통만 겨우 유지하는 교회를 많이 본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봉사도 합니다. 십일조도 하고 헌신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모두 자기 열심입니다.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율법으로 열심히 자기 의를 쌓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부딪치면 곧장 실족합니다.

  이왕 우리가 믿을려면 멋지게 믿고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기도로 날마다 하나님의 살아게심을 누리고, 항상 기뻐하고, 입술에는 찬양과 감사가 넘치며 당당한 그리스도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자에게나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강력하게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징이 기쁨이고, 브랜드가 기쁨이 충만한 마음과 얼굴인 것입니다. 성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어있습니까?
  메스컴에서 보여주는 성도와 교회의 이미지 아주 잘못되어 있습니다. 험상굿은 얼굴을 하고 싸우고 분쟁하는 모습,

  교회는 바드시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이 없다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유보된 미래의 기쁨이나 천국에서의 천국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오늘의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된 말 중에 "지금"이란 말과 "세상에서"라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내가 이 말을 하옵는 것은"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주의 백성들이 주님으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았다가 나중에 기뻐하는 것은 그것은 기독교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예수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슬픈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결코 기뻐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시대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가 예수님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슬픔이 많은 시대에 오신 것은 그가 친히 슬픔의 사람이 되시므로써 우리를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사 53:4~6).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산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주님처럼 핍박을 받았던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주님은 불평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불의 앞에서 화를 내시기도 하셨지만 언제나 평안과 기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이 무엇입니까?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구원받고 사랑받았다는 기쁨, 사랑해도 좋다고 허락받은 기쁨입니다. 짝사랑(Onesied Love)- 허락받지 못한 사랑이 짝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비참한 사랑입니다. 마 22:37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이것을 바로 영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내게 경험되었을 때 옵니다. 주님의 나의 주님이 되셨음을 알았을 때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첫번째 자리에 예수님(Jesus)을, 그리고 두번째 자리에 다른 사람들(Others)을, 그리고 마지막 자리에 자신(Yourself)을 두게 될 때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성도와 교회는 최고의 힘을 자기고 있으며 이 세상을 감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은 기뻐할 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