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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큰 은혜 큰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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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독교 신앙은 기적의 신앙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윤리만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종교라고 한다면 저는 오늘로 교회 문을 닫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상식을 얻기 위해서라면 여러분이 꼭 교회까지 오시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독교는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상식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열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를 만나서 깨끗함을 얻는 기적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사람은 육체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인 구원의 기적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른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과는 달리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 더 큰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 비밀이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에서 보다 더 큰 은혜, 더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 사람에게서 배우고자 합니다.

1.믿음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렇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모두가 다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가 자기를 고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간절하게 소리치며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1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열명 모두는 이 믿음에 근거하여 제사장에게 가다가 길거리에서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당을 드나드는 우리 교인들에게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 믿음의 기대치는 다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기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배하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삶의 기적과 변화를 체험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염세주의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지팡이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지팡이처럼 의지하다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 지팡이를 버리듯 예수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의 믿음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건강을 얻게 되자 예수를 다시 찾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인 이 한사람은 달랐습니다.
18-19절을 읽겠습니다.
“이 이방인 이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둥병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면서, 이 예수는 자기가 평생을 통해 믿고 따라야 할 구주와 주님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단순히 자신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까지도 치료하실 분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다른 아홉 명보다 더 큰 은혜, 더 위대한 기적을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보혜사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믿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주님께 기도함으로, 성령의 은사인 믿음이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리는 믿음으로 성장하여 더 큰 믿음으로 더 큰 기적을, 더 온전한 믿음으로 더 온전한 기적을 경험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예배입니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여기서 “엎드림”은 단순한 존경의 의미가 아닌 예배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 엎드리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란 하나님의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계4:11절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천국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가치가 있으신 분”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실만한 절대가치가 있으신 분”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현대교인들의 영적 무기력은 예배의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이겨냈던 비밀은 예배에 대한 갈망과 헌신 때문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일주일 내내 예배를 기다리며 살았고, 토요일은 가슴을 설레이며 예배를 사모하고, 주일에는 늦어도 30분전에 예배당에 도착하여 찬양과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년공과공부 시간을 통해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임재하시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주의 말씀을 받는 그 감동으로 그 암울한 시대의 가난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예배 자들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사모하고 준비하고 기다리기는커녕, 예배드리는 한시간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일년에 한두 번 특별한 사정으로 예배에 지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습적인 습관으로 언제나 예배가 시작된 이후에 입장하는 사람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약속하신 주님의 기적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기 중심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감사입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님께서 열명의 문둥병자들을 치료하시면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그 당시 정결의례상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단순한 종교기능만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법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이 문둥병자들에게 “너희는 문둥병에서 치료되었다”라고 선언을 해주어야만 비로소 이 문둥병자들은 사회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그 동안 사회에서 격리되어 성밖 어두운 동굴에서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제사장으로부터 자신의 깨끗함을 확인 받는 순간, 가족과 친구들에게 달려가 얼마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홉 명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 사마리아인은 먼저 예수님에게 달려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감사는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감사였고 우선 순위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마음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인격적인 감사의 영성이 그로 하여금 더 큰 은혜, 다 큰 기적인 영혼을 구원받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청교도들의 감사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도 “촛불을 보며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이들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이들에게는 태양 빛을 주시고, 태양을 인하여 감사하는 이들에게는 태양 빛도 필요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감사를 생활화하며 살았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미국 교회에서는 “스콴토(Squanto)를 기억하자”는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스콴토는 인디안 청년의 이름입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년전 1608년에 헌트라는 이름의 함장이 이끄는 영국 무역상들이 이곳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왐파나옥(Wampanaog)인디안 족을 만나 무역을 거래하는 척하다가 그들을 포로로 잡아 스페인에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스콴토라는 청년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한 친절한 사제에게 팔려 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의 인도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것을 배우면서 늘 세 가지를 기도하였습니다.
첫째는,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고향에 돌아가면 자기를 잡아간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백인들과 협력하여 고향 땅을 스페인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기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인생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후 스콴토는 사제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기독교인인 영국의 존 슬랜니(John Slaney)라는 사람의 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슬랜니의 도움으로 고향을 떠난지 10년 만인 1619년에 미국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고향에 왔을 때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약속한 그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소수의 남은 자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고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해 청교도들이 그곳에 도착합니다.
스콴토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 유창한 영어로 청교도들을 환영하고 청교도들이 그곳에서 정착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을 인도한 지도자 브래포드(William Bradford)목사는 그의 일기에 “스콴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준비된 특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우리에게 옥수수를 어떻게 심는 것과, 낚시를 어떻게 하는 것과, 땅을 어디에 어떻게 개간하는가를 가르쳤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인도했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수년 후 스콴토가 열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그는 청교도 지도자 브래포드 목사에게 “자기가 천국에 편히 갈 수 있게 기도해 달라는 것과 부디 이 땅을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기 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기도는 “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땅을 축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미국의 기적은 스콴토의 믿음과 감사에서 비롯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미국 교회들이 “스콴토를 기억하자”고 운동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스콴토 이전에 본문에서 소개하는 치유받고 감사한 사마리아 나환자같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바로 알아 주님이 기대하셨던 복음전도의 흡입력을 가진 교회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과 예배 그리고 감사를 통해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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