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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기적을 누리라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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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요 2 : 1 - 11
제 목 : 날마다 기적을 누리라

오늘날 사람들은 신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습니다.  신에 대한 존재 자체도,  부정을 하지요.  왜이겠습니까?  자신들에게 별로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과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때는, 모든 것을 신의 섭리나, 신의 조화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식이 늘어가고, 과학문명도 점차 발달하다 보니까, 이제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에 대한 의지나 기대가, 별로 필요치 않게 되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오늘날은, 기독교에 대한 매력도, 점차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  입니다.  흔히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슨 체험입니까?  기적의 체험이지요.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길이 없는 인생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되는 역사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체험하고 바라본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 또는  기적의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람들 가운데 이런 체험에 대한 기대가 별로 나타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에 대한 기대가, 많은 부분 사라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제는 삶에, 물질에 대한 어려움이 크게 없기 때문이지요.  또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굳이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발전한 과학이나, 의술의 힘을 빌려, 자기 스스로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이, 말세에 나타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눅 18장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을 향한 끈질긴 간구를 통해, 응답을 받은 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결론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에” 라고 했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주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믿습니까?  다시 말해 말세의 때에, 성도들 가운데 이와 같은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면,  주님의 예언과 같이, 이런 주님에 대한 신뢰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세에는 여러 가지 불신앙의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바로 이 믿음의  상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상실.

오늘날 이 시대에, 왜 기적이 나타나질 않고, 체험이 줄어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줄어든 까닭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가 없음이 확인된 까닭입니까?  이도 저도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한가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나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신앙 가운데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신비한 신앙의 체험들이 많았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시대에는 기적이 없고, 신비한 신앙적 체험들이 나타나질 않는 이유는,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바라보세요.  하나님 외에 믿을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과거에 돈이 없어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다 해서, 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믿습니다.  과거에는 육신에 병이 생겨도 치료할 방법을 몰라,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으며 기도하며 매달렸는데, 지금은 왠만한 병은 다 병원에서 고쳐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보다 의사를 더 의지하고 믿습니다.

뭐하나 아쉬운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거예요.  굳이 신을 찾으며,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아도, 인생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인생을 속이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눈속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게 하는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닷물과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풍요로움에 만족하며 살아갑니까?  그러나 그 세속적인 풍요로움이, 결국은 여러분의 신앙을 망가뜨리고, 인생을 멸망에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풍요로움, 하나님을 떠난 지식의 충만함, 이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찌르고,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일시적인 만족함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은 어떻습니까?  끝없는 목마름에 자꾸만 바닷물을 들이키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소위 상류층에 속한다고 하는 부유한 사람들, 또 남들보다  지식이 앞선다고 하는 인테리들, 그들이 왜 삶에 고통을 느끼며, 심지어는 자살까지 합니까?  우리가 볼 때는, 도대체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그 사람들이, 그토록 인생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다 이루고 가진 것 같은데, 왜 그런 허망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들이 이룬 것이, 다 신기루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제껏 마신 것이 바닷물과 같았기에, 그들은 인생의 목마름 속에 고통 받으며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이와같은 허망한 인생 살아가는 분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상실한 이 시대에, 사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멸망으로 치닫는 이 안타까운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은 끝까지 믿음을 소유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신비한 체험들을,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위대한 능력을, 세상에 증거 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듯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기적의 역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지는 줄 믿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어요. “기적이 없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받아서, 천국에까지 이르게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흔히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이라 일컫는 말씀인데, 이 사건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줍니까?  예수님이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기에, 여기에는 인생을 향한 많은 교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보면 전부를 알 수 있다.”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공생애 3년, 짧은 기간 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처음으로 행하신 이 기적에, 주님이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적의 사건 속에는, 우리가 인생 중에 어떻게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기적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다른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의 사건 이후에 나타난 모든 기적의 사건들은, 오늘 이 사건의 연장선입니다.  