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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주어진 이 한 번의 기회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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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진 이 한 번의 기회 / 누가복음 13:6-9

현대인들의 방황은 잘못된 자기 이해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들이 잘못된 자기 이해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나를 찾고 나를 알고 나를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의외로 환경보다 부정적인 자아형성이 주는 고난이 훨씬 많습니다.  상처받은 자기 이미지, 그것이 외적인 환경이 주는 고난보다 훨씬 큽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자아의식의 문제입니다.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비교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소외감이니 열등의식이니 피해의식이니 적대감들은 다 비교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러한 자기를 파괴하는 비교의식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나도 부족하고, 여러분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는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무언가 되고 있다는 창조의식을 가지십시오.  창조의식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인생에 완전은 없습니다.  단지 완전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계속 다듬고 만들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나는 지금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만 역사하면 무언가 될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미완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는 절대적으로 상대하십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는 상대적으로 상대하십니다.

보십시오.  애굽을 떠난 사람은 많았지만 가나안을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비밀한 역사를 본 사람은 절대신앙을 가진 사람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십시오.  하나님께 한 다리 걸쳐놓고 그것이 안심이 되지를 않아서 또 다른 한 다리로 세상을 향해 걸쳐놓는 그런 상대적인 신앙의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든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겠다는 거룩한 결단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마귀가 어디에 기생할까?  패역한 마음에 기생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에 기생합니다.  의심하고 게으른 마음에 기생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마음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불평과 원망을 없애야 합니다.  의심과 게으른 마음을 멀리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감동이 없고 그 마음에 뿌리를 내리 못한다면 그곳에 마귀가 기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입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행동의 습관도 중요합니다.  태도의 습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습관입니다.  몸은 결국 마음의 노예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일 저주받은 마음, 강퍅한 마음은 감화와 감동을 받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령은 그 마음에 감화와 감동을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동을 받는 마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 제일 큰 훈련은 마음의 습관에 대한 훈련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날이 옵니다.  온유한 마음은 땅을 차지하고 겸손한 마음은 하늘을 차지합니다.  마음에는 위치가 있습니다.  마음에는 크기가 있습니다.  마음에는 질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소유가 있습니다.  마음의 습관을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어 매야 됩니다.

신앙 훈련이 무엇일까?  신앙 훈련은 결국 마음의 습관에 대한 성숙 훈련입니다.  이 마음의 습관을 자꾸 성숙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삶에서 작은 은총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상적인 삶에서 아주 작은 은총이라도 소중히 하십시오.  지금 우리들은 너무 값비싼 것에 익숙하고 큰 것에 대한 중독증에 걸려 있습니다.  놀라운 진리는 작은 것에 대한 즐거움에는 중독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제일 아름다움은 작은 것에 있습니다.  작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십시오.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자가 큰 것에도 감사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는 모름지기 그 마음에 불평이 없어야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물질이나 권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습관을 체질화될 때까지 가르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을 책망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십니다.  마음에는 빛도 있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다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연단도 하십니다.  그 마음을 시험도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자꾸 학대하지 말고 마음을 늘 아름답게 지키고 사랑하고 가꾸어 나갈 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둘 것입니까?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찾지 못하면  방황하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찾지 못하면 탕자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진리 중심, 원칙 중심으로 사는 것이 균형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세상은 변합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그분에게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중심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한 비전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의 중심을 두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마음을 고정시키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 왜 왔습니까?  이 바쁜 때에 단지 예배행위를 하러 왔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마음의 습관을 바로 하고자 나왔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예언을 하고 꿈을 꾸러 나왔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소망을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하늘의 소망을 품으십시오.  마음을 넓게 열어서 하나님의 비전을 마음에 담으십시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보다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이 다음에'라는 말들을 곧잘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 길에서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찾아온 기회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는 왔을 때에 붙잡아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영혼추수주일을 한 주간 앞두고 있습니다.  영혼추수주일을 한 주간 앞둔 이 시점에서 다음의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들에 대해서 충성되게 책임을 잘 감당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그러니까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무화과나무가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의 책임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도 가늘고 곧게 자라서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가 아닙니다.  그저 비틀비틀하면서 옆으로 퍼져서 그 목재는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기 좋아라고 사용하는 관상용 나무도 아닙니다.  동시에 꽃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무화과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화과나무는 재목용도 아니고, 관상용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뗄감으로도 쓸 수 없는 나무입니다.

