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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회 없는 인생을 사십시오 (눅 1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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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을 사십시오.
누가복음 16:19-24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서울에 있는 교회를 맡아서 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목사님의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인데 이 아이가 한국에 와서 가만히 보니까 한국의 식당은 대부분이 '탕'자가 들어가는 깨달았습니다.
'설렁탕', '보신탕', '갈비탕', '삼계탕'......

하루는 이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서 음식을 사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는데 그날 이 아이가 엄청 야단을 맞고 쫓겨나서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유인즉, 이 아이가 '탕'자가 들어가는 것은 전부가 음식점인 줄 알고 집으로 오는 길에 '탕'자가 있어서 들어갔는데 그곳이 목욕탕이었다는 겁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남탕'이 있고, '여탕'이 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급한 김에 1층에 있는 여탕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왠 아주머니들이 옷을 다 벗고는 이 아이를 보고 놀라서 야단이 났더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목사님이 듣고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 그렇게 하면 골탕 먹는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골탕이 어떤 음식이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어설프게 알면 골탕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잡습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윌리암 보덴이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서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습니다."

그는 이러한 결심을 하고 성경 뒤 표지에 "지체할 수 없음"이라고 썼습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성경 뒤 표지에 이번에는 "후퇴 없음"이라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회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 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러나 그의 성경 뒤 표지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후회 없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은 과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오늘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을 읽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철학, 신학, 음악, 의학의 네 개 부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노벨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호화롭게 살 수 있었는데도 아프리카 원시림에 가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한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그 동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에 실제 존재했었던 인물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화사하고 값진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자의 문전에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더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어느 날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죽는 순간 그 영혼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못 되어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영혼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 당하는 지옥에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확실하고도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신하들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하게 했던 진시황제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대통령이든 평범한 일반 시민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무론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공평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두 번째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죽을 것인데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사망 곧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 땅의 삶으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영원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든지,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당하는 삶이든지….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인간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품어왔던 관심은 이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며, 죽음으로써 끝이 나는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의 조상인 아담의 불순종과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으로써 인간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죽으면 천국에서의 삶이든지, 아니면 지옥에서의 삶이든지 둘 중에 하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부단히 노력을 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행의 공로를 쌓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종교 의식을 충실히 행함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수고를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도저히 이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선행과 어떤 종교 의식을 충실히 행함으로써 죄의 문제와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고백은 고통과 절망과 허무뿐이었습니다.

불교 사상 보기 드문 초인적인 극기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서 정각을 얻어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 스님을 보십시오.  그는 성불하고자 한때 8년간 드러눕지 않고 정자세로 앉아서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했습니다.  10년간 사람의 근접을 막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홀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불자들은 그를 가리켜서 '우리 곁에 왔던 부처'라고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죽을 때에 남겼던 열반송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자기의 노력으로 도에 이르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 '세상을 속인 죄가 너무 커서 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고 말했던 성철 스님의 절규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게 합니다.

그렇다면 길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다리는 놓여졌고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는 한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떻게 그 다리를 건너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이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8년 동안 드러눕지 않고 앉아서 도를 닦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죽음 이전의 삶에 의해서 결정되어 집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죽은 이후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살아가면 우리는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삶은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기회의 시간들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부자처럼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리고 후회하는 인생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은 기회가 유한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유한한 우리가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나를 기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라는 것이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엔가 그 기회는 떠나가고 차갑고 무서운 심판의 때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미화시키거나, '죽으면 끝이다'는 말로 부정하려고 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옥을 만드시지 않았을 것이고, 만드셨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천국보다 지옥에 계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요, 어리석은 자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지옥은 실제하며 그곳은 고통의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부자는 이 땅에 살면서 호의호식했습니다.  본문에서의 '자색옷'은 겉옷인데, 그가 외투를 자색으로 입었다는 것은 당시 그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운 베옷'은 속옷으로 당시에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수입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풀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귀한 삶이 그의 삶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다음 장면은 부자가 죽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신론자들의 말처럼 천국은 죽어서 가보아야 아는 것이니 이 땅에서 부자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나그네의 삶이지만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한 본향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을 살면서 구원 얻을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내 형제 자매들이 이 기회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그에게 구원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도록 먼저 믿은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래서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이 천국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지옥에 가면 안됩니다.