이 사건의 부연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기적의 원리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잘 깨달으시고, 이 말씀 붙들고, 여러분의 인생에 믿음으로 적용시키면서, 여러분의 인생에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결혼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머니인 마리아도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인 잔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잔치에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모자라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잔치를 하는데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잔치를 하면, 우리의 풍습과는 달리 몇날 며칠을 이어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잔치에 쓰일 음식을 항상 넉넉하게 준비해 두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래서 잔치 음식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포도주도, 넉넉하게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왠 일입니까?  잔치가 흥에 겨워서인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모자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부분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혼인 잔치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 부족함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당황하게 됩니다.  어려움을 겪게 되고,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 부족함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이제 손님을 청하고, 그들 앞에 혼인 잔치의 풍성함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뜻하지 않게 모자라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자랑할 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남들보다 많은 재물입니까?  남들보다 더한 지식입니까?  남들보다 높은 명예입니까?  처음에는 그것, 자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예전에 많던 재물이, 오늘은 말라버렸습니다.  예전에 남들보다 앞선 지식이, 지금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남들보다 높았던 명예가, 지금은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IMF 한번 경험하니까, 온 국민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경제적인 환난이 닥쳐  오니까, 저마다 쓰러지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지식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어 갑니까?  그 흐름을 못 따라가서 도태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제 총리였던 사람이 오늘 물러나고, 어제 국회위원이었던 사람이, 오늘  물러나야 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 안에서 기적을 이루는 출발은, 바로 자기 인생이, 이처럼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혼인 잔치와 같이, 모든 것이 풍요롭게 준비되어 마냥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것 같지만, 언젠간 우리의 인생에도 소중한 것들이  부족함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포도주 항아리도, 언젠가는 바닥이 나는 때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한계를 느끼며, 절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돈도 바닥이 납니다.  건강도 바닥이 납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권세도, 명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배우자도, 자식도, 다 바닥 날이  오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인생의 기쁨을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시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같습니다.  좀 일찍 바닥이 나고, 늦게 바닥이 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와 같은 현재의 부요함 속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바닥이 날 날이 있음을 깨닫고, 미리 신앙으로 그 부족함을 대비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날마다 부족하지 않고, 그 부요함과 풍요로움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밖에 없다. 
이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기적의 근원이 되십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 분을, 우리가 신앙 가운데 붙잡지 않는 다음에는, 결코 우리 인생에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붙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교회를 다닌다는 말입니까?  교회를 다니면, 저절로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 말씀을 보세요.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지금 주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혼인 잔치집이지 않습니까?  지금 혼인 잔치 집에는, 기적의 근원 되시는,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능히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처음부터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 일이,  주님 당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주님이 능력을 베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왔으면, 그 혼주와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왜 그 현장에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주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일을, 당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또 아직 능력을 베풀 때가 멀었다고, 모른 채하시는 것일까?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 이런 주님의 처사는 쉽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고, 이 문제를 바라 볼 때에, 이런 주님의 처사에는  매우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그 혼인 잔치에, 어떤 자격으로 오게 된 것입니까?  손님의 자격입니다.  손님의 자격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손님의 입장에서는,  그 집의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예수님을 우리가 신앙 중에 손님으로 청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결코 주님이 우리 인생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손님은 어디까지나 손님일 뿐입니다. 
손님은 그저 있는 음식 대접만 받다가 돌아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집의 음식이 부족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왜 삶에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까? 
왜 오늘날 성도들은, 삶에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손님으로, 자신의 신앙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교회에 다닙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입술로 주님을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기쁨이 없고, 늘 부족함을 느끼며 곤고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왜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닌, 그저 나와 함께 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에 함께 한 예수님은, 어떠한 자격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함께 하고 계십니까? 
