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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福) 중의 복, 팔 복 (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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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福) 중의 복, 팔 복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 홀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때 12제자를 포함한 극히 소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입을 열어 천국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 말씀으로 이를 ‘산상보훈’,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 위에서 가르쳐주신 보배로운 말씀’이란 뜻입니다. 너무 고귀한 보배로운 말씀이기에 그렇게 명칭을 붙인 겁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나라의 혁명 선언서다. 아니 세상을 전복시키는 거대한 폭약이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히 혁명적이고 폭발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수쟁이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라고 말한 인도에 간디를 비롯하여, 톨스토이, 마틴 루터킹, 본 회퍼 등 수많은 지도자들이 이 산상보훈 때문에 뒤집어졌고, 그래서 그들이 또한 세상을 뒤집어 놓는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우리 화평의 성도들도 이 산상보훈 메시지를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우선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8개의 복, 팔 복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팔 복의 말씀 중 앞에 3가지 복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러분,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이게 그런 말입니까? 아니지요. 이 가난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심령(心靈), 마음과 영혼이 가난함을 가리킵니다. 다른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poor in spirit)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절대적인 무능력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영적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이런 마음 상태입니다.

(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 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교인들 중에는 영적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배부르며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계시록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배부르며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그들은 물질의 풍요 속에서 마음도 배불렀습니다. 마음의 가난과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마음만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목말라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특징은 뭔가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잔치 집 대문 앞에서 배고픈 거지는 체면을 따지지 않습니다. 용감하게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어떤 모멸을 당하더라도 배고픔을 채워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나옵니다. 배고프니까 주일에도 나오고 평일에도 하나님 앞에 옵니다. 낮에도 나오고, 밤에도 나오고, 그러고도 배고파서 새벽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며 받아먹습니다.

  왕이었음에도 다윗의 마음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배고팠습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늘 사모했습니다.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131)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이런 사람은 소화도 잘 시킵니다. 무슨 말씀이든 다 받아먹습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건강하니까 뭐든지 먹고 소화도 잘 시킵니다. 여러분, 거지가 소화제 먹는 것 봤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소화불량이 없습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어떤 복이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겁니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마 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찬송을 부를 때나 기도를 할 때, 또 말씀을 들을 때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얼굴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그를 보는 이마다 ‘아, 저게 천국의 모습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옆사람에게) ‘집사님의 얼굴이 바로 그러네요.’ 

  천국은 물질의 풍요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진정한 행복을 원하십니까? 천국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이 임할 줄 믿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깡통을 차고 놀아도 행복합니다. 꽁보리밥을 먹어도 꿀맛입니다. 여러분의 가난한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기쁨을 맛보기를 바랍니다. 누가 그 기쁨을 빼앗아 가겠습니까? 누가 그 하늘나라를 파괴하겠습니까? 절대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천국의 복을 원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십시오.


2. 애통(哀痛)하는 사람이 복이 있으니 저희가 위로를 받습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이란 슬퍼서 서럽게 우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니요? 복이 있기는커녕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애통은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이 애통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 죄 때문에 슬퍼하면서 우는 울음을 가리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56:8에 ‘이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죄 때문에 울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게 가장 큰 은혜요, 복(福) 중의 복입니다.

  지난번 김용섭 집사님 간증 때 엄청 많이 울었다고 했지요. 나도 많이 울었어요. 분해서 울고 가슴이 아파서 울고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은 죄를 아파하며 애통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의 죄가 아무리 크고 중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애통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 38:5)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 년을 더하고

  하나님도 눈물에 약하십니다.

  다윗은 왕이 죄를 범했습니다.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부하 장수인 우리야를 죽이는 살인죄를 지었고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취하는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그의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애통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리고 다윗이 이렇게 회개기도를 하였습니다.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애통하는 눈물을 보시고 성군(聖君) 다윗으로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어느 날 한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는 남의 것을 불법으로 속여서 취한 것도 없고, 불의한 일도 하지 않았으며, 간음하지도 앉았고 또한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으며,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서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기를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애통해 했습니다.

  주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누구를 의롭다 하셨습니까? 자기 공치사를 하는 바리새인보다 자기 죄를 자백하며 애통해하는 세리를 더 기뻐하셨습니다(눅 18:14).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경우, 둘 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고 가룟유다는 은30량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쓰임을 받았지면 가룟유다는 영원히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애통해했습니다. 

(마 26:75)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주님께서 이러한 베드로를 위로해주시고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애통해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냥 후회만 하고 아파하다가 스스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한 애통이란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 토해내는 겁니다. 그때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의 지은 죄를 생각하며 애통하고 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약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습니까? 애통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3.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으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 ‘온유’함이란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유순한 마음을 말합니다. 칼빈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겁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온유한 사람은 독하고 모진 사람에 비해서 늘 손해만 볼 것 같습니다. 지독한 사람이 잘 살고 유순한 사람은 못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왜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시73:28). 곧 망할 것 같아도 망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잡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믿은 안에서 온유한 자가 되십시오. 

(잠 24: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시 37: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 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여러분, ‘부드러운 혀가 단단한 이보다 오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입니다.

(잠 25:15)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임종을 앞둔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인 노자(老子)를 불렀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도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아느냐?’ ‘예,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다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네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그리고 눈을 감았답니다. 

  성도여러분, 복이 있는 자가 되고 싶습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고 싶습니까?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조카 롯을 쫓아냈습니까? 아브라함이 온유하지 아니했다면 아마 그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습니까?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이 먼저 좋은 땅, 마음에 드는 땅을 고르도록 양보했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결국 누가 축복을 받았습니까? 누가 땅을 차지했습니까? 온유했던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다. 약삭빠른 롯은 소돔, 고모라와 함께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그랄의 목자들이 와서 그 우물을 자기들 것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그들에게 내주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파고 났더니 또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또 넘겨주고 새로운 우물을 팝니다. 그러기를 4번이나요. 그래서 이삭이 망했습니까? 천만에요. 온유하므로 참았더니 하나님이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성경에 진짜 온유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하나님이 인정했습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본래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란 모세가 하루는 거리에 나갔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애굽사람을 때려죽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과격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 집의 양을 칩니다. 그런 연단 속에 그가 낮아지고 다듬어져서 온유한 사람이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필요한 일꾼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성품을 가진 집사와 권사, 장로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괴롭히고 억울한 말을 해도 그와 대적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복수를 하는 것 보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게 승리하는 겁니다. 결국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온유를 배웁시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못박는 무리를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온유의 열매가 열립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면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 복은 일시적입니다. 물질, 부귀영화, 좋은 환경은 행복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팔 복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이 팔 복이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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