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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격적인 신앙 (삼상 17: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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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인 신앙 (삼상 17:41-49)

얼마 전 저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인 학생이 어머니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학생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학생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주일날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갑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러한 학생이 그 엄마에게 은밀하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엄마 우리 교회에 하나님 안 계셔!”
“우리 친구들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지만 다 하나님과 상관없어!”
“그냥 하는거야.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차지하고 있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저는 그 학생의 “우리 교회에 하나님 안 계셔!”라는 말이 뇌리에서 아직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청년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 생각만 해도 저는 소름이 돗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지 주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셨는데 우리가 변화에 걸맞지 않은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백성다워야 백성이지, 백성답지 않으면 뭐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백성다운 것일까요?”

오늘 저는 그 대표적인 것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살 때 변화된 신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군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출 12: 41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분명히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교련’이나 ‘군사학’을 배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흔한 ‘방위’도 한 사람이 없이 가장 천한 벽돌을 굽고 막 노동을 하였습니다. 군대 근처에도 못 가보고, 무기를 만져보지도 못한 그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군대’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군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자격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건넌 그들을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군대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수비입니까? 공격입니까?  세상에서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점령하고 공격하기 위해서 군대가 존재합니다.성경의 군대는 싸우고 공격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신다면 그들은 ‘공격적’이고 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영적 이스라엘’이 된 우리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수비 위주’입니까? ‘공격 위주’입니까?

여기서 싸우는 대상은 ‘영적인 원수들’과 ‘어둠의 세력자들’이지 ‘성도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군대의 군인으로서 우리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을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로서 우리는 이러한 영적 싸움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게흘러서 싸움하는 것을 자주 무시하거나 포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싸움을 포기한다고 해서 싸움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전쟁을 우리가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평안하다던가,  기쁨이 넘친다든지, 삶에 보람이 있다던지, 아니면 행복하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포기한다면,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사실은 우리는 유린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은 신사적이지도 양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이고 군사들인 우리는 싸워야 하고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장면’을 통하여 그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를 알리고자 하신다고 믿습니다.

먼저 골리앗을 통하여 우리 대적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였습니다.(33절)
이 이야기는 우리 대적은 ‘싸움에 도사’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서부터 싸움을 한 사람은 웬만한 싸움에서 지지 않습니다.

또한, 골리앗의 신체적인 조건들을 보겠습니다.
그의 신장은 여섯규빗 한뼘, 한 규빗이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이니까 약 45 Cm 이니까,
그리고 한뼘은 20 Cm이니까 그의 신장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 약 2m 90cm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장이 지구상에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저는 성경의 기록은 과장도 상상도 아닌 것을 믿습니다.
골리앗이 입었던 갑옷은 약 57kg이며 창날만 6.8kg입니다.
대개가 키가 아주 큰 사람들은 다리가 휘거나 하체가 약한데 골리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 신장에 웬만한 사람 하나를 들고 업고 다니는 체력의 소유자입니다.
골리앗에게는 방패만 담당하는 군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한 골리앗이 주로한 일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공포감을 주는 일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며,  나랑 싸워보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시비를 거는 일입니다. 

사십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나와서 시비를 걸었다고 16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골리앗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우리의 대적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먼저, 공포스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 최홍만 같은 이가 술에 취해서 칼들고 여기 앞에서 소리 소리 지른다고 생각하면 참 무서울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다 겁에 질려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스라엘에게 한 그러한 공포적 행동들은 벧전5:8의 표현에 의하면,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면서 ‘우는 사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렇게 크고 공포스러운 골리앗 , 방패를 든 자까지 앞에 있고, 무겁고 튼튼한 갑옷으로 온 몸을 쌓은 체 밤낮으로 욕하고 저주하며 싸움을 거는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진을 치고 블레셋과 싸우려고 할 때마다 이 골리앗을 보고는 겁에 질려서 다 도망갔습니다.
어떤 누구도 심지어 사울 왕까지도 덤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심히 어렵고 위기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공포스럽고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승리하게 되나요?
누구에 의해서 거인 골리앗이 넘어졌습니까?
그것은 어린아이이며 목동인 다윗에 의해서 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요?
다윗은 그의 가족들조차도 그가 강한 군인적인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아마도 어려서 그러한 자질이 보였다면, 군대에 보냈겠죠?
사무엘 선지자가 왔을 때에도 모든 가족에게서 잊혀졌던 자 입니다.
외모에서부터 본문 42절에 의하면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웁다고 말합니다.
그건 군인의 외모가 아닙니다.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우니라.