손님입니까?  아니면 주인입니까?  아직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내 인생을 내 주관대로 이끌어 가다가, 인생에 모자람이 있을 때만, 인생에 부족함이 있을 때만, 주님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그런 정도의 신앙 입니까?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런 신앙으로서는 절대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참 다행한 것은, 주님은 긍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계속 우리가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면, 주님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어쩔 수 없이  포도주 몇 병 정도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얻는, 도움을 받게 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적인 축복의 역사는, 절대 체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진정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 된 자리를, 내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을 주관하실 수 있도록, 온전히 맡겨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주님의 능력의 손길이, 여러분 인생 가운데 역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세 번째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말씀에 오직 순종할 때만이, 우리 인생에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모자란 상황을 이야기 할 때, 주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참 당황스런 상황이지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참 서운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잖아요?  어머니가 부탁을 하면, 아들이 좀 들어줘야지.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었던 마리아는, 서운한 감정에 사로잡히질 않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금방 알아차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를 않지만, 마리아는 혼주인 연회장을 만나러 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연회장에게, 주인 된 권리를 요구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거절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당부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세요.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여러분, 아무리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손님된 입장에서는 그 집의 하인을 마음대로 명령하며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 된 권세를 이양 받았다면 다르지요.  마리아로부터 주인 된 권세를 이양 받은 사실을 안 예수님은, 주저 없이 하인들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인들에게 명령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는, 물 항아리 여섯 통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다는 겁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그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바쁜 상황입니까? 
잔치가 벌어진 곳입니다.  준비했던 포도주가 동이 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 그들의 수발을 드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바쁜 와중에, 느닷없이 예수님이 나타나 명령을 하는데, 쓸데없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아구까지 채우라고 합니다.
지금 필요한 건 물이 아니잖아요.  뭐가 필요합니까?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포도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에, 뜬금없이 물을 부으라니, 이게 이해가 되는 명령입니까?  그러나 이 하인들은, 자기의 생각에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상관하지 않고, 그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겁니다.  믿습니까?  순종에는 내 생각이 필요가 없어요.  내 지식이나, 내 경험, 필요가 없습니다.  자꾸 생각하니까 순종을 못하는 거예요.  자꾸 내 지식을 내세우고, 내 경험  내세우다 보니까, 순종을 못하는 겁니다.  물을 채우라면 채우고, 아구까지  채우라면, 아구까지 채우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멘!!!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가 처음 체험한 기적이 무엇입니까?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두 배에 나누어도 잠기게 될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기적이 있기 전에, 주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에게 이 말씀은, 이해가 되질 않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깊은 곳에는 고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이미 밤새도록 고기를 잡고 돌아온  상황입니다.  그물 손질도 다 끝났고, 이제 몸도 지칠 대로 지친 피곤한 상황  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베드로가 뭐라고 말을 합니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아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온 짜증스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다시금 바다로 나아갔다는 것이예요. 그것도 고기가 없을 줄 아는,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좀 미련해 보이는 짓입니다.  어리석게까지 느껴지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순종을 통해, 베드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눅 5 : 6 - 7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할렐루야!!!! 

