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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시는 주님 (사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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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시는 주님(이사야 12:1-6)

뭐든지 다 아는 아들을 둔 엄마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그야말로 신동 이었습니다. 그 영특함은 인근에 알려졌고. 엄마는 아들을 칭찬하는 소리에 목에 힘이 들어가 항상 싱글벙글 했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든 성적표는 모두 빵점이었습니다. 놀란 엄마는 학교에 달려가 답안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들의 답안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답안지 맨 밑에 이렇게 쓰여 있다 뿐입니다. “다 안다.”

사실 우리가 다 아는 것 같아도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안다고 하는 것 역시 그냥 알고만 있을 뿐 삶에 아무런 쓰임이 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담배 폐암에 원인이 된다.” 그것 알면 담배 피우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그것 알면서도 담배 피는 겁니다.

살다보면 돌에 걸려 넘어질 때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돌에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넘어진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똑똑한 사람은 한번 걸려 넘어진 돌은 피하거나 뛰어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는 물론 남이 걸려 넘어진 돌을 보고도 피하거나 뛰어 넘습니다.  그것이 곧 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개인이나 국가가 망하는 원인은 보통 같은 돌에서 반복해서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수많은 환란과 가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늘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은 늘 같은 돌이었습니다. 한 번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 그래서 아프게 했던 그 돌에 여전히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배교였습니다. 그것은 으레 우상숭배와 죄악생활로 직결되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던 겁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아프게 했던 것들 늘 다른 것 같아도 실상은 같은 거였습니다. 늘 슬프게 했던 것들이 다른 것 같아도 실상은 같은 거였습니다. 매일 걸려 넘어지는 그 돌부리에 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다 안다”고 하지만 오히려 “다 안다”고 하는 그것으로 시험문제 답안을 쓰지 않은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삽니다.

보세요. 세상 사람은 어떻든 간에 여러분과 저의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던가요? “나,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인생은 고해”라고 말합니다. 산다고 하는 그 자체가 곧 고난의 바다라는 겁니다.
1926년에 불리었던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는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 나 죽으면 그만일까 / 행복을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 너 속았음을 네가 아느냐 /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 너 죽은 후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 나 죽으면 고만일까 /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나 찾는 것 허무

이 노래의 가사는 ‘윤심덕’이라는 동경에서 성악을 전공한 여인이 쓴 것으로 ‘이비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멜로디에 얹어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른 겁니다. 1926년 일본 오사카에서 3일간 음반을 취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합니다.
그래요. 산다는 게 그렇습니다.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입니다. 결국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겁니다. 더구나 반복되는 아픔과 슬픔 그러면 왜 사나 싶지요.

우리나라의 역사도 그리하지만 성서의 이스라엘. 그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광야 40년,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정복, 사사시대를 거쳐 왕들이 다스리는 제대로 된 나라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고통은 광야 40년에도 계속 되었고, 가나안 땅에서도, 사사시대에도,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에도 반복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대체 고난의 바다 같은 인생을 왜 사는 걸까?

유대인들. 히틀러에 의해 무자비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끌려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그 열악한 음식과 환경, 아무 의료시설 조차 없는 곳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 갔지만 독일계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살아났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석방된 그는, 어떻게 해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대답합니다.

“어떤 마음자세를 갖는가는 내 선택에 달린 일임을 난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난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 쪽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선택하기 위해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에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난 내 아내의 손에 생각을 집중했다. 한 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한 번 더 껴안을 수 있고, 가슴과 가슴을 맞댈 수 있기를 난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내 생명을 일 초 일 초 연장시켜 주었다.”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에 갇힌 다른 포로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던 것도 아니다. 그에게 배급되는 음식은 국 한 그릇에 완두콩 한 알일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쓸모없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들에 절망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대신 그는 단 한 가지의 목표에 마음을 쏟았다. 자기 자신에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주었으며, 그 이유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그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이 쓴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 중의 글입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포로수용소>라는 책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살고 싶은’ 욕망과 ‘살아야겠다’는 신념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숫한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이사야 곳곳에 나 있는 희망의 글, “그날이 오면”
비록 지금은 그 백성들이 앗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 고통당하지만,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과 야곱 겨레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는 그들을 친 자들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인 주님만을 진심으로 의지할 것이다. 남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남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사 10:20-21)

“그날이 오면, 너희는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 전에는 주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으나, 이제는 주님의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나에게 두려움이 없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사 12:1-2)

“그날이 오면, 너희는 또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며, 그의 높은 이름을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이것을 온 세계에 알려라.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노래하여라.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참으로 위대하시다.”(사 12:4-6)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강대국 앗시리아, 바벨론, 그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의 진노로 그 강대국에게 고통당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이유였습니다.
이 말씀은 총체적 난국에다 주변나라의 각축장이 되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남 왕국 유다에게는 어둠속의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기인된 것이었습니다. 마치 부모의 진노가 자녀를 바로 세우려는 강렬한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히 멸망하는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이었습니다.