반면에 열매는 많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길거리에 무화과나무를 많이 심어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배고픈 사람은 좀 따서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은 그런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왜 존재할까요?  저는 무화과나무의 존재 이유와 인생의 존재 이유가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오게 하시고 3년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셨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목적이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존재의 이유는 더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렇게 좋고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 생명을 나 혼자서만 간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그가 교회당에 드나든 회수가 얼마나 되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를 몇 년 더 믿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는가 하는 것도 더더구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훗날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고 주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은 내 이름 석자를 불러 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 때문에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동안 영혼추수주일을 위해서 부단히 달려왔습니다.  이제 제가 드리는 질문에 속으로 자신에게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다음 주일에 이 자리에 초청할 베스트가 있습니까?
제가 베스트 카드를 제출하라고 했더니 전혀 함께 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사람도 있더라구요.  아닙니다.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예배드릴 그 베스트가 있습니까?
내 어깨 위에 세울 그 한 영혼의 이름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될 그가 누구입니까?
없다구요?
그러고도 우리가 예수는 생명이요 구원이라고, 예수가 소망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가 정말로 생명이요, 구원이요, 소망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내 인생을 바꾸었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신 주님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좋은 주님에 대해서 침묵할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시집 장가를 가고,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서도 그 가정을 책임질 줄 모르는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서약을 하고서도 아내를 향한, 남편을 향한 최소한의 윤리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 세대의 무책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도 교회 생활을 할 때에도 제직이 되어 놓고도 아무런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어느 때엔가, 내 인생 속에서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채 빈손으로 주 앞에서 내 삶을 결산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더 열심히 열매 맺는 책임적인 사명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 앞에서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치시기를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 언양 영신제단을 섬기며 하늘의 복을 누리는 내 믿음의 계보를 만들어 가십시오.

두 번째로, 여러분은 그 동안 신앙적으로 얼마나 더 성숙해 지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포도나무 못지 않게 무화과나무에 더 정성을 쏟을 것을 당부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뜻을 받들어서 무화과나무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첫 해에는 별 이상 없이 잘 자랐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잎이 무성할 정도로 자라야 할만큼 자랐습니다.  주인과 포도지기는 정성을 쏟은 만큼 무화과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에 흐뭇해했습니다.

2년이라는 해가 지나고 3년째 되는 해에 주인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거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습니다.  3년째 되는 해에 무화과나무는 그 전 해처럼 잎만 무성하고 분명히 있어야 할 열매는 없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3년 동안이나 거름을 주고 사랑으로 가꾸었다면 이제는 그만큼 성숙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무화과나무들처럼 그렇게 성숙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스스로 성숙됨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영적 신앙 상태를 망각하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열매가 없음에 대한 자기 고민도 없었습니다.  그냥 잎만 무성했습니다.  솔직히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에게 열매가 없음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고민조차도 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성숙되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어찌 땅만 버리게 하느냐?"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땅만 버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무화과나무가 의도적으로 주변 땅을 버리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나무가 의도적이 아니었을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덜 성숙된 무화과나무는 소중한 땅만 버렸다고 한다면, 죄송하지만 오늘 교회 안에서도 성숙되지 못한 신앙으로 역사와 전통만을 고집하는 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의 삶에서 열매는 없고 말만 무성한 사람들이 바로 미성숙한 교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는 말꾼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일꾼이 들어와야 합니다.  말꾼이 되지 말고, 일꾼이 되십시오.

보십시오.  본문 7절에서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를 몇 년이나 길렀다고 했습니까?  3년입니다.  옛 속담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을 읊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식당 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  좌우지간 3년입니다.  3년의 세월동안 주님과 함께 제대로 교통하고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솔직히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3년이나 했으면 뭔가 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뭔가 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3년 동안이나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그에게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내가 얼마만큼 영적으로 성숙했느냐 하는 것은 '내 인격에 얼마나 변화가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올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이었습니다.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진정한 평안으로 그 내면의 인격을 환경이 흔들 수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정말로 오래 참을 줄 알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 동안 예수를 믿으면서 여러분은 얼마나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해 지셨습니까?  이제는 좀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지 않음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려라는 이 말씀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주시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타성에 젖어서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성숙하지 못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의 결산을 알리는 사건이 내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나는 어떤 열매를 가지고 주 앞에 설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그 마지막의 기회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특별히 저는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지기에게 땅만 버리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때에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것이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보십시오.  포도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고서 한 해만 더 유예의 기간을 주면 자기가 한 번 더 정성을 다해서 돌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자고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번만 봐 달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포도원지기의 간청에 주인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기쁘게 기회를 허락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무화과나무가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는 포도원지기가 또 한번의 기회를 간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영혼추수주일이 한 주간 남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번의 기회를 헛되게 보내지는 마십시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한 주간 부지런히 사람을 찾아 나서십시오.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책임감 있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성숙된 신앙인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구체적인 열매를 맺기 위한 내 인생의 노력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준엄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인들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만은, 다시 한번 내 인생의 감사의 제목들을 더듬어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회복하는 귀한 주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을 더듬어 감사하며, 내게 주신 분복들을 감사하며, 풍성한 영적인 복들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은혜로운 주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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