“그리한즉” 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순종한즉” 이란 말이지요.  순종했더니,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갈 때도 마찬가집니다.  “오라” 하는 말씀에, 앞뒤 생각 없이 그대로 물 위를 뛰어 들어갔더니, 주님처럼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인들도 마찬가집니다.  물을 채우라 할 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물을 채웠습니다.  주님이 아구까지 채우라 해서, 아구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또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8절 말씀을 보세요.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물을 채운 항아리를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까지도, 이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순종은, 그저 물을 채우는 정도의 순종과는 차원이 다른 순종입니다.  이번 순종은, 그들의 희생을 담보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연회장은 포도주가 모자라 방방 뛰고 있는 상황 입니다.  그런데 하인이 항아리를 들고 오면, 그게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포도주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포도주가 아닌 물이었다고 했을 때, 그 연회장의 반응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그 하인의 귓싸데기를  올려붙이던지, 아니면 주인을 희롱한 죄로, 감옥에 가둬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인들은,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자기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주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9절 말씀을 보세요. 다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누구는 알더라?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한 사람들만이, 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만이 인생에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말씀이라면, 한번이 아니라 두 번도, 아니 백번도, 천번도 연속해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마침내 이런 놀라운 기적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축복의 기적을, 인생 중에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어느 마을에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마을 뒤편 높은  산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는데, 몇 사람이 채광하려고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커서 돈을 벌면, 꼭 고향에 돌아와서, 그 광산을 다시 개발하여 일확천금의 이룬 후에,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아이도 자라고, 그의 꿈도 자랐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어느 정도 돈을 모으자, 그는 버려진 산에 찾아와 광맥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예전에 사용하던 갱도는, 이미 다 무너져서 땅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파도 파도 끝이 없습니다. 아무 진전도 없이 시간만 흐르게 되었습니다.  동업하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고, 금광 개발을 위하여 모았던 돈도, 다 바닥나 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광부 몇 사람과 함께,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힘없이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도 이제 지쳐서, 그 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굴속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 무엇이 있다!”
그래서 달려가 보았더니, 그 자리에는 곡괭이 하나가 있었는데, 손잡이 자루는 거의 썩어 없어지고, 앞에 쇳덩어리만 꽂혀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 보려고 해도, 도저히 빠지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매달려서 힘껏 뺏습니다.  그런데 곡괭이 날 끝에, 뭔가 노란 것이 묻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뭐였겠습니까?  금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노다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그 금광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땅을 계속 파다 지쳐서, 마지막으로 한번 내려찍었는데, 아무리 곡괭이를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으니까, 그냥 그것을 땅에다 박아둔 채,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땅을 파고 들어간 그 청년이, 결국에는 그 금 노다지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이라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한 두 번 주님 말씀에 순종했다.  그 정도로 기적을 체험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 다 기적을 체험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순종으로서는, 은혜는 받아도, 축복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하인과 같이, 자기희생을 감수한  순종에까지 이를 때, 비로소 축복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대해, 자기에게 해가 되는 정도의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어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내 놓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이기적인 신앙입니까? 

성경을 보세요.  모든 기적의 주인공들이 다 이런 희생적인 순종을 통해 기적을 체험한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구약의 대표적인 기적인,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기적,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다 하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던 기적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엘리야가 한 말에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 남은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로 떡 하나 구워 먹고 죽으려는 상황에서, 엘리야가 나타나 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그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을 일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과부가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자기희생의 순종입니다.  그 결과로서, 그 사르밧 과부는, 이런 놀라운 기적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기적을 나타내 주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기적의 주인공, 이런 축복의 주인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 시대입니다.  더 이상 종교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신의 도움을 필요치 않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가 이제는 교회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성도들의 신앙까지도, 좀먹는 시대가 되어졌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질 않고, 손님으로 생각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동업자 내지는, 자기 인생의 비서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 보다는, 내 뜻을 이루어 다라고 하는 기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에서 무슨 주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이런 신앙의 모습에서  무슨 인생의 기적적인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들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순종이 없으니 기적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으니 축복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고,  더 불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심하며 불신하며 살아가는데,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은, 더 하나님과 멀어진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연회장은 하인들이 가져온 포도주를 마시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만드시는 포도주는, 술에 취해 무디어진 혀의 감각으로도, 좋은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포도주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세상을 놀라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하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또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통한  기적을, 세상에 나타내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신앙이 연약한 성도들, 주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했던 성도들이, 이제는 바른 신앙 소유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 온전히 걸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했습니다. 
누가 믿었다고 했습니까?  제자들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인들의 기적을 일으킨 신앙을 통해, 이제까지 무의미하게, 무감각하게 주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를 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하인과 같은 귀한 순종의 신앙을 통해,  인생에 풍성한 기적의 축복을 늘 체험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위대하심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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