여러분, 골리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인지..
40일 동안 와서 한 번 붙자고 고래 고래 소리 질렀는데 젊고, 붉고, 아름다운 놈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것도 손에 막대기 들고, 새총 하나 가지고 나왔으니.. 갑옷도 안 입고..
그러니 골리앗이 하도 기가막혀서..
“야 이 놈아 내가 치와와냐? 니가 내가 애완견으로 보이냐?”
“내게로 와라! 내가 한 방에 날려서 너를 새들의 먹이로, 들짐승에게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45- 47절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 말을 듣고는 골리앗이 승질이 나서 다윗을 던져 버리기 위해 마주 가까이 왔습니다.
그 때 다윗이 우리가 잘 아는데로 물맷돌을 던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또 짚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의 진정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아주 재미있는 상상을 했습니다.
“만일 다윗의 물맷돌 주머니가 빵구나서 물 맷돌이 다 새어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겁니다. 물맷돌이 없어서 급해가지고 아무런 짱돌이라도 잡히는데로 집어서 던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돌이 갑옷에 맞어 튕겨져 나갔고 다윗은 잡혀서 골리앗에게 죽었을까요?
저는 확신하건데 만일 물맷돌이 없고 짱돌로 던졌어도 골리앗은 결국 이마에 그 돌이 박혀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작대기 하나를 던져도 이마에 맞아서 박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진정한 무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윗은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나아오나 나는 돌로 가노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공포스럽고 갑옷으로 휘 감고, 방패로 앞세워도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그게 어디입니까? 그것은 이마입니다. 조그마한 돌 하나로 생명을 잃게 할 만한 곳이 이마입니다. 아무리 거대해 보이고 공포스럽게 보여도 우리의 대적에게는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우리는 그 약점을 찾아내서 쳐야 합니다. 돌맹이를 던져야 합니다.

오늘 제가 제일로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윗의 믿음’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다윗이 믿는 하나님을 사울은 몰랐을까요? 아님 최소한 다윗의 형들은 몰랐을까요?

유대인들에게는 ‘첫째’가 중요합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다윗에게 가르친 것을 첫째인 큰 형 엘리압에게 안 가르쳤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형들이나 사울이나 다른 병사들 중에서 그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들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그 다른 점이 이 전쟁을 승리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과 온 땅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할까요? 무엇이 다윗과 사울과 다른 병사들의 차이일까요?

간단합니다.  다윗은 나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물러가서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실지로 골리앗 앞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골리앗이 공포스럽고 공격을 하여도, 다윗에게는 싸워서 이길만한 아무런 신체적, 객관적인 보장이 없어 보여도 다윗은 실지로 공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하고 교활한 존재인 골리앗을 물리치는 일은 오로지 공격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공격해야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공격하고 나가야 온 땅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 줄 알게 됩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설교자 챨스 스펄젼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원수를 잠잠케 만든다는 것은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 되므로 그를 대적하여 계속해서 공격하십시오! 여러분이 그와 충돌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를 제압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마귀가 지상에서 천국으로 행하는 나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기쁘고, 평화롭고, 안전한 것처럼 여행할 것이지만 분명히 아무런 명성을 얻지 못한 채 여행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모든 발결음은 영광을 얻기 위해 싸우는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은 영원한 명성  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전진하십시오. 방해가 많을수록, 영예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저항해서 이기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패배하고 만다는 것을 알아 여러 가지 사단의 방해들에 용감하게 대항하십시오.”

말씀을 좀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장면을 통해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군대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격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특권 아니 더우기 젊은 크리스챤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격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수비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다윗과 같이 나아가야 합니다.
돌아서서 물러가서는 안 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 원수의 머리를 아니 대가리를 박살을 내었는데 아직도 겁에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도전하십시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공격적입니까? 수비적입니까?
우리 높은뜻 청년공동체가 수비적인 신앙을 가지고 겨우 믿음을 지키려고 한다면 우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여기도 하나님이 안 계시구만”하고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공격해야 합니다.
절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다시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물러서면 집니다. 먼저 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승리를 이미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먼저 공격적인 기도를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올 해에 매 달 여러분들에게 ‘기도문’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새 가족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높은뜻 성경 뒤쪽에 보면 ‘대학생들을 위한 기도문’과 ‘청년들을 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굉장히 공격적인 기도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기도문을 잘 활용하시기를 정말 권합니다.
이렇게 짧게라도 공격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과 교회와 나라를 위한 기도가 더 공격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7월의 기도문으로 같이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116:1,2)

하나님! 늘 우리의 작은 신음과 간구에도 귀를 기울여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평생의 삶이 당신 앞에 기도하는 삶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여름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또 거룩함을 향하여 불타오르는 여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뜨겁게 하나님을 갈망하고 더 뜨겁게 주를 사랑하는 여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전교인 수련회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당신과 친밀함을 누리는 시간, 자연과 벗 되어 쉼을 얻는 시간, 지체들 안에 있는 당신의 귀한 형상을 발견하는 시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열매나눔 재단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해온 희년의 꿈들이 이 재단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되고 눈먼 자가 다시 보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되는 일들이 이 재단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지법인으로 등록하는 모든 과정 중에 함께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여름 단기선교가 준비 중에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 몽골, 베트남, 인도, 스리랑카, 일본으로 복음 들고 나가는 지체들을 지켜주시고,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아름답고 귀한 소식 전해지는 귀한 시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문희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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