본문의 부자처럼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며 고민하는 지옥에 가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즐긴다하여도 구원의 기회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부자는 이 땅에서 얻을 것을 다 얻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건강합니다.  호화로운 집이 있습니다.  좋은 옷이 있습니다.  날마다 같이 잔치하며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형제가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장례식은 거창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대단히 웅장한 관에 옮겨졌고, 그의 무덤은 아주 거창한 돌무덤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로 한다면 그의 무덤 앞에는 어리어리한 대리석으로 묘비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부귀 영화를 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서 '안되었다'고 모두가 애통해 했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의 죽음은 안되었습니다.  정말로 불쌍한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어서 지옥에 갔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어서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미 끝이 난 것입니다.

반면에 나사로를 보십시오.  그는 지독스럽게도 가난합니다.  병들었습니다.  그가 거처할 집도 없습니다.  입을 옷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어느 누구 하나 애통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시체는 거적대기에 둘둘 말려서 산자락 어딘가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 아무렇게나 묻혔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차라리 잘 죽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잘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어서 영원한 천국에 갔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에서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비록 현실의 삶은 힘들었어도 구원 얻을 기회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나사로처럼 건강도 없고, 부도 없고, 명예도 없다 하여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시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잘 사십시오.  이 땅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며 영화로운 삶을 사십시오.  그러나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잘 죽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고 할지라도 죽어서 지옥 가는 인생이라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영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돈만 있으면 모든 인생이 O.K.라고 했습니까?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부자의 영화가 어디로 갔으며 부자의 재물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가 누렸던 쾌락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더란 말입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인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얼마나 실감나는 진리의 말씀입니까?

역사는 이 말씀이 분명한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영화와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들은 지금 이 땅에서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무덤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옛날 저들을 깨우치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살아 움직이며 역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역사가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부자는 얼마나 후회하고 탄식했을까요?  자고로 사람은 당하고 나서야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후회를 해도 다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때가 있기라도 하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후회를 해도 영원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바로 죽음 이후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보니 세상에서 철없는 아이들처럼 대책 없이 살아가는 형제들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은 이미 끝난 인생이지만 자신의 형제들과 자식들만은 이 고통의 지옥에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규합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제 다섯 형제가 거기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고통받는 곳에 그들은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경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다섯 형제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형제들은 심판을 받게 될 다섯 형제일 수 있습니다.  나에게 경고하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경고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잘 선택하십시오.  과거에 텔레비젼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
틀린 말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그 순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 옮겨질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어느 군목이 전쟁에 나가기 직전에 병사들을 앞에 놓고 어쩌면 이 시간이 마지막일는지 모른다는 심각한 생각으로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 설교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대위가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여보시요, 군목님.  그러면 나처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고기가 되겠네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대위님!  그 문제에 관해서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위님이 직접 체험하시게 될 테니까요."

D.L. 무디 선생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할 때마다 항상 눈물이 가득 고였다고 했습니다.  최후의 때를 모르고 어리석게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옥에 갈 영혼들을 생각하고 울었던 무디의 눈물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단테 신곡 지옥 편에 보면 지옥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이제부터 모든 희망을 버려라!"

예수님은 이 지옥의 고통을 표현하실 때마다 그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인생의 종착점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이 세상에 크게 성공자가 되지 못해도 내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을 준비하고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까?
여러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 받고 살아가십니까?
용서의 문제를 확신하고 살아가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사는 최고의 사랑이 있다면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최고의 효도가 있다면 부모님에게 구원을 대접해 드리는 일입니다.  최고의 우정이 있다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최고의 유산이 있다면 믿음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한 초등학생의 작문 중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난 어차피 광부니까 열심히 일해야 되겠지만, 너는 커서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 하셨다."

막장 인생을 사는 한 아버지의 피맺힌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40도가 넘는 깊은 갱 속에서 시커먼 연탄가루, 돌가루를 마시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괴로움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바램이 있다면 내 자식만큼은 이 고생하지 않고 살아 주기를….  막장 인생이 되지 않기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이렇게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몸부림을 하는 것입니까?  나 혼자 예수 믿기도 벅찬데 말입니다.  그것은 한 영혼이라도 지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불에 타 죽는 사람들을 살려내 보자고 몸부림을 하는데 나 혼자만 무관심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잠든 영혼들이 계십니까?  깨어나십시오.  영혼의 깊은 잠을 즐기시는 분이 계십니까?  깨어나십시오.  지옥에서 영혼을 건져내는 사역에 힘을 모읍시다.

본문에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당당히 살았겠지만, 성경에는 부자의 이름조차 나와있지 않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명함을 가지고 다녔을까요?

이 세상에 살 때 아무도 나사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나사로.  나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아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나중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 보면 성경책에 이런 선언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의 이름들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 자녀들을 아십니다.  나사로.  그는 회개하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천국의 주인공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마지막 때에, 내 남은 마지막 숨결을 거두어야 할 그 때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위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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