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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자의 신앙을 따르자 (히 11: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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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11:36-38)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가 제정한 순교자 기념주일입니다. 감리교회는 일제시대와 6.25를 겪으면서 많은 목회자와 신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에서 순교하신 신앙의 선진들을 기념하면서 그 분들의 순교적 희생과 영성을 계승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순교적 영성을 잃어버릴 때 세속화되어갔고 교권으로 얼룩져 갔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순교적 영성을 회복하고 지속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의 시대로 순교의 시대였습니다. 주후 96년경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는 소아시아전역에 광범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순교한 것입니다. 
  순교적 신앙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순교합니까? 순교자들은 순교적 상황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곧 순교적 영성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순교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순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난과 시련도 참고 견디며 목숨까지 불사르는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 저자는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새 번역)고 했습니다.

  순교적 믿음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내 놓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절대적 믿음인 것입니다. 순교적 믿음은 거짓 없는 진실 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시고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유다왕국의 패망으로 바벨론에 끌려온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므로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도록 협박하기도하고 회유하는 왕에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왕은 진노하여 풀무를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고 그들을 그 속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도 타지 않도록 하셔서 느부갓네살 왕으로 존 귀히 여김을 받게 하셨습니다.
  순교적 영성은 죽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참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순교적 영성은 고난의 가치를 가지고 마지막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4장12절로부터 14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새 번역)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나타날 영광에 참여합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축복이 유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을 위한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고난의 영성은 내려놓는 것이며, 희생하는 것이며,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주님 앞에서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위한 고난의 길,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단련시켜서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엎드릴 때 우리를 영광스런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열 두 제자의 마지막 최후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습니다.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달린 십자가는 ×형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서 전도하다가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목 베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데기에 떨어뜨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얼이라는 시몬은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곱의 동생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맛디아는 가룟 유다 대신 보충된 제자로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백 살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밧모섬에 유배되는 살아있는 순교자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교부인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승리자들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계7:9-17)

  영광스런 승리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교자입니다. 이 마지막 영광의 승리를 바라보며 고난의 길을 감수하는 것이 순교자의 영성입니다. 

  순교적 영성은 교회의 자랑스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영적으로 어둡고, 우매하여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시절을 살았습니다. 일제식민시대에는 일제에 아부하며 목숨을 연명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에 나가기를 권장하며 학생들을 팔아먹는 선생이 있었고, 앞장서서 교회의 예배를 알리는 종까지도 떼어 바치는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따라가는 교인들은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어느 시대나 물질과 이권에 모든 것을 팔아먹고 갈대와 같이 흐느적거리는 신앙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순교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며 지혜롭지 못하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세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아무리 잘 살고, 멋있게 죽었다고 할지라도 이들을 존경하지 않고 경멸합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현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조상문 목사님은 전임목사님이신 김유순 감독의 ‘선한목자론’에 입각하여, 교회에 남아 은밀하게 새벽마다 기도회를 열어 열 명 남짓 피난가지 못한 노인 교인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공산군이 낙동강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한 8월에 접어들면서 서울에 남아 있던 우익 인사들에 대한 체포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교회 일을 돕고 있던 이군혁 권사가 찾아와 “아무래도 저들이 목사님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제가 살펴볼 터이니 목사님은 어서 피하세요.”하며 강권적으로 등을 떠밀었습니다. 하도 간절하게 애원하는 바람에 결국 조상문 목사는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 이튿날, 이군혁 권사는 목사 대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려고 교회로 갔는데, 조상문 목사가 강단위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한강 건너 계실 분이 왜 여기 계세요?”
“어제 권사님 말씀을 듣고 한강을 건너려고 아현동 고개 넘어 공덕동까지 갔는데, 남아 있는 교인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돌아왔어요.”
  이 권사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조상문 목사는 죽을 자리를 찾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8월 23일 인민보위부에 연행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 잠깐 있다가 김유순 감독, 양주삼 감독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북행길에 올랐습니다. 휴전 직후 한 낯선 장교가 조상문 목사 유족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던 저도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조상문 목사님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는데 어디쯤에선가 목사님께서 저를 은밀히 부르시더니,‘ 우리야 이미 살만큼 산 노인들이지만 자네는 아직 젊으니 탈출해서 새 길을 찾게. 우리가 도와줄 테니 기회를 타서 도망치게.’ 하시고는 노인 목사님 몇 분이 보초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틈을 타 저는 탈출에 성공, 곧바로 군대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김유순 감독님과 조상문 목사님등  많은 감리교 목사님들이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선한목자’로서의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 분들은 선한목자로 순교하신 감리교의 자랑스러움입니다. 
  순교자는 시대 속에서 참된 신앙의 삶을 바로 비추어주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랬고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순교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이를 증언하다가 그 일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까지 선택한 성도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은 교회의 자랑스러움인 것입니다.

  유관순은 일제에 대한 굽히지 않은 신앙정신과 나라와 민족을 끝까지 사랑하여 목숨을 다할 때까지 기도하며 독립만세운동에 최선을 다한 진정한 순국자 입니다. 그녀는 감리교 이화학당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매봉교회 전도사였는데, 그녀는 매봉산에서 기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마침내 일경들의 고문에 의해 포악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숨을 내놓는 나라사랑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유관순은 순교자였습니다. 그녀의 신앙과 애국심은 감리교회의 자랑인 것입니다. 순교자의 영성은 교회의 자랑스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순교자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순교자의 영성을 회복하기로 결심합시다. 순교자의 영성을 회복함으로 우리시대의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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