공부 잘하고 착한 자녀를 왜 부모가 때리고 야단치겠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백성을 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겠어요? 잘못하니까, 그게 아니니까, 그리로 가면 죽으니까. 그래서 그리로 못 가게 하려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작입니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보내서 니느웨에 하신 말씀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는 “회개하라”는 겁니다. “회개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겁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곤 하나님 없는 삶을 삽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못 산 거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서 못 살거나, 매일 병들거나, 하는 일마다 안 되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은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죽은 자”
사람이 살아보아야 100세 살면 오래 사는 겁니다. 그런 말 있어요. “구구 팔팔 삼사”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삼 일만 아프고 죽자.” 여러분! 모두 그렇게 사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영원히 죽는다면 그 삶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가 영원히 죽은 사람이라면, 그가 영원한 지옥에서 지내야 한다면, 그가 100살을 살았든, 200살을 살았든 그것이 무슨 대단한 자랑이 되겠습니까? 단 하루를 살다죽더라도 예수 믿는 믿음 안에 사십시오. 그러면 영원히 삽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지만, 영원히 죽은 우리지만, 그래도 사랑하셔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여기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은 끝내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썩고 또 부패 했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보세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들이 고난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한번으로 끝나는 거라면 그들은 벌써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때가 되면, 그날이 오면, 오히려 은혜와 회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도 참” 그럴 때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면 진노하십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용서 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상처를 어루만져 고쳐 주십니다. 다시금,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다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진노하시고, 또 때가 되면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반복 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에게 배알이라는 게 있는데, 사람에게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그래서 도저히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다고 외칠 때 있는데, 하나님께는 도무지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하며 사람을, 바로 여러분과 저를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남들 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때 있지요? 여러분이 남들 하는 걸 보면 눈꼴시어서 봐줄 수 없을 때 있지요? 여러분도 한번 토라지면 자존심 때문에 말하기는커녕 얼굴조차 마주 치고 싶지 않을 때 있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끼리도 용서가 안 되는데, 하나님 앞에 사람이 뭐 잘 한 게 있다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신단 말입니까? 여러분도 남을 용서 못하고, 남도 여러분을 용서 못하는데, 사람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용서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하든 살려내시려고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죄인 된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래서 그 죄를 용서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되셨어요? 교회 다닌 지 몇 년이나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가 다른가요?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산다.”고 하실 수 있으세요?

요한복음 16: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우웬’의 말처럼 우리는 ‘조금’과 뒤의 ‘조금’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조금의 시간에서조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나요?

그런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시던가요? “이제 난 너희를 사랑하지 않으련다.” 그러시던가요? 여전히 여러분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하고 기도하신 분이 예수 이십니다.

여러분은 혹시라도 하나님을 잊으실 때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혹시라도 하나님을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모른다 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혹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전히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주신다. 너를 지키시느라 졸지도 않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1-4)

여러분은 피곤하다고 잠들어도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일이 안 풀린다고 화내고, 짜증내고, 불평하고, 주저앉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고 계십니다.
2절,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 그걸 모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걸 모릅니다.

“다 안다”고요? 정말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원이심을 믿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의지합니까?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없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의 구원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사업이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하십니까? 인생이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 멀리 하십니까? 먹고 사는 것이 염려되고 걱정이 돼서 하나님을 더 멀리 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구원이시라면, 하나님만 붙들고 매달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매달려도 그만, 안 매달려도 그만. 붙잡아도 그만, 안 붙잡아도 그만.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의 감격과 기도의 기쁨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고통당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주변의 강대국을 구원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북쪽에서 쳐내려오면 남쪽 이집트의 도움을 요청했어요. 남쪽에서 쳐 올라오면 북쪽의 강대국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바로의 보호를 받아 피신하려 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 하는구나.”(사 30:1-2)
그래서 그 결과는? 3절, “바로의 보호가 오히려 너희에게 수치가 되고, 이집트의 그늘이 오히려 너희에게 치욕이 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하려합니다. 나귀 등에 선물을 싣고, 낙타 등에 보물을 싣고, 거친 광야를 지나서 이집트로 갑니다.(사 30:6)

우리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다행이고 안 도와주셔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너무 구원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기보다 주변의 구원자를 찾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저가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하고 외칠 수 있기를 빕니다. 한 번 함께 해 보십시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아멘.

이제 여러분은 3절의 말씀처럼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퍼 울리게 될 줄 믿습니다.
아무대서나 물을 퍼 올린다고 되는 거 아닙니다.
석유시추선. 대략적 가격이 10억 달러, 그러니까 1조원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데서 시추한다고 석유가 나오나요? 무작정 바다에다 띄워놓고 시추하던가요?
하물며 우리의 구원이겠습니까?

요한복음 4:13-1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곧 우리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되십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주님의 은혜와 구원을 체험하면,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온 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구원자로 확신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주 하나님은 그들의 힘이요, 노래요, 구원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렀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힘이요, 노래요, 구원이심을 확신 합니다.

이 믿음으로 늘 감사 하십시오. 늘 찬송하십시오. 주님께서 하신 영광스러운 일을 온 세계에 알리십시오.
우리 삶에 불행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배운 것 없어서도 아닙니다. 돕는 사람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나의 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시는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희망을 선택하기 위해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사모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힘이요, 노래요, 구원되시는 주님께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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